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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법원 2023. 4. 27. 선고 2017다227264 판결(판례공보 2023년, 885면) -
표의자의 중과실 있는 착오와 상대방의 악의 등
[사실관계 및 사건의 경과] 평석에 필요한 한도에서 요약하기로 한다. 1. 원고 증권회사(이 사건 소 제기 후에 파산하여 파산관재인이 소송을 수계하였으나, 편의상 이렇게 부르기로 한다)는 싱가포르 법인인 피고 회사 등과의 사이에 인터넷을 통하여 파생상품거래를 하였다. 원고는 이를 위하여 다른 소프트웨어 제작회사로부터 시스템거래의 소프트웨어를 구입한 다음, 그 회사의 직원으로 하여금 이자율 등 변수를 입력하고 그 입력된 조건에 따라 호가(呼價)가 자동적으로 생성 및 제출되도록 하였다. 2. 2013년 12월 어느 날 파생상품시장 개장 전에 위 직원이 입력할 변수 중 이자율 계산을 위한 설정값을 잘못 입력하였고, 원고는 그로써 생성된 호가를 그대로 제출하였다. 그에 따라서 피고와의 사이에 코스피 200옵션에 대하여 매우 많은 수의 주가지수옵션매수거래가 성립되었고, 그 대금 584억원이 종국적으로 피고에게 지급되었다. 3. 원고는 착오를 이유로 위 매매를 취소하는 의사표시를 하고 그 대금 중 우선 100억원의 반환을 청구하였다. 제1심법원(서울남부지법 2015. 8. 21. 선고 2014가합3413 판결)은 원고의 중과실로 인한 착오라는 것 등을 이유로 하여 그 청구를 기각하였다. 원심법원(서울고등법원 2017. 4. 7. 선고 2015나2055371 판결)도 원고의 청구를 기각하였다. 우선 원고의 이 사건 의사표시가 그의 중대한 과실로 인한 것으로서 원칙적으로 이를 취소할 수 없다고 하고, 나아가 여러 가지 사정을 들어 피고가 “피고가 상대방의 착오를 이용하여 부정한 이익을 취득할 수 있도록 설계된 알고리즘 거래 프로그램을 사용하거나, 착오로 인한 호가 제출 사실을 아는 피고 직원이 개입하여 원고의 착오를 유발하거나 그의 중과실을 이용하여 이 사건 매매가 체결되었음을 인정하기에 부족하다”고 판단하였다. 대법원은 다음과 같이 판단하여 상고를 기각하였다(이하 ‘대상판결’이라고 한다). [판결 취지] “민법 제109조 제1항은 법률행위 내용의 중요 부분에 착오가 있는 때에는 그 의사표시를 취소할 수 있다고 규정하면서, 같은 항 단서에서 그 착오가 표의자의 중대한 과실로 인한 때에는 취소하지 못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여기서 ‘중대한 과실’이란 표의자의 직업, 행위의 종류, 목적 등에 비추어 보통 요구되는 주의를 현저히 결여한 것을 의미한다[참조 재판례들 인용]. 한편 위 단서 규정은 표의자의 상대방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므로, 상대방이 표의자의 착오를 알고 이를 이용한 경우에는 그 착오가 표의자의 중대한 과실로 인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표의자는 그 의사표시를 취소할 수 있다(대법원 1955. 11. 10. 선고 4288민상321 판결, 대법원 2014. 11. 27. 선고 2013다49794 판결 등 참조). 다만 한국거래소가 설치한 파생상품시장에서 이루어지는 파생상품거래와 관련하여 상대방 투자중개업자나 그 위탁자가 표의자의 착오를 알고 이용했는지 여부를 판단할 때에는 파생상품시장에서 가격이 결정되고 계약이 체결되는 방식, 당시의 시장상황이나 거래관행, 거래량, 관련 당사자 사이의 구체적인 거래형태와 호가 제출의 선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야 하고, 단순히 표의자가 제출한 호가가 당시 시장가격에 비추어 이례적이라는 사정만으로 표의자의 착오를 알고 이용하였다고 단정할 수 없다.” [평 석] 1. 착오에 관한 민법의 규정 (1) 어떠한 경우에 의사표시의 착오를 이유로 계약 기타 법률행위(이하에서는 그 중 계약만을 다루기로 한다)의 효력을 다툴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법의 역사에서 일찍부터 제기되었으면서도 여전히 새롭다. 우리 민법이 정면으로 정하는 바는 네 가지다. 첫째, 착오가 ‘계약 내용의 중요 부분’에 있는 경우에만 그 효력이 다투어질 수 있다(제109조 제1항 본문). 여기에는, 세상사가 무릇 그러하듯이, 어떠한 잘못 또는 실수는 이를 범한 이가 그 귀결을 감당해야 한다는 원칙이 배경에 있다고 하겠다. 이와 관련하여서 민법은 예외적으로 효력을 다툴 수 있게 하는 ‘본질적 착오’의 유형을 열거하는 스위스채무법 제24조와 같은 태도는 취하지 않는다. 둘째, 그 경우에도 표의자에게 ‘중대한 과실’이 있으면 착오를 들어 계약의 효력을 부인할 수 없다(동항 단서). 셋째, 이상과 같은 요건이 충족되더라도 표의자는 착오를 이유로 계약을 취소할 것인지 여부에 대하여 선택권을 가질 뿐이고, 애초부터 무효인 것은 아니다. 즉 계약은 표의자에게 취소권을 부여한다. 넷째, 표의자가 그 취소권을 행사하여 계약을 무효로 돌리더라도, 그 효력은 선의의 제3자에게는 미치지 않는 것으로 제한된다(동조 제2항). (2) 이러한 입법적 태도는 예를 들어 독일민법에서의 착오에 관한 입법과정(이에 대하여는 양창수, “독일민법전 제정과정에서의 법률행위 규정에 대한 논의 ― 의사흠결에 관한 규정을 중심으로”, 동 민법연구 제5권(1999), 49면 이하 참조)에 비교하여 보더라도, 적어도 어느 시기까지 크게 탓할 만한 것은 아니라고 하겠다. 독일민법의 착오 규정이 우리 민법의 그것과 크게 다른 점은 거기서는 착오자의 중과실을 착오 취소의 소극요건으로 하지 않고 여전히 취소권을 착오자에게 부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독일에서는 주지하는 대로 착오 취소자에게 신뢰이익의 배상책임을 부과한다(제122조). 이 책임은 착오자에게는 그의 유책사유를 요구하지 않고 인정되는데, 다만 상대방이 “취소의 원인을 알았거나 또는 과실로 인하여 알지 못한 경우”에는 이를 배제한다(동조 제2항). 그만큼 상대방의 악의 또는 과실은 착오법리의 범위 안에서 고려되고 있는 것이다. 상대방의 ‘행태’는 입법적 차원에서 이미 그 한도에서 일정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나아가 참조를 삼을 만한 것이 스위스법의 태도이다. 스위스채무법 제26조 역시 착오 취소자에게 “계약의 효력불발생으로 인하여 발생한 손해”의 배상책임을 긍정한다. 그런데 그 요건에서는 독일민법과 달리 착오자의 과실을 요구한다. 그리고 상대방이 착오자를 알았거나 알았어야 하는 경우에는 그 책임을 배제한다.(이상 동조 제1항) 한편 여기서는 예외적으로 “형평에 부합하는 경우에는 법관은 그 외의 손해의 배상을 인정할 수 있다.”(동조 제2항) 결국 이들 나라에서는 착오 취소자는 물론이고 나아가 상대방의 사정을 다양하게 고려하여 착오법리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2. 상대방의 착오 ‘유발’의 문제 (1) 그렇지만 민법 소정의 여러 제도가 흔히 그러하듯 실제의 사건 맥락은 입법자가 예상하지 아니한 문제를 제기한다. 그 중요한 하나가 상대방의 ‘행태’를 고려할 것인가 또는 어떻게 고려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예를 들어 표의자의 착오가 상대방에 의하여 ‘유발’ 내지 ‘야기’된 경우에도 위에서 본 요건이 갖추어져야만 표의자는 취소할 수 있는가? 그가 표의자를 착오로 빠뜨릴 의도를 가지고 그렇게 하였다면, 물론 이는 ‘사기’(민법 제110조)의 문제가 될 것이다(여기서는 ‘계약 내용의 중요부분’이나 표의자의 중과실 등은 논의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상대방이 그러한 의도가 없이 그렇게 하였다면 어떠한가? 예를 들어 상대방이 사실이라고 잘못 알면서 표의자에게 사실 아닌 정보를 전달함으로써 표의자가 이를 믿고 의사표시를 하게 되었다면?(이는 이른바 공통착오 중에서 표의자의 착오가 상대방에 의하여 야기된 유형에 해당한다). 또 나아가 표의자의 착오가 상대방에 의하여 야기되었다고까지는 말할 수 없지만, 그것을 상대방이 적극적으로 ‘강화’(이에도 여러 가지 정도가 있을 것이다)한 경우는 어떠한가? (2) 대법원이 민사사건에서 이와 같이 상대방에 의한 착오 ‘유발’의 사안을 다룬 것은 대판 1978.7.11., 78다719(집 26-2, 209)이 처음이라고 생각된다(그 전에 귀속재산매각처분의 효력이 다투어진 행정사건에서 같은 취지로 판단하여 원심판결을 파기한 대판 1970.2.24., 69누83(집 18-1, 행 36)이 있다). 이 판결은 귀속해제된 토지임에도 귀속재산인 줄 잘못 알고 피고(대한민국)에게 증여한 사안에서, “이러한 착오는 일종의 동기의 착오라고 할 것이나, 그 동기를 제공한 것이 피고 산하 관계 공무원이었고, 그러한 동기의 제공이 없었더라면 몇 십 년 경작해 온 상당한 가치의 본건 토지를 선뜻 피고에게 증여하지는 않았을 것인즉 그 동기는 본건 증여행위의 중요한 부분을 이룬다고 할 것”이라고 판시하면서 원고의 소유권이전등기말소청구를 인용하였다(상고기각). 여기서는 동기착오이면서도 ‘계약 내용의 중요 부분’에 해당한다는 판단틀이 채택되고 있음이 주의를 끈다. 그 후에도 대판 1987. 7. 21., 85다카2339(집 35-2, 284)(이에 대한 평석으로서 양창수, “주채무자의 신용에 관한 보증인의 착오”, 동, 민법연구, 제2권(1991), 1면 이하가 있다. “채권자에 의한 착오의 유발과 보증인의 취소권”이라는 제목의 그 제3장이 종전에 별로 의식되지 아니하던 상대방에 의한 착오 ‘유발’의 유형을 새로운 문제관점에서 제시하였다); 대판 1991. 3. 27., 90다카27440(공보 1276); 대판 1992. 2. 25., 91다38419(공보 1141); 대판 1993. 8. 13., 93다5871(공보 2419); 대판 1994. 9. 30., 94다11217(공보 하, 2841); 대판 1995. 11. 21., 95다5516(공보 1996상, 47), 대판 1996. 3. 26., 93다55487(공보 상, 1363); 대판 1997. 8. 26., 97다6063(집 45-3, 112); 대판 1997. 