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건의 내용
원고는 피고 항공사의 항공편을 이용하여 대한민국을 출발, 파리를 중간기착지로 하여 밀라노에 도착하기로 하는 항공여객운송계약을 체결하였다. 원고의 여행목적은 이탈리아 가구업자로부터 수입한 장식장 가구들의 금장식 막대에 하자가 있어 그 보상 문제를 협의하기 위함이었는데, 원고는 위 금장식 막대를 수화물로 부치려다가 피고 항공사 직원으로부터 귀중품이라는 이유로 거절당하자 이를 휴대하고 탑승하려 하였다. 그러나 막상 검색대에서는 기내반입제한 물품이라는 이유로 탑승이 저지되어 부득이 파리행 비행기편의 피고 항공사 승무원에게 맡기고 탑승하였다. 그 후 중간 기착지인 파리공항에서 원고는 착오로 최종 목적지에서 수령하면 되는 것으로 여겨 수령을 하지 않았고, 물건을 맡은 피고 항공사 직원 또한 파리공항에서 이를 수령하여 가라는 통보를 하지 않았다. 원고는 피고 항공사를 상대로 분실신고를 하였으나, 피고 항공사는 결국 이 사건 물건의 소재를 찾지 못하였다.
원고가 화주에게 손실을 보상한 후, 피고 항공사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하자 피고는 국제항공운송에 있어서의 일부규칙의 통일에 관한 협약(이하 ‘헤이그 의정서’)에 기한 책임제한 항변을 하였다. 이에 대하여 원고는 책임제한이 배제된다고 주장하였다.
2. 대법원의 판결
헤이그의정서 제25조 전단에서는 ‘책임제한규정은 운송인, 그의 사용인 또는 대리인이 손해를 가할 의사로써 또는 손해가 생길 개연성이 있음을 인식하면서도 무모하게 한 작위 또는 부작위로부터 손해가 발생하였다고 증명된 경우에는 적용되지 아니한다’ 라고 규정하고 있다.
‘손해가 생길 개연성이 있음을 인식하면서도 무모하게 한 작위 또는 부작위’라 함은 자신의 행동이 손해를 발생시킬 개연성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결과를 무모하게 무시하면서 하는 의도적인 행위를 말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입증책임은 책임제한조항의 적용배제를 구하는 자에게 있고 그에 대한 증명은 정황증거로써도 가능하지만, 손해발생의 개연성에 대한 인식이 없는 한 아무리 과실이 무겁더라도 무모한 행위로 평가될 수는 없다(대판 2004. 7. 22. 2001다58269).
원심이 ‘손해를 가할 의사로써 또는 손해가 생길 개연성이 있음을 인식하면서도 무모하게 한 작위 또는 부작위’가 있었다고 보기에 부족하고 달리 이를 인정할 만한 증거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책임제한 조항의 적용이 배제된다는 원고의 주장을 배척한 것은 정 당하다.
3. 평석
가. 책임제한 배제사유의 해석
헤이그의정서 제25조의 책임배제사유인 ‘손해가 생길 개연성이 있음을 인식하면서도 무모하게 한 작위나 부작위(recklessly and with knowledge that damage would probably result)’는 영미법에서 발전된 개념이고, 대륙법에서 나온 이론이 아니기 때문에 대륙법계 국가에서는 구체적인 해석에 있어 중과실과 같이 보는 등 해석상 논란이 되어 왔다.
항공운송인의 책임제한 배제사유의 연혁에 관하여 보면, 1929년 바르샤바 항공협약에서는 책임제한배제사유를 고의적 위법행위(willful misconduct)라고 정하고 이에 관한 해석원칙을 제소법원의 법에 따른다고 규정하였는데, 이에 관한 해석이 여러가지로 나뉘어 국제항공운송의 법적 안정성을 해하였다.
1955년 헤이그의정서에서는 바르샤바항공협약을 개정하여 ‘고의로서’(with intent to)와 ‘무모하게 그리고 결과를 인식하면서’를 책임제한사유로 채택하였다. 대륙법계 국가에서는 위 개념과 친하지 않으므로 대륙법이론 내에서 해석하여 중대한 과실로 보았다.
그러나 손해가 생길 개연성이 있음을 인식하면서도 무모하게 한 작위나 부작위는 손해발생의 위험을 현실적으로 인식할 것을 요소로 하므로 ‘과실’과는 구별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중과실은 행위자가 약간의 주의를 함으로써 결과발생을 충분히 예견할 수 있는 경우를 이르는바, 부주의로 결과발생을 예견하지 못한 점은 단순한 과실과 마찬가지이므로 위 책임제한배제사유를 중과실과 같이 받아들이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본다.
