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 피해자가 가해자와 '추후 민·형사상 이의제기를 하지 않겠다'고 합의하고 합의금을 받았다면, 합의금이 피해원금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차액을 청구할 수 없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피해자가 손해원금을 받기 위해서는 합의할 때 '합의가 형사에 국한하고 민사상 이의제기는 가능하다'는 점을 명백하게 밝혀둬야 한다는 취지의 판결이다.
김모(49)씨는 2004년 4월 상가를 분양받을 수 있다는 정모(47)씨의 말에 속아 5500만원을 빌려줬다. 하지만 김씨는 1800여만원밖에 돌려받지 못하자 정씨를 사기죄로 고소했다. 김씨는 정씨의 항소심 선고를 앞두고 정씨의 형으로부터 1300만원을 변제받고 합의서를 작성해줬다. 정씨는 2008년 6월 항소심에서 징역 4월을 선고받고 형이 확정됐다.
김씨는 정씨에게 빌려준 5500만원 중 1300만원은 합의금으로 받은 것이고, 이미 일부 변제받은 1800여만원은 이자라면서 정씨를 상대로 나머지 대여금 4200만원을 돌려달라는 소송을 냈다.
'추후 민·형사상 이의 제기 않겠다' 합의 후 돈 받았으면
합의금이 피해원금에 못 미쳐도 차액 청구는 할 수 없어
합의해도 원금은 받고 싶다면 형사합의만 별도로 해야
정씨는 "김씨가 형사 고소를 취소하면서 합의금 1300만원을 받기로 하고, 향후 민·형사상 어떤한 이의제기도 하지 않기로 합의했다"며 "김씨가 채권을 포기하거나 채무를 면제해 준 것이어서 김씨의 청구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
반면 김씨는 "정씨의 형이 1300만원을 주면서 합의서 작성을 요구해 불러주는 대로 합의서를 작성해 줬을 뿐 정씨에 대해 소송을 내지 않기로 하거나 채권 포기, 채무 면제를 한 것은 아니다"라고 맞섰다.
항소심은 "김씨가 고소를 취소하고 추후 민·형사상 어떠한 이의제기도 하지 않겠다는 합의서를 작성해 준 사실은 인정된다"면서도 "합의서에는 '채권에 대한 채무변제를 완료해 원만한 합의를 봤다'는 취지로 기재돼 있지만 실제로는 채무가 전부 변제되지 않아 김씨가 정씨 측이 요청한 문구대로 합의서를 작성해 준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또 "합의금 1300만원도 대여금 5500만원의 4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적은 금액이고, 정씨가 법정구속된 상태에서 항소심 선고를 앞두고 합의가 절실한 상황으로 형사상 합의가 주요한 목적"이라며 "합의서 문구에도 불구하고 김씨가 정씨에 대한 형사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취지의 형사상 합의에 불과하고, 민사적 책임까지 배제하는 취지의 합의로 볼 수 없다"고 판단해 3300여만원을 지급하라는 일부승소 판결을 했다.
하지만 대법원 민사3부(주심 김신 대법관)는 지난달 24일 김씨가 정씨를 상대로 낸 대여금소송 상고심(2013다97786)에서 원고일부승소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인천지법 합의부로 돌려보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합의서에 추후 민사상 청구의 가능성을 유보하는 내용의 문구가 없다"며 "김씨의 진정한 의사가 형사상 합의만을 위한 것이었을 뿐 민사상으로는 전액을 변제받고자 하는 것이었다면, 김씨가 이런 취지를 합의서에 기재해 두는 것도 가능했는데 다른 조건 없이 추후 민·형사상 어떠한 이의도 제기하지 않겠다고 명시적으로 합의서에 기재했다"고 밝혔다.
또 "김씨의 진정한 의사를 합의서 문구와 달리 해석할 만한 사유가 보이지 않고, 김씨와 정씨가 합의서를 통해 부제소 합의를 한 것을 봄이 상당하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