9. 30, 97다26210(공보 3286) 등 1990년대만 하더라도 많은 판결이 이어지고 있다. 이들 재판례가 일반적으로 착오 취소를 긍정하고 있다는 점도 매우 흥미롭다. 그리고 그 이유로, 문제의 착오가 동기착오인 경우에라도 ―동기착오에 관하여 일반적으로 요구되는 그 ‘표시’의 여부 등은 논의하지 아니하고― 그 착오가 상대방에 의하여 야기되었다는 사정을 들고서 바로 또는 다른 사정을 함께 그것은 ‘계약 내용의 중요 부분’에 해당한다고 판단하고 따라서 표의자는 계약을 적법하게 취소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고 있다. 그 과정에서 표의자의 중과실 유무 등은 아예 논의되지 않는 경우도 흔하지만, 한편 앞의 대판 97다6063사건에서와 같이 “표의자로서는 그와 같은 착오가 없었더라면 그 의사표시를 하지 아니하였으리라고 생각될 정도로 중요한 것이고, 보통 일반인도 표의자의 처지에 섰더라면 그러한 의사표시를 하지 아니하였으리라고 생각될 정도로 중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는 ‘중요 부분’의 의미에 관한 판례 준칙을 그 중간항(中間項)으로 드는 예도 물론 있기는 하다. (3) 이러한 상대방에 의한 착오 ‘유발’의 사안유형에 대한 판례의 태도에 대하여 학설은 대체로 지지한다. 그것은 “착오 취소의 요건은 표의자와 상대방 사이의 이해관계를 조절하기 위한 기준인데, 표의자의 동기착오를 유발한 상대방의 보호가치가 부정된다는 점에서 판례의 태도는 충분히 수긍될 수 있다”고 하거나(지원림, 민법강의, 제20판(2023), 77면), 상대방에 의한 그 유발의 경우에 “그 착오의 위험을 생성 또는 실현케 한 상대방에게 부담하도록 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문이 들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김상중, “동기의 착오에 관한 판례법리의 재구성을 위한 시론적 모색”, 사법(私法)질서의 변동과 현대화(김형배 교수 고희 기념)(2004), 15면). 한편 드물기는 하지만, “상대방의 행태를 기초로 취소의 위험을 부담시킬 수 있는 경우에는 민법 제109조가 아니라 민법 제110조에 의해 규율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정성헌, “착오에 대한 민법상 규율의 재구성 ― 대법원 2014. 11. 27. 선고 2013다49794판결을 계기로”, 민사법학 제73호(2015), 265면 이하). 3. 상대방이 악의인 경우 ― 착오의 ‘이용’ (1) 일본의 경우를 보면, 이 맥락에서 상대방의 ‘악의’, 즉 표의자가 착오에 빠졌음을 안다는 사정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관점과 관련하여 다루어진다. 무엇보다도 「민법(채권법)개정검토위원회」가 2009년에 발간한 『채권법 개정의 기본방침』(별책 NBL 126호)은 (i) 상대방이 표의자의 착오를 알고 있는 때, (ii) 상대방이 그 착오를 알지 못함에 대하여 중과실 있는 때, (iii) 상대방이 그 착오를 일으킨 때, (iv) 상대방도 표의자와 동일한 착오를 하고 있는 때에는, 표의자에게 중과실이 있더라도 의사표시를 취소할 수 있다는 것이다(동 방침, 28면 이하. 당시 고려되는 착오의 법률효과는 무효로 정해져 있었다). 이는 대체로 2017년 일본민법 개정에 반영되어(시행은 2020년 4월), ‘상대방이 표의자에게 착오 있음을 알거나 중대한 과실로 알지 못한 때’(제95조 제3항 제1호) 또는 ‘상대방이 표의자와 동일한 착오에 빠져 있는 때’(동항 제2호)에는 표의자에 중과실 있는 경우라도 의사표시를 취소할 수 있다고 정하였다(앞 (iii)의 착오 유발에는 언급이 없다). 위 개정 후의 일본민법 제95조는 제1항에서, 우선 행위착오 외에도 동기착오 중에서는 ‘표의자가 법률행위의 기초로 한 사정에 관하여 그 인식이 진실에 반하는’ 것(앞의 1.에서 든 스위스채무법 제24조 제1항의 제4호에서 정하는 “표의자에 의하여 신의성실에 비추어 계약의 불가결한 기초라고 여겨진 사정”에 관한 착오, 즉 기초착오(Grundlagenirrtum)를 연상시킨다. 이 점은 독일민법에서 2017년 대개정 후에 동기착오 중에서 “거래상 본질적이라고 여겨지는 사람이나 물건의 성상(性狀)에 관한 착오”를 내용착오로 보는 제119조 제2항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을 고려되는 착오로 정한 다음, 나아가 ‘그 착오가 법률행위의 목적 및 거래상의 사회통념에 비추어 중요한 것인 때’에만 취소할 수 있다고 정한다. 그리고 제3항은 개정 전과 마찬가지로 표의자의 중과실의 경우에는 착오 취소가 배제된다고 하면서도, 동항의 위 두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취소할 수 있음을 정하는 것이다. (2) 대판 2014. 11. 27., 2013다49794(공보 2015상, 9)은 대상판결의 취지와 같이 판시하였다(이 판결은 ‘참조’로서 60년쯤 전의 대판 1955.11.10. 4288민상321을 인용한다. 그 제1심도, 항소심도 버젓이 인용하고 있는 이 판결에 접근할 방도를 알지 못한다. 이러한 재판례의 ‘공개’ 내지 ‘접근가능성’이라는 ―민법 연구자인 나로서는 꽤나 심각한― 문제에 대하여는 양창수, “『법고을』 유감”, 동, 민법산책(2006), 274면 이하 참조 : “그것들이 재판 실무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나아가 변호사의 직무에 도움이 안 될 리 없고, 또 법학교수가 법을 연구하는 데 자료가 되지 않을 리 없다”). 위 판결은 대상판결의 사안과 유사하게, 원고 증권회사의 직원이 파생상품(미화달러 선물(先物)스프레드 1만 5000개) 계약의 매수주문을 개장 전에 입력하면서 0.80원이라고 할 것을 그 100배인 80원이라고 찍음으로써 결국 피고 증권회사와의 사이에 그 내용으로 매매계약이 체결된 사안에 대한 것이다. 원심판결은 그 계약의 착오 취소를 인정하고 원고의 매매대금반환청구를 인용하였는데, 대법원은 피고의 상고를 기각하였다. 그 이유로 우선 자본시장법상의 금융투자상품시장에서 일어나는 증권이나 파생상품의 거래에도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민법 제109조가 적용됨을 선언한 데에도 적지 않은 의미가 있다. 그리고 나아가 착오 취소에 관하여는 대상판결과 같은 법리를 설시한 다음, 구체적으로는 원고 측의 착오에 중대한 과실이 있지만 “피고가 주문자의 착오로 인한 것임을 충분히 알고 있었고, 이를 이용하여 다른 매도자들보다 먼저 매매계약을 체결하여 시가와의 차액을 얻을 목적으로 단시간 내에 여러 차례 매도주문을 냄으로써 이 사건 거래를 성립시켰으므로” 원고의 중대한 과실에도 불구하고 취소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3) 대상판결은 표의자의 중과실에도 불구하고 의사표시의 취소를 긍정하는 추상적인 법리를 그대로 반복한다. 굳이 저 60년 전의 대법원판결과 합하지 않더라도 이제 최근 두 개의 대법원판결만으로 그 법리는 이제 우리 민법의 일부가 되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 법리는 착오 취소의 제한 요소로서의 표의자의 중과실을 ―법률 밖에서(praeter legem), 즉 법규정에 마련되어 있지 아니한 기준을 도입함으로써― 다시 제한하여 착오 취소의 범위를 확장하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 글은 이 점을 제시하여 의식하게 하려는 의도로 쓰였다. 그런데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몇 가지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 위의 두 선례는 단지 상대방의 악의에서 더 나아가 그가 표의자의 착오를 ‘이용하는 것’을 요구한다. 이는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가? 단지 의례적인 장식 문구인가, 아니면 실제로 입증되어야 하는 취소 허용의 요건인가? “이러한 사정을 고려하면 피고가 원고의 착오를 이용하여 이 사건 매매거래를 체결하였다고 보기 어렵다”는 대상판결의 판단이 착오 취소를 부인하는 종국적인 이유인데, 그 ‘이용’ 여부를 단지 의례적인 장식 문구라고 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제3자의 채권침해가 논의되는 사안유형 중 문제의 행위로 채무자의 책임재산이 감소된 경우에 대하여 대판 2007. 9. 6., 2005다25021(공보 1526) ; 대판 2019. 5. 10., 2017다239311(공보 1207) 등이 그 위법성 요건에 관하여 설시하는 대로 제3자가 ‘채무자에 대한 채권자의 존재 및 그 채권의 침해사실을 아는 것’ 외에도 ‘채무자와 적극 공모하거나 채권 행사를 방해할 의도로 사회상규에 반하는 부정한 수단을 사용하는 등’을 요구하는 것과 같은 레벨에서 다루어져야 하는 것인가? 나아가 위의 두 판결은 모두 인터넷금융거래에서 증권회사의 ‘피용자’가 입력을 잘못하여 그 가격이 비정상적으로 정하여진 사안임에도 그 결론을 달리하여, 2014년 판결은 표의자의 착오 취소를 허용하여 원고의 청구를 인용하였고, 대상판결은 이를 부인하였다. 그 차이의 이유를 위 사건의 어떠한 사실관계로부터 찾을 수 있을까? 이것도 매우 흥미로운 부분이나 지면관계상 여기서는 상론하지 아니하기로 한다. 다만 하나만 지적하자면, 대상판결의 사안에서는 피고도 이 사건 매매거래 전부터 미리 정하여진 일정한 시스템거래 방식으로 기계적 호가를 계속하여 왔다는 것을 들 수 있을지 모른다. 양창수 명예교수(서울대 로스쿨)
중대한과실
착오
파생삼품
양창수 명예교수(서울대 로스쿨)
2023-08-20
형사일반
- 대법원 2021. 9. 9. 선고 2020도12630 전원합의체 판결 -
공동 거주자 1인의 승낙을 얻어 주거에 들어간 행위가 다른 공동 거주자의 의사에 반하는 경우 주거침입죄의 성립 여부