그러므로 위 책임제한배제사유는 손해의 발생을 의도하였을 것은 요구하지 않는 점에서 고의와 다르고, 결과발생의 가능성을 현실적으로 인식하였을 것은 요한다는 점에서 과실과도 다르다고 할 수 있는데, 손해발생의 위험을 인식하면서도 대책을 취하지 아니한 데서 결과발생을 용인하는 내심의 존재를 인정할 수 있으므로 고의에 가까운 개념(그리하여 준고의라고 칭하자는 의견도 있다)이라고 본다.
나. 대법원 판결에 대한 평가
분실된 물건을 맡게 된 승무원으로서는 원고가 최종 목적지에 수화물로 부치려던 상황을 알지 못하였으므로 원고가 최종 목적지 공항에서 찾으면 되는 것으로 착오하여 파리공항에서 물건의 인도를 요구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미리 인식하기 어려웠다고 보인다. 따라서 손해발생의 위험을 인식하면서도 승객에게 수령을 최고하지 아니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책임을 제한한 대법원의 판결은 타당하다.
그런데 원고는 밀라노 공항에 도착한 직후 화물의 소재에 관하여 피고 항공사에 곧바로 문의하였음에도 물건을 찾지 못하였다. 원고가 출국장에서 승무원에게 물건을 맡겼으므로 위 승무원은 화물고가 아닌 기내 다른 곳에 이를 보관하였을 것인데, 위 승무원은 원고가 물건을 수령하여 가지 않았음을 인식하였다면 분실한 화물을 처리하는 수화물처리센터에 맡겼어야 하고(항공사가 수화물위탁을 거절한 귀중품이므로 분실되었을 경우 승객이 소재를 찾으려는 노력을 할 것이라는 점은 충분히 인식가능하다), 만약 수화물처리센터에 맡겨지지 않았다면 원래 보관된 장소에 있어야 할 것이나 없어졌으므로 누군가가 무단으로 가져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항공운항의 특성상 항공기에는 항공사의 피용인이나 조업사 외에는 접근이 가능하지 않다고 알려져 있다.
원고는 피고 항공사가 파리 공항에서 수령을 고지하지 아니한 점에 근거하여서만 책임을 추궁하였다. 그런데 해당 항공편의 승무원이 승객이 수령하지 아니한 화물을 수화물처리센터에 맡기지 아니하고 방치한 점이나 항공사의 피용인이나 조업사 직원이 절취하였다는 점에 근거하여 책임을 추궁하였더라면 어떠한 판결이 나왔을지 궁금하다.
한편 프랑스, 독일의 판례에서는 항공운송인의 사용인에 의한 절취의 가능성이 높은 경우에는 책임제한을 배제한 것이 많다. 수하인으로서는 화물이 언제, 어디서, 왜 없어졌는지를 구체적으로 입증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에 정황에 비추어 절취추정이 가능하다는 정도로 입증할 수 밖에 없고, 그러한 경우에는 책임제한을 배제하는 것인데 수하인이 할 수 있는 입증노력의 한계상 바람직한 판시태도이다.
항공운송인의 책임제한에 관한 우리나라의 판례를 살펴보면, (1)수하인에게 확인하지 아니한 채 위조된 수입화물인도승낙서를 제출받고 화물을 인도한 사례에서 피고 항공사의 업무담당자들에게 손해발생의 개연성에 대한 인식이 있었다고 볼 수는 없다(대판 2004. 7.22. 2001다58269), (2) 운항 중 항공기 ADI(항공기 위치, 진행방향, 속도, 고도에 관한 정보 제공장치)에 하자가 발견되어 중간 기착지에서 정비를 하였는데 중간 기착지에서 이륙 후 곧바로 항공기가 폭발한 사례에서, 기장 등이 손해를 발생시킬 개연성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면서도 그 결과를 무모하게 무시하면서 한 행위에 의하여 사고가 발생한 것으로 볼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 있다(대판 2005.9.29. 2005다26598).
하급심 판례로는 운송할 나무상자에 비하여 용량이 작은 지게차를 사용하여 지게차 운전자의 시야를 화물이 완전히 가리는 상태에서 신호수의 구두신호에 따라 작업하다가 화물이 파손된 사고에서 항공운송인의 책임제한을 인정하지 않았다(서울지판 1998. 4.21. 96나45817).
절취가 상당한 정도로 추정되는 사례에 관한 판례를 찾아볼 수 없는 등 항공운송인의 책임제한에 관한 판례가 빈약한 편인데 향후 풍부한 판례의 축적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