자발적으로 모텔에 갔더라도 상대방이 성교 거부의사를 명시적으로 밝혔다면 강간죄가 성립한다는 대법원판결이 나왔다. 이는 '저항이 불가능할 정도로 폭행·협박이 있었던 때'나 '주위 사람들에게 구원을 요청할 수 없었을 때'에 강간죄를 인정하던 종전 판례에 비해 폭행·협박의 정도를 대폭 완화한 것이다.
특히 이번 판결은 일선 법원이 최근 강간죄의 성립여부를 판단할 때 피해자의 '성적 자기결정권'이 침해됐는지 여부를 점차 중요한 요소로 삼고 있는 시점에 나온 것이어서 앞으로 하급심에 적지않은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대법원 형사3부(주심 김영란 대법관)는 같은 동네의 미성년 여성을 강간한 혐의(청소년의성보호에관한법률위반상 청소년 강간등)로 기소된 임모(29)씨에 대한 상고심(☞2008도4069)에서 무죄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지난달 24일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청소년의성보호에관한 법률위반(청소년강간등)죄는 '위계 또는 위력으로써 여자 청소년을 강간하거나 추행한 것'으로서, '위력'은 피해자의 자유의사를 제압하기에 충분한 세력을 말하고 유·무형을 묻지 않는다"며 "'위력으로써' 간음 또는 추행한 것인지 여부는 행사한 유형력의 내용과 정도, 피해자의 연령, 행위자와 피해자의 이전부터의 관계, 그 행위에 이르게 된 경위, 구체적인 행위태양, 범행당시의 정황 등 제반 사정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판단해야한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이어 "피해자는 사건당시 16세의 작은 체구의 여자인데 비해 피고인은 28세의 큰 체격의 남자인 바, 피고인은 피해자가 계속해서 명시적인 거부의사를 밝혔음에도 피해자를 누르면서 강간한 점이 인정되고, 경험칙상 피해자가 처음 만난 피고인의 요구에 순순히 응해 성관계를 가진다는 것 이 납득되지 않는다"며 "피고인이 사건 당시 성교하기 위해 피해자의 몸 위로 올라간 것 외에 별다른 유형력을 행사하지 않았더라도 피고인이 자신의 몸으로 짓누르고 있어 저항할 수 없었고, 겁을 먹은 나머지 강간당했다는 진술은 가볍게 배척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지난해 4월 동네후배들과 술을 마시던 임씨는 후배의 친구로 소개받은 이모 양이 술에 취하자 "모두 다같이 모텔에 가서 자자"고 말한 뒤 이양을 모텔로 데려가 한차례 강간한 혐의로 기소됐다. 1·2심 재판부는 "여러 진술상 피고인이 피해자에게 위력을 행사해 피해자가 심리적으로 위축된 상태에서 의사에 반해 강간당했다고 보기 부족하다"며 무죄 판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