Ⅰ. 들어가며 불륜(혼외 성관계)의 목적으로 일방 배우자의 승낙을 받아 그 집에 들어간 경우 주거침입죄 성립 여부에 대해 최근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은 종래 대법원 견해를 변경, 주거침입죄 성립을 부정하였다. 다수의견은 전체 판결문 90여 페이지 중 단 3페이지에 불과한 다소 기이한 판결이다. 그 결론은 도저히 수긍할 수 없으며, 오히려 문제되는 구체적 사례들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혼란스러운 상황에 직면하게 만들었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상세한 논증은 '공판알리미' 9월호(대구지검)에 실린 '공동 거주자 1인의 승낙을 얻어 주거에 들어간 행위가 다른 공동 거주자의 의사에 반하는 경우 주거침입죄의 성부' 글을 참고하길 바란다. Ⅱ. 대법원 판결의 요지 피해자의 처(妻) A와 내연관계에 있는 남성 피고인이 불륜 목적으로 피해자의 집에 (A가 문을 열어 주어) 3회에 걸쳐 들어간 사안에서 다수의견은 ① 주거침입죄의 보호법익은 '사실상의 평온', ② '침입'은 '사실상의 평온을 해치는 행위 태양'으로 들어가는 것이고, ③ 공동 거주자는 상호간 법익이 일정 부분 제약될 수밖에 없음을 용인한 것이므로, 공동 거주자의 승낙을 받아 '통상적인 출입 방법'에 따라 들어갔다면 다른 거주자의 추정적 의사에 반한다는 사정만으로는 사실상의 평온을 깨뜨린 것으로 볼 수는 없어 주거침입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보았다(김재형 대법관의 별개의견은 보호법익을 주거권으로 보고, 침입은 주거권자의 의사에 반하여 들어가는 것으로 보면서도 일방 공동 거주자의 승낙을 다른 공동 거주자가 용인하여야 한다는 점을 근거로, 안철상 대법관은 외부인의 출입을 반대하는 공동 거주자가 그 주거 내에 있는지 여부와 무관하게 다른 공동 거주자의 승낙을 용인하여야 한다는 취지에서 같은 결론이다). 반면, 이기택·이동원 대법관의 반대의견은 종래 대법원 판례가 유지되어야 한다는 입장에서, 공동거주자 중 한 사람의 승낙이 있더라도 다른 거주자의 의사에 명백히 반하는 경우 그 거주자의 사실상 주거의 평온을 해치는 결과가 되어 주거침입죄가 성립한다고 판단하였다. Ⅲ. 평석 1. 일방 배우자의 불륜을 위한 외부인의 출입은 다른 일방 배우자의 추정적 의사가 아닌, 명시적·묵시적 의사에 반하는 것이다. 다수의견은 거주자의 명시적·묵시적 의사에 반하는 경우에만 주거침입을 인정할 수 있다는 의미로 보인다. 명시적으로 거부 의사를 표시하여야 한다는 취지로 해석된다. 그러나, 일방 배우자의 불륜을 대비하여, 예컨대, 미리 '관계자 외(外) 출입금지'처럼 표시를 하거나, 배우자에게 (불륜을 예상하고) 사전에 '불륜 상대를 집에 들이지 말라'고 명시토록 요구하는 것 자체가 '넌센스'라 하겠다. 2. 불륜을 위해 주거에 들어가는 행위 자체로 다른 일방 배우자의 '주거의 사실상의 평온'은 깨어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불륜을 위해 외부인이 들어와 거실, 주방, 욕실은 물론 내밀한 공간인 침실에 이르기까지 누빈(?) 사실을 알았다면 통상적인 출입 방법이라 하여 그 주거의 평온이 유지된 것인지 의문이다. 사실상의 평온은 현실적 평온뿐만 아니라 잠재적 평온(기대되는 사실상의 평온, 안철상 대법관 표현으로는 심리적 평온)도 포함된다고 보아야 한다. 그래야만 거주자 현존 여부 불문 그의 평온은 침해될 수 있고, 따라서 빈 집에 '평온하게' 들어가는 것도 주거침입이 됨을 설명할 수 있다. 3. '침입'의 의미는 거주자의 의사와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다. 다수의견은 거주자의 의사에는 반하지만 평온하게 들어간 경우 주거침입죄 성립을 부정하게 되는데, ① 평소 자유롭게 드나들던 사람이라도 집주인은 언제든 그 출입을 허락하지 않을 자유가 있고, ② 외부인이 (특히 사회통념상 허용되는 범위를 넘어) 자신의 의사에 반해 들어오는 것까지 수인해야 할 이유가 없으며, ③ 빈 집에 통상적인 방법으로 평온하게 들어가는 경우에도 주거침입죄가 성립한다는 점에서 '침입'은 거주자의 의사에 반하여 들어가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또한, '사실상의 평온을 침해하는 태양'으로 침입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일반인은 물론, 법조인들도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 개념은 지나치게 불명확하다. '침입' 여부는 거주자의 의사에 따라야 하고, 그것이 사회통념상 사실상의 평온을 깨뜨렸는지 여부는 법률적·규범적 판단이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공동 거주자의 일상생활의 경험칙상 사회상규의 범위 내라면 다른 공동 거주자의 의사에 반하더라도 주거침입을 인정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예컨대, 부부 일방이 정말로 싫어하는 사람을 집에 초대하는 것이나, 처(妻)가 부부간 불화 중 시댁 식구들의 출입을 반대하는 상황에서 시댁 식구들이 남편 허락을 받아 집에 들어가는 것 등은 사실상의 평온을 깨뜨린 것으로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4. 범죄 목적 또는 그에 준하는 가벌성 있는 행위에 대한 처벌 공백이 생긴다. 목적이 불순하면 대체로 거주자의 의사에 반한다고 보는 것이 상식적인 해석이며, 그 의사에 반한 침입은 대체로 주거의 사실상의 평온을 해친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특히 범죄의 목적으로 타인의 주거 등에 들어가면 주거침입죄가 성립한다(종래 통설과 판례, 일본 판례). 다수의견에 따르면, 범죄 목적 침입 시 목적된 범죄를 실행하지 못한 경우 주거침입으로도 처벌할 수 없게 되어 처벌의 공백이 발생한다. 범죄는 아니라도 공동 거주자의 명백한 의사에 반하여 들어가 사실상 평온을 깨뜨릴 수 있는 경우도 가벌성이 있다(일본 판례도 주거침입죄 성립을 인정). 예컨대, ① 불륜의 증거를 잡으려고 타인의 주거에 들어간 경우(판례상 인정되었음). ② 룸메이트를 왕따시키려고 다른 일방 룸메이트의 동의를 얻어 집안에 들어가 몰카를 설치한 경우, ② 학생이 교사의 승낙을 얻어 교무실에 들어와 시험문제 답을 모두 암기하여 돌아가 암기한 내용으로 시험을 치른 경우 등도 가벌성이 없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5. 주거침입죄 처벌 범위가 지나치게 확장된다고 볼 수 없다. 범죄 목적 또는 거주자의 의사에 명백히 반하는 경우를 침입의 기준으로 삼더라도 이에 대한 입증책임이 검사에게 있고, 그것이 규범적으로 사회통념상 (건전한 상식을 가진 일반 국민의 기준에서) 사실상 평온을 침해하였는지 여부를 판단하기 때문이다. 통계상 2019년 한해 전체 범죄 발생 건수는 176만7684건임에 반해 주거침입 범죄 발생 건수는 1만7181건(0.97%)에 불과(이 중 공동거주자 일방의 승낙만을 받고 다른 일방의 의사에 반하여 침입한 사례는 더욱 소수일 것이다)하다. 과연, 가벌성의 범위가 부당하게 확대되고 있다고 볼 수 있는가? 6. 공동 거주자의 법익 보호 비교형량에 실패하였다. 공동 거주자 일방의 권리가 제한될 수 있음을 용인하거나, 어느 일방의 권리가 우선할 수 없다는 논리는 통상적인 공동생활에 적용되는 것일 뿐이다. 사회통념상 허용된 범위를 넘는 경우에까지 적용된다고 보면 이는 수인한계를 넘는 것이다. 특히 부부 사이는 배우자의 의사를 무시하고, 일방적·자의적으로 주거 내 권리를 주장할 수는 없으며, 특히 가정 내 주거의 평온을 명백히 해친다고 볼 만한 경우까지 부부 일방이 용인하여야 한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별개의견은 남편 허락으로 집에 들어온 친구를 처(妻)의 의사에 반한다고 하여 처벌하는 것은 상식에 맞지 않는다고 하나, 종래 대법원도 이러한 경우까지 처벌하는 취지가 아닐 뿐만 아니라, 불륜을 목적으로 집에 들어온 외부인을 용인하여야 한다는 견해가 오히려 상식에 맞지 않는다). 불륜을 저지르면서 그 와중에 상대방의 집까지 들어오는 극소수의 사람과 하루하루를 가정에 충실하면서 생활하는 대다수의 사람들 중 누구를 더 보호해야 하는가? 의문의 아닐 수 없다. 7. 사회통념, 건전한 상식을 가진 일반 국민의 법감정에 반하는 해석이다. 일반인들에게 "누가 당신 배우자랑 바람을 피우려고 집에 들어왔다면 나쁜 짓이긴 해도 그것이 당신 주거의 사실상의 평온을 해한 것은 아니지 않느냐"라고 말한다면 이를 수긍할 일반 국민들이 과연 있을까? 필자도 이 사건과 같은 상황을 실제로 직접 경험한다면 "내 사실상의 평온은 그대로 유지된 것이니, 주거침입 고소는 어렵고, 손해배상이나 위자료나 많이 받으면 되겠다"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8. 퇴거불응죄와의 관계에서 모순이 발생한다. 다수의견(또는 별개의견)은 일방의 승낙이 있으면 현존하는 다른 거주자의 의사에 반하더라도 주거침입을 부정하는 취지로 해석된다. 그러나, 이에 따르면, 주거 내 현존하는 거주자가 명시적으로 퇴거를 요구한 경우 그 거주자의 사실상 평온은 이미 깨어진 상황임에도 불구, 이에 불응하더라도 퇴거불응죄로 처벌할 수 없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Ⅳ. 맺으며 다수의견은 이 판결로 인하여 발생하는 여러 가지 의문들에 대해 침묵하고 있으며, 어느 범위에서 종전 판례가 변경되었는지 명확하지 않아 향후 혼란이 예상될 뿐이다. 처벌 범위를 오히려 지나치게 제한함으로써 가벌성 있는 행위조차 처벌할 수 없도록 하는 문제도 발생한다. 이러한 행위로 처벌받는 사람이 극소수임에도, 비난받아 마땅한 행위(예전에는 주거침입으로 처벌되지 않기 위해 그나마 은밀하게 자행되었지만)로 적발된 사람들에게 면죄부를 줌으로써, 이제는 당당하게 이를 저지르게 하면서까지 지금도 가정을 지키고 있는 다수의 사람들의 '마음의 사실상의 평온'을 깨뜨리는 것이 과연 온당한 결론인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필자가 이 사건 주임검사가 되었을 때 "대법원 판례가 있으니 기소할 수 없다"면서 과감히 불기소결정서를 쓸 수 있을지 도무지 자신이 없다. 백승주 부장검사 (대구지검 공판제1부)
