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이 가해자인 일본 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냈지만 소멸시효가 완성됐다는 이유로 또다시 패소했다. 일제 강제동원 사건과 관련해 하급심에서는 소멸시효 판단 기준을 놓고 엇갈린 판단을 내놓고 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48부(재판장 이기선 부장판사)는 14일 사망한 강제동원 피해자 김모 씨의 유족 5명이 니시마츠건설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소송(2019가합542399)에서 원고패소 판결했다.
김 씨는 1942년 함경북도 소재 니시마츠 공사장에 강제동원돼 1944년 5월 공사장에서 숨졌다.
일제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는 2006년 김 씨를 강제동원 피해자로 인정했다. 이후 유족은 2019년 6월 니시마츠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유족 측은 "망인은 강제동원돼 노무자생활을 강요당하다가 사망했다"며 "이러한 행위는 당시 일본 정부의 한반도에 대한 불법적인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의 수행과 직결된 반인도적인 불법행위에 해당하고, 이로 인해 망인은 정신적 고통을 입었다"고 주장했다.
재판부는 "피고가 일제의 한반도 침탈에 편승해 망인을 강제로 노동에 종사하게 했다는 점은 인정할 수 있다"며 "피고의 이러한 행위는 일본 정부의 한반도와 한국인에 대한 불법적인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의 수행과 직결된 반인도적인 불법행위에 해당하므로 피고는 망인이 받은 정신적 고통에 대해 배상할 의무가 있다"고 밝혔다.
다만 재판부는 소멸시효에 대해 "강제징용 관련 사건에서 대법원이 2012년 5월 24일 선고한 판결(2009다22549, 2009다68620)을 통해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관해 최종적인 해석을 내리기 전까지는 원고들에게 객관적으로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장애사유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며 "2012년 대법원 판결이 선고된 이후 해당 사건의 피고가 파기환송심 판결에 다시 상고해 2018년 10월 30일 재상고심 판결(2013다67587)이 선고됨으로써 비로소 환송심 판결이 확정됐지만, 환송판결의 기속력은 재상고심에도 미치는 것이 원칙인 점 등을 고려하면, 2018년 대법원 판결이 아닌 2012년 대법원 판결이 선고될 때까지 원고들에게 객관적으로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장애사유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원고들은 2012년 10월 대법원 판결이 선고된 날로부터 3년이 지난 2019년 4월 30일 이번 소를 제기했다"며 "장애사유가 해소된 날로부터 권리행사의 상당한 기간 내에 이 사건 소를 제기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대법원이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일본 기업의 배상 판결을 확정한 2018년 10월이 아니라, 배상 취지로 파기환송한 2012년 5월을 기준으로 소멸시효를 계산해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민법 제766조에 따르면, 손해배상청구권은 불법행위를 한 날로부터 10년이 경과하거나, 불법행위의 피해자나 그 법정대리인이 그 손해와 가해자를 안 날로부터 3년이 경과하면 시효로 소멸해 더 이상 손해배상청구권을 주장할 수 없게 된다.
최근 소멸시효 기산점에 관한 하급심의 판단은 엇갈리고 있다. 지난해 2월 같은 법원 민사68단독 박진수 부장판사는 강제동원 피해자 A 씨의 유족 5명이 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소송(2019가단5076593)에서 소멸시효 완성을 이유로 원고패소 판결했다.
하지만 광주고법 민사2부(당시 재판장 최인규 부장판사)는 2018년 12월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2018년 10월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강제동원 피해자 등의 손해배상청구권을 확정한 때부터 비로소 피해자들이 권리를 행사할 수 없었던 상황이 해소됐다"며 소멸시효 기산점을 2018년으로 판단, 원고들의 손을 들어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