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산운용사라면 화면에서 보는 것처럼 투자할 펀드의 투명성, 위험노출 정도, 준법 여부 등을 사전에 따져야 합니다. 그런데 피고들은 제대로 된 투자절차를 거치지 않았습니다."(원고대리인)
"아닙니다. 재판장님, 사전에 회의했던 자료와 투자제안서 등 증거를 제출했습니다."(피고대리인)
"스크린에 띄워 보시죠."(재판장)
지난달 30일 오전 10시, 서울 양천구에 위치한 서울남부지법 416호 법정에서는 종이기록이 사라진 첫 번째 민사재판이 열렸다.
원고대리인이 레이저포인터를 들고 법정에 걸린 스크린을 통해 헤지펀드의 위험성 등을 짚어가며 자산운용사 측의 잘못을 지적하자, 피고대리인은 자신들이 준비한 증거 등을 스크린에 띄워 원고측 주장을 반박했다.
이날은 지난 5월2일 민사사건에 전자소송이 도입된 뒤 처음으로 열린 전자소송 집중심리기일이었다. 법정엔 과거와 달리 쌓여있던 소송서류들이 모두 사라지고 대신 재판부와 원·피고석에는 컴퓨터와 모니터가 각각 설치됐다.
재판부가 입장하자 원·피고 대리인들은 지금까지 해왔던 '서류공방' 대신 법정에 걸린 스크린을 통해 '프리젠테이션 변론공방'을 시작했다.
전자소송 집중심리기일로 지정돼 진행된 이날 사건은 자산운용회사의 권유로 헤지펀드에 투자했다가 손해를 본 A연금공단이 "230억여원의 투자손실액을 배상하라"며 (주)H자산운용사와 (주)H투자신탁운용사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소송(2010가합17070) 등 2건이었다.
사건을 심리하고 있는 남부지법 민사11부(재판장 최승록 부장판사)는 변론기일이 시작되기 전 헤지펀드의 구조와 펀드판매 및 운용에 관한 계약관계가 복잡해 단순히 말이나 글로 설명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것으로 판단해 같은달 19일 이 사건에 대해 '전자소송전환명령'을 내렸다. '민사소송 등에서의 전자문서이용 등에 관한 규칙' 제19조1항에 따르면 재판부가 전자소송으로 진행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되는 사건에 대해서는 '전자소송전환명령'을 내릴 수 있다. 당사자들이 서면으로 제출한 서류는 법원에서 전자기록으로 변환된다.
이날 재판부는 법정에 들어선 뒤 법대 위에 설치된 노트북을 켜고 모니터로 소송기록을 확인했다. 법대와 원·피고석에 설치된 노트북 5대에서는 모두 소장과 증거기록 등 재판 관련 서류를 바로 열람할 수 있는 서버가 설치돼 있어 서로 변론을 하며 바로바로 기록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재판 중에 실시간으로 대리인들이 제출한 투자제안서와 계약서 자료, 과거 판례, 영상물 등 소송에 필요한 증거자료가 스크린에 띄워져 방청객도 사건내용을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이 같은 풍경은 서면으로만 재판을 진행했던 과거 민사재판의 풍경과 확연히 달랐다. 또 전자소송이 시작된 뒤 참여관과 실무관 등 법원 직원들의 업무도 확 바뀌었다. 소송가액이 큰 민사사건의 경우에는 소송기록이 방대해 이를 옮기고 출력하는 일이 만만치 않았다. 그동안은 법원 직원들이 수레에 서류를 담아 법정으로 옮기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하지만, 전자소송이 시작된 뒤 방에서 방으로 옮겨지던 서류더미가 사라졌다. 이날 법원 직원들도 법정에 설치된 컴퓨터 및 모니터를 통해 전자기록을 동시에 열람하며 재판진행을 도왔다.
같은 날 대구지법에서도 민사사건에 전자소송이 실시된 뒤 첫 변론기일이 열렸다. 이날 진행된 사건은 개인사업자가 낸 양수금 청구소송으로 당사자는 소송서류를 전자소송 홈페이지를 통해 제출했다. 앞으로도 150여건의 민사사건이 전국 법원에서 전자적 구술변론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한편, 지난 5월2일 민사사건에 전자소송이 실시된 뒤 27일까지 총 1,600여건의 전자소장이 제출된 것으로 집계됐다. 대법원 관계자는 "제도 시행초기에도 불구하고 전자소송 이용자가 점차 늘어나고 있다"며 "앞으로 민사사건에도 생동감있고 입체적인 구술변론이 가능해질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