주거침입
주거침입죄
내연녀
불륜남
유부녀
백승주 부장검사 (대구지검 공판제1부)
2021-10-21
조국 교수(서울대 로스쿨)
MBC 이상호 기자의 '삼성 X파일'의 보도 사건
I. 들어가는 말 2005년 보도된 '삼성 X파일'은 1997년 대선을 앞두고 삼성 그룹 회장 비서실장, 중앙일보 회장이 특정 후보에게 불법적으로 자금을 지원하고 검찰 고위간부에게 '떡값'을 제공하자고 공모하는 대화를 당시 국가안전기획부의 비밀조직이 불법적으로 도청한 파일이다. 이러한 불법을 범한 관련자들은 공소시효가 경료하여 처벌될 수 없었다. 그러나 '삼성 X파일'을 입수하여 보도한 문화방송 이상호 기자는 통신비밀보호법[이하 '통비법'] 위반으로 기소되었다. 제1심 무죄판결 및 제2심 징역 1년과 형 선고유예 판결 이후 대법원은 유죄판결을 확정하였다. 2010년 12월 16일 이 사건에 대한 대법원 전원합의체 공개변론에서 피고인측 참고인으로 출석하여 진술한 바 있다. 이 사건의 헌법적 쟁점은 '통신비밀의 보호와 언론의 자유라는 두 가지 헌법적 기본권의 충돌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이며, 형법적 쟁점은 '불법 감청·녹음에 관여하지 않은 언론이 그 통신 또는 대화의 내용을 보도하는 것이 형법 제20조의 "사회상규에 위배되지 아니하는 행위"로 인정할 수 있는가'이다. 대법원의 8 대 5 다수의견은 위법성조각을 인정하지 않았다. 필자는 소수의견에 동의하고 있는 바, 이하에서는 다수의견에 대한 비판을 중심으로 평석을 전개한다. II. 통신의 비밀보호와 언론의 자유의 균형? 다수의견은 불법도청에 관여하지 않은 언론의 도청결과물 보도의 위법성조각의 요건을 매우 엄격하게 설정하였다. 다수의견이 설정한 첫 번째 요건이 특히 문제이다. 이 요건은 (i)그 보도의 목적이 불법 감청·녹음 등의 범죄가 저질러졌다는 사실 자체를 고발하기 위한 것으로 그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통신 또는 대화의 내용을 공개할 수밖에 없는 경우, (ii)불법 감청·녹음 등에 의하여 수집된 통신 또는 대화의 내용이 이를 공개하지 아니하면 공중의 생명겱택펯재산 기타 공익에 대한 중대한 침해가 발생할 가능성이 현저한 경우 등과 같이 비상한 공적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경우 등 두 가지로 구성된다. 도청범죄가 저질러졌다는 점을 보도할 경우 통신 또는 대화의 내용이 부수적으로 공개될 수밖에 없는 바, (i)의 경우 위법성이 조각된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문제는 (ii)의 경우이다. 다수의견이 상정하고 있는 허용상황은 임박한 범죄모의 통신 또는 대화로 사실상 한정된다. "기타 공익"이라는 포괄적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만, 문언해석상 이 경우도 그 앞에서 예시적으로 제시된 "공중의 생명·신체·재산"에 중대한 침해가 발생한 가능성이 현저한 경우와 같은 수준의 긴급한 상황으로 한정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다수의견의 기준에 따르면 특정 대권후보에게 불법적으로 자금을 지원하고 검찰 고위간부에게 '떡값'을 제공하자고 공모하는 '삼성 X파일'의 대화내용은 공개가 허용되는 "비상한 공적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경우"에 해당하지 않는다. '삼성 X파일'의 내용처럼―소수의견이 제시한 요건인―"통신비밀의 내용이 중대한 공공의 이익과 관련되어 공중의 정당한 관심과 여론의 형성을 요구할 만한 중요성"을 갖고 있더라도 그 내용의 보도는 위법성조각을 검토할 여지가 애초부터 봉쇄되는 바, 언론의 자유의 범위는 대폭 축소된다. III. 중대범죄를 모의한 공적 인물의 인격권에 대한 과잉보호 1. 인색한 사회상규성 판단 대법원이 여러 판결을 통하여 정립한 사회상규성 인정요건은 "행위의 동기나 목적의 정당성, 행위의 수단이나 방법의 상당성, 보호법익과 침해법익과의 법익균형성, 긴급성, 그 행위 외에 다른 수단이나 방법이 없다는 보충성" 등 다섯 가지이다. 그런데 다수의견은 긴급성 인정의 요건을 매우 좁게 설정하고 있다. 필자는 정당행위의 긴급성은 정당방위가 요구하는 엄격한 '현재성'이 아니라 긴급피난이 요구하는 느슨한 '현재성'과 유사하게 이해되어야 하고 주장한 바 있다. 긴급피난에서는 '지속적 위험'(Dauergefahr), 즉 과거부터 계속된 침해가 앞으로도 반복된 우려가 있는 상황이 인정되면 위난의 현재성이 충족된다. '삼성 X파일' 사건의 경우를 보면, 1997년 대선 이후 8년이 지났지만 권·언·검의 유착문제는 보도시점까지 계속 문제가 되고 있었고, '삼성 X파일' 속의 등장인물에 대한 처벌이 불가능해지면서 향후 유사한 사례가 재발될 가능성이 존재하였던 반면, 권·언·검의 유착을 해결할 법적·제도적 장치는 취약 또는 부재하였던 상황이었다. 이렇게 볼 때 긴급성 요건을 충족된다. 한편, 다수의견은 이상호 기자가 '삼성 X파일' 소지인에게 사례비를 지급했다는 점을 주목하는 데, 이는 이 기자가 '삼성 X파일' 관련 범죄를 고발하는 공익이 아니라 특종이라는 사익이 있음을 강조하기 위함으로 보인다. 그러나 취재사례비는 언론계의 관행이며 불법도 아니다. 이 기자는 1,000달러를 문화방송의 자금으로 지급하고 영수증까지 발부하였던 바, 사례비 지급을 공개적이고 투명하게 처리했다. 그리고 보도행위의 동기와 목적이 완전히 공익을 위한 경우는 존재하지 않는다. 특종을 내겠다는 사적 동기와 목적이 있다고 하더라도, 보도행위 전체를 파악하여 공익적 동기와 목적이 지배적이라면 그 정당성은 인정되어야 한다. 그리고 다수의견은 이상호 기자의 보도가 녹음테이프 원음의 직접 방송, 녹음테이프에 나타난 대화 내용의 인용 및 실명의 거론을 금지하는 서울남부지방법원의 가처분결정을 위배하였다는 점을 강조한다. 동 가처분결정은 도청자료의 존재나 그 내용에 대한 보도를 금지하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문화방송은 녹음테이프의 원음을 공개하는 대신 안기부 작성의 녹취보고서를 중심으로 도청자료의 존재 및 그 내용을 보도하였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실명공개의 상당성과 보충성이다. 이번 사건에서 이상호 기자의 보도로 통신의 비밀이 침해된 사람들은 모두 공적 인물이었고, 그들이 나눈 대화내용은 민주적 기본질서의 근간을 훼손하는 중대한 범죄모의였으며, 그들의 실명은 다른 언론의 보도 및 법원의 가처분결정 과정에서 이미 공개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 기자의 실명공개가 수단과 방법의 상당성을 결여했고 보충성 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했다고 파악하는 것은 중대범죄를 모의한 공적 인물의 인격권에 대한 과잉보호이다. 물론 이상호 기자의 보도가 실명을 공개하지 말라는 가처분결정의 일부를 위배한 것은 사실이나, 언론의 자유의 의미를 고려할 때 가처분이라는 잠정적 사법판단 위배를 형사불법으로 바로 연결시키는 논리는 동의할 수 없다. 게다가 '삼성 X파일' 보도 당시 시점에는 가처분결정이 확정된 것도 아니었다는 점을 고려하자면 더욱 그러하다. 2. 형법 제310조의 유추적용 형법 제310조에 따라 사실적시 명예훼손의 경우 그것이 공공의 이익에 관한 때 처벌되지 않는다. 특히 명예훼손의 피해자가 공적 인물이고 언론·표현 행위가 공적 사안에 관한 것인 경우 언론·표현의 자유에 대한 제한은 완화된다. 헌법재판소는 1999년 '김일성 조문편지' 결정에서 다음과 같이 설시하였다(헌법재판소 전원재판부 1999. 6. 24. 97헌마265 결정). 그리고 대법원도 "언론의 감시와 비판 기능은 그것이 악의적이거나 현저히 상당성을 잃은 공격이 아닌 한 쉽게 제한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밝히면서, 명예훼손죄를 사용한 언론의 자유 제약을 경계한 바 있다(대법원 2008. 9. 25. 선고 2008도4889 판결). 물론 통비법 위반죄와 형법상 명예훼손죄는 보호법익과 구조가 다르다. 전자는 통신의 비밀을 보호법익으로 하고, 후자는 명예를 보호법익으로 한다. 전자는 불법하게 획득한 통신비밀을 공개·보도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적시된 사실을 어떻게 획득했는지를 묻지 않는다. 그러나 양 죄의 보호법익은 모두 인격권에 속하며, 이 법익침해의 주체가 언론일 경우 침해되는 법익과 언론의 자유 사이의 형량이 문제가 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이렇게 볼 때 불법 감청·녹음에 관여하지 않은 언론이 그 통신 또는 대화의 내용을 보도하는 것이 형법 제20조의 정당행위로서 위법성이 조각되는가를 판단하는데 있어서 형법 제310조의 법리를 유추적용하여 위법성조각의 범위를 넓힐 필요가 있다. Ⅳ. 다수의견의 우려에 대한 답변 다수의견은 통신의 비밀 보호 쪽으로 강하게 치우친 정당화요건을 설정하고 '삼성 X파일'의 보도가 위법하다고 판단하면서, 이러한 보도행위가 허용될 경우 발생할 가상 상황을 염려하고 있다. 즉, 수사기관이나 정보기관이 공적 인물의 통신과 대화를 불법도청한 후 그 내용을 도청과 관계없는 언론 등 제3자에게 직·간접적으로 전달하여 공개하는 것도 정당화되어 결국은 통신의 비밀 침해가 예방·방지될 수 없다는 우려이다. 먼저 이런 상황을 예방하기 위한 첫 번째 조치는 불법도청을 행한 국가기관 종사자에 대한 단호한 처벌이다. '삼성 X파일'과 같이 공소시효가 경료할 때까지 범죄인을 방치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리고 다수의견이 우려하는 가상 상황은 '삼성 X파일' 보도사건과 달리 국가기관이 통신 또는 대화의 공개를 위하여 의도적으로 언론을 이용한 경우이다. 이 때 언론의 보도행위는 국가기관의 불법도청의 연장으로 보아야 하며, 보도행위의 상당성 평가는 '삼성 X파일' 보도의 경우와 달라져야 한다. 요컨대, 다수의견이 상정하는 가상 상황의 경우는 사회상규성을 인정할 수 없으며, 이는 소수의견의 상당성 판단요건을 유지하면서도 이를 엄격히 해석함으로써 대응할 수 있다.
2012-02-23
김천수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연명치료 중단에 대한 대법원판결의 분석과 향후 논의과제
Ⅰ. 서론 2009년 5월21일 대법원은 타인의 ‘자연스런 사망’에 지나치게 개입하여 방해하는 행위를 금지하는 취지의 판결(2009다17417)을 선고했다. 우린 오랫동안 다투어 온 존엄사 내지 연명치료 중단에 관한 논의에 큰 획을 긋는 판결을 맞이했고, 2009년 6월23일 10시21분 그 판결의 실행을 생명경외의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그런데 연명장치가 제거된 환자가 자기호흡에 의하여 지속적으로 연명하자, 다시 우리 사회는 이 문제를 근본에서부터 다시 논쟁하려는 모습, 즉 논의의 역류현상을 목도하고 있다. 이유는 위 판결에 ‘옥의 티’가 있었고 그 티가 너무 부각되어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기 때문인 듯하다. 이하에서는 지면관계상 위 판결의 다수의견과 대법관 안대희, 대법관 양창수의 반대의견(제1 반대의견)을 보다 이해하기 쉽게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간략하게 평석하고, 상세한 논의는 다음 기회로 미룬다. Ⅱ. 연명치료 중단의 허용요건에 대한 각 의견의 요지 1. 다수의견 다수의견은 연명치료의 중단을 허용하는 요건을 제시하였고, 연명치료의 중단을 허용한 원심판결을 수긍하였다. 다수의견의 설시 내용은 (1) 연명치료 중단의 법적 성질, (2) 중단의 허용요건, (3) 허용요건의 구비 여부 등 세부분으로 구분된다. (1) 연명치료의 중단을 의료계약의 해지로 보았고 환자에게 원칙적으로 계약 임의해지권과 그 연장선에서 계약내용 변경권을 인정하였다. 하지만 중단 내지 변경이 환자의 생명에 직결되는 경우에는 엄격한 요건이 구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2) 그래서 다수의견이 제시한 허용요건은 크게 보면 두 가지 즉 객관적 요건으로서 ‘환자의 상태(狀態)’와 주관적 요건으로서 ‘환자의 의사(意思)’에 관한 것이다. 1) 첫째 요건인 객관적 요건을 정리하면 이렇다. ‘환자의 상태(狀態)’가 “회복불가능한 사망의 단계”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수의견은 이 단계에 진입한 것인지 여부를 세 가지 요소로 판단한다. 즉 다음 세 요소가 분명해야 한다는 것인데 ① 의식 회복의 불가능, ② 생명관련 생체 기능 회복의 불가능, ③ 짧은 시간 내 사망에 이를 수 있음(이하 ‘사망임박’은 이를 의미함)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 판단은 전문의사 등으로 구성된 위원회 등이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한다. 이러한 단계에 진입한 환자에게 시행하는 연명치료는 치료목적이 없는 신체침해행위이고 이는 죽음의 시작을 막는 것이 아니라 이미 시작된 죽음의 종기를 인위적으로 연장하는 것이라고 한다. 2) 이어서 다수의견은 인간의 생명권이 존엄성에 부합되는 방식으로 보호되어야 하는데 인격체로서의 활동이 기대되지 않는 위의 단계에 이른 환자에게 연명치료를 강요하는 것은 존엄성을 침해하는 것이고, 이러한 단계에서 환자가 죽음을 맞이하겠다는 의사를 존중하는 것은 사회상규에 부합하고 헌법정신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 부분 설시는 아래 ‘환자의 의사’를 허용요건으로 하는 것에 대한 기본적인 이유 내지 논거로도 이해할 수 있다. 3) 둘째 요건인 주관적 요건을 정리하면 이렇다. ‘환자의 의사(意思)’가 연명치료의 중단이어야 중단이 허용된다는 것이다. 이 요건은 환자의 사전의료지시 또는 추정의사로 충족된다고 한다. 다수의견은 사전의료지시(“미리 의료인에게 자신의 연명치료 거부 내지 중단에 관한 의사를 밝힌” 표시)를 진료중단 시점에 자기결정권을 행사한 것으로 의제(擬制)한다. 이러한 의제의 요건으로 ① 의사결정능력, ② 의사의 설명, ③ 결정의 진지성, ④ 중단시점상 증명가능성(증명수단은 ⓐ 의료인을 상대방으로 환자가 직접 작성한 서면, 혹은 ⓑ 진료과정에서 의료인이 환자의 의사결정을 담은 진료기록 등)이다. 이 ④ 요건에서 다수의견은 위 ⓐ·ⓑ 요소를 통하여 의료인의 관여를 중시하며, 이 점이 결여되면 설사 환자가 직접 작성한 것이라도 사전의료지시는 아니지만, 위 ① ② ③ 등 다른 세 요건이 구비되면 환자 의사를 추정하는 자료가 될 뿐이라고 한다. 한편 사전의료지시가 없는 경우에도 일정한 요소로 환자의 중단 의사를 인정하는 것이 합리적이고 사회상규에 부합한다고 한다. 다수의견에 의하면, ‘추정의 방법’은 객관적이어야 하고, ‘추정의 기준’은 환자의 최선의 이익에 객관적으로 부합하는지 여부이며 그 ‘부합의 판단기준’은 환자의 평소 가치관이나 신념 등이다. 환자의 가치관이나 신념 등을 파악하는 자료는 다양하게 제시되어 있다. (3) 이 사건이 위 허용요건을 구비하였는지 여부에 대하여 다수의견은 이를 긍정하여 상고를 기각하였다. 2. 제1 반대의견(대법관 안대희, 대법관 양창수) 제1 반대의견은 다수의견이 제시한 연명치료 허용요건의 기본골격에 대하여 찬성하지만 이 사건이 그 요건을 구비하지 못하였다고 보아 원심파기 의견을 냈다. (1) 환자의 상태(狀態)에 대한 이견: 제1 반대의견은 우선 ‘환자의 상태(狀態)’에 대하여 “회복불가능한 사망의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고 본다. 환자 담당의사의 판단을 중시하여 그가 환자의 의식회복가능성이 5% 미만이라고 하였지만 아무튼 그 가능성이 남아 있다는 점, 담당의사를 포함한 전문가의 의견 가운데 최단기인 기대여명이 4개월 이상이라는 점을 든다. (2) 환자의 의사(意思)에 대한 이견: 제1 반대의견은 연명치료의 중단을 구하는 추정적 의사가 환자에게 없다고 한다. 그 논거는 이렇다. 우선 추정적 의사를 가정적 의사 또는 의제된 의사와 구별한다. 추정적 의사는 정황에서 추단된 현실적 의사이며 이 의사표시를 묵시적 의사표시라는 것이다. 가정적 의사를 기초로 한 자기결정은 인정될 수는 없으며, 이 사건에서 원심이 제시한 사정들로는 다수의견이 말하는 위 1.(2). 3)의 ① ② ③ 요건이 구비되지 않는다고 한다. 또한 가정적 의사에 의한 연명치료 중단을 인정한다면 자기결정의 왜곡이 우려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수의견은 환자 주변사람들이 가지는 중단의사를 관철하기 위하여 그들만이 제시 증명하는 정황만에 기하여 환자의 현실의사가 아닌 “이른바 ‘추정적 의사’를 인정”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남는다는 것이다. 한편 원고 대리인이 추정적 의사를 묵시적 의사라고 강조하였으므로, 처분권주의 및 변론주의에 따라 법원은 묵시적 의사 존부에 의해서만 판단해야 하는데 그러한 묵시적 의사가 인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3) ‘환자의 의사(意思)’라는 요건의 선택적 대안(代案)으로 “객관적 법질서의 관점”을 제시: 제1 반대의견은 위와 같은 의사추정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하여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즉 다수의견의 둘째 요건인 ‘환자의 의사(意思)’가 없어도 예외적인 엄격요건으로 중단이 허용된다는 것이다. 즉 환자의 자기결정에 의하여서만이 아니라, 법질서 일반의 관점에서 정당화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 요건의 핵심은 치료중지의무이며 이를 위임 규정인 민법 제681조의 “위임의 본지(本旨)”에서 찾는다. 이를 제1반대의견은 연명치료 강요가 환자의 존엄성을 침해하는 경우라고 하는 다수의견에 상응하는 것으로 본다. 이 존엄성 침해 여부는 환자 및 의사 양측 제반 사정을 합리적으로 고려하여 판단한다는 것이다. 그 가운데 가족의 동의는 독자적 요건일 정도로 중요한 요소라고 한다. 따라서 설사 환자의 가정적 의사가 중단에 반대하는 것이라도, 존엄성 침해라는 요건이 구비되면 법질서 일반의 관점에서 이익형량 내지 가치평가의 문제로서 연명치료 중단이 허용된다는 것이다. 3. 제2 반대의견, 보충의견, 별개의견 이 의견들도 검토의 가치가 매우 높지만 분량의 제한상 요지를 지극히 간략하게 본다. 제2 반대의견(대법관 이홍훈, 대법관 김능환)은 환자의 자기결정권이 연명치료의 착수 이전에 그 거부에 대해서만 인정되어야지 이미 착수된 연명치료의 중단에 대하여는 행사될 수 없다는 점 등을 설시하여 다수의견에 반대한다. 연명치료 허용기준에 대한 보충의견(대법관 김지형, 대법관 차한성)은 제2 반대의견의 각 논거를 반박한다. 끝으로 중단절차에 대한 별개의견(대법관 김지형, 대법관 박일환)은 연명치료 중단의 허용요건 구비 여부에 대한 판단을 신중하면서도 적절한 시기에 내릴 수 있는 법적 절차에 금치산자의 요양감호에 관한 민법 제947조 제2항의 유추적용을 제시한다. Ⅲ. 평석 1. 다수의견에 대하여 다수의견은 대체로 필자를 포함한 기존의 의료법학자들이 주장한 내용을 대체로 수용하였다. 하지만 “회복불가능한 사망의 단계”라는 객관적 요건에 ‘사망임박’(“짧은 시간 내에 사망에 이를 수 있음”)이란 티가 붙어있다. 필자를 포함하여 많은 의료법학자들이 존엄사를 허용하는 요건에 ‘사망임박’은 포함시키지 않았다. 존엄사를 허용하는 것은 ‘곧 사망할 사람’을 ‘바로 사망하게 하자’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존엄사의 허용은 이미 사망의 길로 들어서서 못 고칠 사람에게 치료 효과도 없는 호흡기 같은 인공장치를 그 사람의 뜻과 달리 무의미하게 달아 놓지 말자는 판단이다. 이러한 판단에서 장치가 제거된 이후 그 생명은 자연사의 길을 걷는 것이며 남은 기간은 생명 자체의 몫이다. 제거를 신청한 자, 이를 허용한 자, 이를 실행한 자 어느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며 생명의 자연스러운 현상일 뿐이다. 존엄사를 허용하는 것은 자연사(自然死)의 방해를 금지하는 것이지 결코 사망을 촉진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생명현상이 신비함을 감안한다면 ‘사망임박’이란 요건이 충족되는지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고, 이 요건에 집착한다면 이번 대법원 판결 이후 연명치료 중단을 허용하는 판결은 이제 거의 나올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향후 하급심판결에서 이 사망임박이란 요건은 무시되어야 할 것이다. 이를 무시한 하급심판결이 대법원까지 올라가면 대법원은 판례변경의 절차를 밟아야 할 것이다. 물론 현재의 대법원 판결은 결과적으로 아무런 잘못이 없다. 환자가 인공호흡기 제거에도 불구하고 바로 사망하지 않고 자기호흡으로 연명하고 있으니 ‘사망임박’ 요건의 충족을 오판했다고 하여, 대법원이 환자에게 호흡기의 제거를 금지하여 장착한 채로 두었어야 했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매우 비합리적이기 때문이다. 2. 제1 반대의견에 대하여 추정적 의사에서 그 추단의 대상인 의사를 현실적 의사로 보고, 이를 묵시적 의사표시의 그것으로 보면서, 이렇게 본 원고 대리인의 주장을 변론주의의 틀로 묶어 원심을 파기해야 한다는 논증은, 유력한 학설의 하나로 인정될 수는 있지만, 사견으로는 이에 동의하기 어렵다. 묵시적 의사표시와 명시적 의사표시는 의사표시의 방법상 차이이며, 언어에 의한 명시적 의사표시와 달리 묵시적 의사표시는 언어 외의 수단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즉 ‘묵시적’ 의사‘표시’라는 용어에서 ‘묵시적’이 수식하는 대상은 ‘의사’가 아니라 ‘표시’라고 할 것이다. 현실적 의사란 명시 혹은 묵시로 표시된 것이어야 한다. 이와 같이 제1 반대의견과 다른 시각에서, 추정적 의사는 현실적 의사와 대립하는 용어로서, 일정한 요건 하에 인정된 추정적 의사가 현실적 의사를 대체하는 것을 인정할 것인가의 문제가 있을 뿐이고, 다수의견은 필자 등 다수 의료법학자들의 견해와 같이 이를 인정한 것이라 하겠다. 이렇다면 ‘환자의 의사(意思)’라는 주관적 허용요건의 대안으로 제시된 법질서 일반의 관점이란 논리는 불필요하게 된다. 더구나 위임인이 환자 자신이라면 “위임의 본지(本旨)”를 탐색하는 것과 환자의 ‘가정적 의사’를 탐구하는 것이 과연 다른 것인지도 의문이다. 결론에 이르는 논리의 차이일 뿐이기는 하지만, 객관적 법질서상 이익형량 등의 이름으로 연명치료의 중단을 환자 아닌 다른 사람의 의사 내지 결정에 맡긴다는 것은 오히려 중단을 쉽게 허용할 우려가 있으며 아울러 생명의 처분에 대한 기본적 시각의 문제라고 하겠다. 그 밖에 현실적 의사와 추정적 의사 및 가정적 의사의 관계, 의료계약에 대한 위임규정의 적용, 허용요건으로서 환자 자신이 아닌 가족의 동의 등 논쟁점들이 많지만 지면관계상 이만 줄인다. Ⅳ. 결론 다수의견에 따라 ‘사망임박’이란 요소가 포함된 요건인 “회복불가능한 사망의 단계”에 있다고 인정되어 인공호흡기가 제거된 환자가 자기호흡으로 연명하고 있음을 놓고, 일견 당황해 하는 주변의 모습은 모두 위 ‘사망임박’이란 티 때문이다. 인공호흡기가 없으면 곧 사망할 줄 알았던 환자가 자기호흡을 통해 연명하고 있는 모습에 대하여 우리가 느낄 것은, 생명현상에 대한 경외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판단의 잘못이 이야기되고 있다. 호흡기를 단 의료진의 판단, 제거를 신청한 자녀들의 판단, 연명치료 중단요건의 충족에 대한 법원의 판단 등. 이들을 둘러싼 문제제기, 즉 안달아도 될 호흡기를 달았다고 책임을 주장하는 모습, 곧 돌아가실 줄 알고 제거를 신청한 자녀들과 판결에 따라 제거를 실시한 의료진의 어색한 느낌, ‘사망임박’이란 티로 인하여 판결에 가해지는 설왕설래 등 모두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제 우리는 방향을 제대로 잡아서 남은 논의를 해야 할 것이다. 환자의 상태가 의학적 치료가 불가능하고 무의미하며, 환자의 의사가 기계에 의존한 연명을 원하지 않는다면 그 의사를 존중하여 연명치료를 중단해야 한다는 대원칙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 내지 합의는 각종 조사 등을 통해 확인된 바 있다. 문제의 ‘사망임박’이란 티를 제외하면 이 대원칙에 따른 것이 이번 대법원 판결의 태도이다. 남은 논제 두 가지는 우선 전문가의 영역이라 하겠다. 먼저 연명치료 중단의 객관적 요건인 ‘환자의 상태’를 보다 정확하게 판단하는 방법 내지 절차의 문제, 이는 의학 전문가의 몫이다. 다음으로 존엄사의 주관적 요건인 ‘환자의 의사’를 확인하는 방법이다. 객관적 요건을 구비한 상태에 있는 환자에게 현실적 의사를 기대할 수는 없다. 환자의 의사를 어떻게 추정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우선 사전의사(living will) 제도를 어떻게 도입할 것인가가 이제 우리 사회가 논의해야 할 과제이다. 사망으로 효력이 비로소 나타나는 유언의 법리를 사전의사에 적용할 수는 없으므로, 관련 제도 없는 사전의사는 역시 추정의 근거일 뿐이다. 위 제1 반대의견도 우려한 추정의 불확실성을 제거하는 논의가 필요한 단계이다. 그리고 법원 판단의 ‘신중’과 ‘신속’을 모두 도모하고자 제시된 법적 절차에 관한 위 별개의견의 제도화도 마찬가지이다.
2009-07-06
이상돈 고려대 법대 교수
신용카드의 부정사용과 형법해석정책
Ⅰ. 대상판결 1. 사안 피고인은 S 카드회사로부터 신용카드를 정상적으로 발급 받아 2년여 동안 사용하여 오다가 변제능력에 문제가 발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전화에 의한 무보증카드론 방식으로 7백만 원을 대출받고, 3천여만 원 가량 카드를 사용한 후 대출금과 카드대금을 제대로 납입하지 않았다. 제1심 법원은 피고인에게 사기죄로 유죄판결(대전지방법원 천안지원 2003.6.18. 선고 2003고단276판결)을 하였으나 항소법원은 무죄판결(대전지방법원 2003.8.29. 선고 2003노1492)을 하였다. - 판 결 요 지 - 신용카드를 정상적으로 발급받아 사용해 오다가 상당한 기간이 경과한 후 대금결제 의사나 능력이 없음에도 위 신용카드를 이용 하여 카드론 대출 또는 현금서비스를 받거나 가맹점에서 물품을 구입하고 그 대금을 결제하지 못한 경우 사기죄가 성립하지 않는다 2. 항소법원의 판결요지 카드회원이 신용공여의 범위 내에서 자기 신용카드를 사용하는 것은 기망행위가 아니며, 카드회사에게 카드사용 당시의 재산상태를 고지할 의무가 없다는 점에서, 불고지는 부작위에 의한 기망행위에 해당하지 않으며, 전화자동응답시스템에 의한 카드론의 이용도 공여된 신용의 범위 내에서 대출이 기계적으로 처리될 따름이므로 기망행위에 해당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가맹점도 그런 신용의 범위 내에서는 카드 소지인과 명의인이 동일한 이상, 지급능력의 유무에 대하여 아무런 이해관계를 갖지 않는다는 점에서 기망행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특히 카드 발급 당시의 약정에 고지의무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인정하여 ‘국가의 형벌권이 사경제영역에 속하는 금융질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되면 개인의 자유영역이 과도하게 침해되고 신용조사 등에 관한 금융기관의 도덕적 해이가 초래된다’는 점에서 사회상규에 기초한 고지의무는 인정될 수 없다. - 연 구 요 지 - 항소법원이 사기죄의 해석과 내적으로 연관시킨 형법정책은 해석 론 이상으로 타당성이 있으며, 이 사안에 대한 무죄판결은 바로 이 성적인 형법정책을 형법해석에 내재화시킴으로써 법원에 의해 형 성되는 구체적 형법규범의 정당성을 높이는 중요한 계기를 제공해 준다 Ⅱ. 평석 위 사안에 대한 항소법원의 무죄판결은 대금결제의 능력과 의사가 없이 신용카드를 발급받아 사용하는 행위에 대해 사기죄를 적용해 온 대법원 판례에 대해 비판적 거리를 두고, 사기죄 해석과 신용카드체계의 기능보호에 대한 형법정책, 두 차원에서 각각 의미있는 전환을 시도하고 있다. 1. 사기죄의 해석론 사기죄가 성립하려면 기망, 착오, 재산처분행위, 재산상 손해발생, 재산상 이익취득의 다섯 가지 요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이 판례에서 항소법원이 주로 문제 삼은 요건은 기망과 착오 부분이므로 평석도 이에 국한한다. ① 흔히 작위범 성립을 검토하고 부작위범 성립을 검토해야 한다는 이론에 의하면 결제능력의 상실을 고지하지 않고 자기신용카드를 계속 사용한 것이 作爲의 기망행위인지가 문제된다. 항소법원은 카드사용행위를 표시중립적 행위로 보았지만, 그 행위는 독일학계에서 말하는 이른바 ‘설명가치 있는 행동’(schluBiges Verhalten)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바로 그런 점에서 다수의 학자들과 (분명하지는 않지만) 대법원 판례는그런 행위를 작위범으로 취급한다. 하지만 항소법원의 판단처럼 일단 결제능력과 의사가 있는 상태에서 발급받은 신용카드를 신용공여의 범위 내에서 사용하는 것은, 적어도 카드신청을 할 때처럼 회원이 자신의 재정상태에 대한 그릇된 정보를 담은 서류를 제출하는 것과 같은 적극적인 행위를 하지 않은 이상, 작위의 기망행위로 보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이 사안에서 피고인의 계속된 카드사용행위는 일단 부작위에 의한 기망행위로 취급되는 것이 적절하다. 특히 판결의 정당성에 의문이 강하게 제기될수록 법원은 자신의 결정을 더욱 자세히 근거지워야 하고, 따라서 작위범에 비해 논증부담이 더 무거운 부작위범의 형태로 논증해야 한다는 필자의 견해에서 보면 더욱 그러하다. ② 이 사안에서 카드사용행위가 부작위에 의한 기망행위가 되려면 제18조의 결과방지의무(保證人義務)가 피고인에게 있었어야 한다. 하지만 카드회원가입계약에 그런 의무가 명시되어 있지 않거나, 보통거래약관으로 정해져 있다고는 하더라도 그런 특약이 불공정거래약관의 하나로 취급될 수 있는 이상, 계약상 유효한 고지의무는 인정하기 어렵다. 다만 위법성조각사유인 정당행위(제20조)와 다소 혼동될 여지를 무릅쓰고 항소법원이 사용한 표현인 사회상규, 그러니까 학계에서 말하는 條理나 신의칙에 의한 결과방지의무(保證人義務)로서 고지의무를 인정할 여지는 있다. 항소법원은 이 신의칙에 의한 고지의무를 형법정책과 내적으로 연결짓는 탁월한 견해를 보이고 있다. 해석은 단지 인식이 아니라 정책과 착종되는 것임을 통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뒤에서 보듯이 적절한 방향의 형법정책을 설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항소법원의 해석에 대해서는 정책과 해석은 별개라는 전통적인 법인식론이 비판을 가해올 수 있다. 그러나 한 걸음 양보하여 그런 전통적인 법인식론을 따른다고 하더라도 카드회원에게 그런 고지의무를 인정하지 않는 해석은 가능하며, 또한 더 타당하다. 즉, 결과방지의무에 대한 機能說의 해석론으로 제18조의 “자기의 행위로 인하여 위험발생의 원인을 야기한 자”에는 국가기관이나 사경제기구와 거래하는 개인이 포함되지 않는다는 이론을 들 수 있다. 거대기구는 일반 개인에 비해 우월한 조직적 힘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자신과 거래하는 개인들이 자신의 이익을 보호해줄 것이라는 신뢰 속에서 스스로 위험을 방어하는 태세를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이론이다. 이런 이론에 의하면 신용카드회사와 거래하는 개인에게도 그 회사에 대한 “위험발생을 방지”할 의무로서 자신에게 불리한 사실의 변경을 적극적으로 알릴 의무(즉 국가나 사경제기구의 재산손해방지의무)가 신의성실원칙에 의해 인정될 수는 없게 된다. 그러므로 해석과 정책을 분리하더라도 항소법원의 판단은 유지될 수 있다고 본다. ③ 만일 이 사안을 삼각사기로 본다면 회원의 고지의무는 피기망자인 가맹점에 대해서도 인정될 여지가 있다. 가맹점은 카드회사와 같이 거대한 조직력과 지배력을 갖지 못한 작은 상점일 수 있다. 이 경우에는 신의성실원칙에 의해 고지의무를 인정할 여지가 생긴다. 하지만 가맹점은 카드사용자의 지급능력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고, 계약상 카드회사로부터 대금을 지급받고 있으며, 더 나아가 카드소지인과 명의인의 동일성을 확인할 계약상 의무마저 무관심한 것이 거래현실이다. 이 현실을 진지하게 고려한다면 고지의무를-따라서 항소법원이 판시하듯 기망행위를-인정할 필요도 근거도 없게 된다. 하지만 다시 한 걸음 양보하여 카드회원에게 법적으로 고지의무를 인정하더라도 피기망자인 가맹점은 지급능력에 관해 무관심과 무의식으로 일관하기 때문에 가맹점에게 사기죄의 두번째 요건인 착오가 발생하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물론 이럴 경우 (삼각)사기의 미수가 성립할 여지는 있다. 하지만 거의 모든 가맹점이 착오를 갖지 않는 현실이라면 고지의무위반이라는 부작위에 의한 기망행위는 불능범(제27조)으로 처리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④ 카드회원이 결제능력 없이 전화자동응답시스템으로 대출을 받은 행위도 가맹점에서 물품과 용역을 제공받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고지의무를 인정하지 않는 한, 기망행위로 파악될 수 없다. 설령 기망행위로 인정한다 해도, 피기망자가 사람이 아니라 정보처리장치이므로 착오의 요건이 충족되지 않는다. 착오요건의 충족은 기계를 의인화하는 수사학적 차원에서만 가능할 뿐이다. 또한 기망행위 요건의 충족은 인정하더라도 가맹점을 피기망자로 하는 삼각사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카드론이용행위는 사기미수범이 아니라 사기불능범으로 처리되어야 한다. 2. 신용카드체계와 형법정책 이 사안에서 항소법원이 사기죄의 해석과 내적으로 연관시킨 형법정책은 해석론 이상으로 타당성이 있다. 특히 항소법원이 지적한 카드회사의 모럴헤저드는 자기신용카드의 부정사용과 타인신용카드의 부정사용이 불법유형에서 차별적임을 전제로 한다. 후자는 외부로부터 신용카드체계의 기능을 위태롭게 하는 행위로서 그 불법유형이 절도나 사기 등과 매우 유사하다. 이에 비해 전자는 신용카드체계에 참여하는 내부자의 일탈행위이며, 그 불법유형은 계약위반의 성격이 더욱 강하다. 그런데 세 당사자 간에 이루어지는 3가지 종류의 신용카드계약에 내재된 도덕원칙(Moralprinzip)은 그런 계약과 거래를 통해 모두가 권리와 의무, 기회와 부담을 형평있게 누리게 된다는 점에 있다. 회원은 포괄적 신용을 얻되 회비와 결제대금이자를 부담하고, 가맹점은 수수료를 부담하되 대금지급을 안정적으로 제공받고 회원의 소비성향증대에 터 잡은 매출의 증가라는 이익도 얻는다. 이에 비해 카드회사는 가맹점에게는 대금지급을 보장하되 수수료를 얻으며, 회원에게는 포괄적으로 신용을 공여하되 회비를 얻는다. 그런데 이때 카드회사가 누리는 이익은 무엇보다도 포괄적인 신용공여를 경제적 관점에서 합리적으로 수행한다는 점에 기초한다. 바꿔 말해 카드회원자격의 부여는 카드회사가 스스로 자신의 거대조직을 활용하여 합리적으로 수행해야 하며, 이를 제대로 하지 못한 위험은 스스로 짊어져야 한다. 카드회사는 신용공여실패의 위험을 부담하지 않고는 신용공여로부터 어떤 이익도 누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항소법원이 펼친 해석정책은 바로 이런 도덕원칙에 지향되어 있다. 카드회사의 신용카드남발은 불량회원과 부실채권을 증가시키고, 결국에는 카드회사가 스스로를 재정위기에 빠뜨림으로써 신용카드체계의 기능을 근본적으로 위태롭게 만든다. 그러므로 자기신용카드의 부정사용을 사기죄로 처벌하는 것은 도덕원칙을 깨뜨릴 뿐만 아니라 신용카드체계의 기능보호라는 목적에서 보더라도 역기능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형법해석은 그와 같은 모럴헤저드를 촉진시키는 카드회사의 후견인 역할을 거두어들이고, ‘스스로 분쟁의 원인을 제공한 피해자에게 책임을 귀속시키는’ 피해자학적 관점을 끌어들일 필요가 있다. 또한 거시적으로 신용카드형법은 카드체계에 참여하는 내부자들이 스스로 일탈행동을 예방하고, 손실위험을 조정하는 자율적 조절메커니즘의 성장을 촉진시키는 구조정책에 그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 형법의 보충성원칙은 그런 방향의 형법 변화를 요구하고 있고, 형법정책이 그런 요구에 응할 때 형법의 정당성은 더욱 높아질 것이다. 이 사안에 대한 항소법원의 무죄판결은 바로 그와 같은 이성적인 형법정책을 형법해석에 내재화시킴으로써 법원에 의해 형성되는 구체적 형법규범의 정당성을 높이는 중요한 계기를 제공해주고 있다.
2003-10-27
강경근
전경의 헌법상 지위
法律新聞 第2337號 法律新聞社 戰警의 憲法上 地位 姜京根 〈崇實大法大敎授·法學博士〉 ============ 15면 ============ 大法院 제2부 94年6月14日宣告 94도778判決 【大法院 判旨】 간첩의 침투거부·포착·섬멸 기타의 대간첩작전을 수행하고 치안업무를 보조하기 위하여 지방경찰청장 등 소속하에 전투경찰대를 두는 것이므로(전투경찰대설치법 제1조제1항),현역병으로 입영하여 군사교육을 마친자를 전투경찰순경으로 전임할 경우 대간첩작전의 수행을 임무로 하는 전투경찰순경과 치안업무의 보조를 임무로하는 전투경찰순경간에는 그 전임대상자가 될 요건에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전경법 제2조의3제1항 제2항) 소속상관의 시위진압을 위한 직무상의 명령이 있는 이상 대간첩작전의 수행을 임무로 하는 전투경찰순경도 이에 복종하여야 하는 것이다. 또한 피고인의 소위가 시위진압 임무를 수행하면서 정신적 육체적으로 격심한 고통을 겪은데서 비롯한 것이라 하더라도 원판시와 같이 근무지를 이탈한 행위를 긴급피난 또는 사회상규에 위배되지 아니하는 행위라고 볼 수 없으므로 같은 취지의 원심판단은 옳다. 【評 釋】 Ⅰ. 上告理由 이 판결 대법원제2부 94도778에서는 原審인 서울고등법원 1994년2월7일선고 93노3808 판결을 모두 옳다고 하여 상고를 기각한다는 主文을 내렸다. 따라서 事件槪要는 상고이유를 보는 것으로서 대신한다. 상고이유는, 현역병으로 입영하여 소정의 군사교육을 마친 자를 전투경찰대원의 임무에 종사하도록 한 「전투경찰대설치법」(1991년5월31일 법률 제4369호 경찰법 제정에 의하여 개정되기 전의 것, 이하같다)제1조, 제2조의 3 제1항, 제3조제1항, 병역의무의 특례규제에 관한 법률(1993년12월31일 법률제4685호 병역법 전면개정으로 폐지되기 전의 것) 제5조제1항, 제3항의 관계규정이 헌법제10조, 제11조 제1항, 제19조, 제39조 제2항에 위반되는 규정이라 아니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상고이유에 대하여 내려진 대법원판결은 수긍하기 어려운 몇가지 점이 있다. Ⅱ. 大法院判決은 戰警의 (憲)法上地位를 論證치 아니한 未盡함이 있다. 상고이유를 보면, 군인(현역병)의 신분으로 입영하여 전투경찰순경의 임무에 종사토록 하는 것이 위헌이라는 취지가 있는 바 이는 기본적으로 전경의 신분이 말 그대로 순경으로 전환되는 것인지 아니면 군인의 신분으로 계속 존속하는 것인 지의 여부를 따져야, 그 임무종사의 헌법적합성 여하가 가려질 수 있는 것이다. 보통 전경으로 일컬어지는 戰鬪警察巡警은 국방의무(헌39조1항)를 지는 대한민국 국민중에서 병역법에 따라 징·소집된 군인등으로부터 선발된다. 이때 현역병으로 복무중인 사람이 전투경찰대원으로 종사하게 되는 경우「그의 군인으로서의 신분이 다른 신분으로 轉換」(병역법 2조1항7호)된다고 하나, 이는 군인신분 자체의 변동으로 볼 것이 아니고 병역의무를 이행하는 자의 업무에 관한 일종의 配置轉換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실질적인 해석이다. 그런데 1970년에 제정된 戰鬪警察隊設置法에 따르면 전투경찰대는 대간첩작전 수행과 치안업무보조를 그 임무(법1조1항)로 하며, 그 소속도 국방부장관이 아닌 내무부장관하게(법1조2항) 있게 되면서 경찰공무원법이 준용(법4조)된다고 하지만, 이것이 군인으로서의 신분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본다. 왜냐하면 첫째, 경찰대학 졸업예정자로서 전투경찰대에 복무할 것으로 추천받은 때에는 현역병지원자로 보아 입영하게 하여 소정의 군사교육을 마친 후 전임시킬 수 있으며(병역법 24조2항), 이는 치안업무보조를 임무로 하는 전투경찰순경임용예정자(소위 치안전경)도 마찬가지(위 법참조), 이들은 모두 그 현역병의 복무기간을 마칠 때까지는 그 신분이 軍人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전투경찰외에 전투경찰대설치법 제3조제1항 규정에 의하여 대간첩작전의 수행을 임무로 하는 전투경찰순경임용예정 소요인원의 배정을 경찰청장으로부터 요청받은 국방부장관은 현역병으로 입영하여 소정의 군사교육을 마친 사람중에서 소요인원을 전경으로 전임시킬 수 있는 바(소위 작전전경, 병역법 24조 1항 참조), 이는 앞의 두 경우와는 달리「현역병으로 입영한 자」중에서 「원하는지의 여부에 관계없이」이들을 경찰기관장의 소속하에 (전경법 1조1항) 配定하기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결국 전경은 어느 부류나 그 신분이 「基本的으로 軍人」이며, (兵役法이 1993년12월31일 법률 제4685호로 전문개정되었음에도 제24조에서 전경은 여전히 현역병으로 인정하고 있음을 부기한다.)특히 작전전경은 스스로 원하지 않는 경우에도 정부에 의해 배정되어 근무하게 된다는 점에서, 그리고 지원받아서 추천되는 치안전경은 경찰청장과 국방부장관이 협의하에 그 복무기간이 6월의 범위안에서 연장되기에(병역법24조3항), 일반사병과의 관계에서 憲法的 問題点이 있게 되는 것이다. Ⅲ. 施威鎭壓의 임무에 종사하는 戰警의 基本權은 侵害된다. 전경이 기본적으로 군인으로서의 신분을 지니기 때문에, 특히 치안전경의 시위진압 등 치안업무보조라든지 작전전경의 대간첩작전 수행이 과연 國軍의 任務와 조화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이다. 우리 국군은 국가의 안전보장과 국토방위의 업무를 정치적 중립성을 지키면서 수행하도록 헌법제5조 제2항은 요구하고 있다. 따라서 대간첩작전의 수행은 원칙적으로 군인이 할 일이다. 현재 이들 업무일부를 기본적으로 군인신분인 작전전경이 맡고 있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1975년에 개정신설된 전경법 제2조의 2 에 따라서 전경은 임무수행상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경비지역안에서 검문을 할 수 있다고 하므로 작전전경이 대간첩작전이 아닌 示威鎭壓이나 검문검색에 차출될 수 있는 현실적 통로는 열려 있는 셈이기에 사실 이 조항에 대한 검토도 요청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치안전경의 시위진압은 타당한 것인 ============ 13면 ============ 가. 그들의 신분이 기본적으로 군인이라면 그 정치적 중립성은 준수되어야 하는데 실제적인 시위진압 등 치안업무보조는 政治的 偏向性을 띠게 될 개연성이 높은 것이며, 나아가 현실적으로 국가안보 등에 위해가 되는 비상사태시라면 치안전경이 아니라 병력으로 공공의 안녕질서를 유지하도록 戒嚴을 선포하는 것이 헌법(77조)에 합당할 것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치안전경 제도는 폐지되고 이들 업무는 경찰공무원이 맡을 것이며, 작전전경의 업무는 현역군인이 맡고 이들 작전전경은 점진적으로 폐지하는 것이 막연한 국민적 의구심을 없앤다는 점에서도 생각해 볼만 하다. 전경이 시위진압 등을 거부할 때 전경법 제9조 내지 제11조에 의하여 근무지이탈죄라든지 직무태만죄 또는 근무기피죄 등으로 처벌되거나 상관명령불복죄로 벌을 받을 수 밖에 없고, 이를 집단적으로 범한 자는 무기징역까지 받게 되므로 전경이 시위진압을 거부하기는커녕 드세질 수밖에 없고 그렇다면 직무상 그리고 한 개인으로서의 전경이 겪는 갈등은 심할 것이다. 헌법 제39조 제2항에서는 누구든지 병역의무의 이행으로 인하여 불이익한 처우를 받지 아니한다. 그런데 신성한 국방의무(헌5조, 39조)를 이행하는 국민이 원하거나 원하지 않거나 주권자인 국민을 적으로 하게 되는 작전에 참여토록 罰則으로서 강제하는 것은, 「국가의 적」만을 상대로 하는 군인과 비교할 때의 그 平等性(헌11조)위배, 전경개개인의 인간존엄과 행복추구(헌10조)위배, 그리고 스스로의 양심(헌19조)에 결코 합치되지 않는 것이다. 대법원은 전투경찰대설치법의 위 규정들이 헌법에 합치되는냐의 여부를 물어온 上告理由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그리고 명료하게 說示하지 아니했다는 評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대법원 역시 법률위원심사에 있어서 제청권이 있으므로 제청하지 아니할 때에는 그 憲法的 理由를 소상하게 전개하며 스스로 헌법기관으로서의 위상을 높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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