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사실관계
1. 경유수입계약의 체결 및 신용장의 개설
주식회사 P는 2003년 9월경 싱가포르 소재 무역상 N으로부터 경유 5,600㎘를 수입하기로 하는 내용의 수입계약을 체결하고 수입대금의 지급을 위하여 원고에게 신용장 발행을 신청하였고, 원고는 수익자를 N으로 하는 신용장을 개설하여 주었다. N사는 위 매매계약에 따라 2003. 9.24.경 대만의 마이랴오 항에서 J해운이 운항하는 이 사건 유류 운반선 포천헤베호(Fortune Hebe, 이하 ‘이 사건 선박’이라 함)에 경유 4,678.642메트릭톤(이하 ‘이 사건 화물’)을 선적하고 J해운으로부터 수하인이 도이체 방크 아게 싱가포르(이하 ‘도이체 방크’)가 지시하는 자, 통지처가 P사로 된 선하증권(이하 ‘이 사건 선하증권’)을 발행 받았다.
2. 이 사건 화물의 육상 저장탱크 입고
피고는 온산항에서 액체화물에 대한 보세창고업을 영위하는 회사이며 피고와 P사는 2002. 5.1. 부터 2004. 4.30.까지 온산항 탱크 터미널 내에 위치한 피고의7,000㎘짜리 6기를 전용으로 사용하는 액체화물 저장탱크 사용계약을 체결하고 이에 따라 P사는 피고의 저장탱크를 사용하여 왔다. 이 사건 화물을 적재한 선박은 약 3일 정도 항해를 한 끝에 2003. 9.27. 온산항에 도착하였으며, 2003. 9.29.경 P사의 요청에 의하여 J해운이 이 사건 화물을 피고 소유의 유류화물 저장탱크(이하 ‘이 사건 탱크’)에 입고하였다. 한편, 이 사건 화물보다 이 사건 선하증권이 양하지에 늦게 도착할 것이 명백하였으므로 2003. 9.26.경 P사는 이 사건 선하증권과 상환함이 없이 이 사건 화물을 P사에게 인도하여 줄 것을 요청하면서 그로 인하여 J해운이 부담하게 되는 채무, 손해 등을 면책시키겠다는 내용의 소위 면책각서(Letter of Indemnity, 이하 ‘면책각서’)를 발행하여 주었으며 J해운은 이의없이 이를 수령하였다.
3. 이 사건 화물의 반출
2003. 9.30.부터 2003. 10.9.까지 사이에 피고가 P사의 요청에 따라 이 사건 선하증권의 원본이나 운송인인 J해운의 화물인도지시서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 P사에게 이 사건 화물을 모두 반출하여 주었다.
4. 신용장 대금의 지급
N사는 2003년 12월경에 이르러서 이 사건 신용장 기재에 따라 도이체 방크 에게 선적서류 일체를 매도하였고 도이체 방크는 이를 원고에게 송부하였으며 원고는 2003. 12.17. 도이체 방크에게 신용장 대금 1,126,421.32 달러를 지급하고 이 사건 선하증권을 취득하였다.
5. 원고의 피고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소송
그런데 P사가 이 사건 화물을 인도 받아가 모두 소비한 뒤 도산하여 버리자 원고는 P사로부터 신용장 대금의 상환을 받을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따라 원고는 관련 당사자 중 자력이 있는 피고를 상대로 하여금 447,293,228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서울중앙지방법원에 2006. 8.경 제기하였다. 이 소송에서 J해운은 원고 승계참가인 겸 보조참가인으로 참가 신청을 하였다.
Ⅱ. 서울중앙지방법원 판결(2006. 12.15. 선고 2004가합74274 판결)
위 소송에서 서울중앙지방법원은 “피고는 보세창고사업자로서 운송인인 J해운으로부터 통관 전의 이 사건 화물을 인도받아 보관하게 되었고, 이러한 경우 피고는 J해운의 인도지시가 있거나 선하증권의 제시되기 이전까지는 이를 보관하는 지위에 있는 것이고 J해운은 피고를 통하여 이 사건 화물에 대한 지배(간접점유)를 계속하는 지위에 있는 것이므로, J해운과 피고의 사이에 이 사건 화물에 관하여 묵시적 임치계약이 성립하며 피고는 J해운이 운송인으로서 선하증권 소지인에게 부담하는 이 사건 화물의 인도의무에 관하여 그 이행보조자의 지위에 서는 것이다”라고 설시하면서, 대법원 2004. 1.27. 선고 2000다63639 판결, 대법원 2004. 5.14 선고 2001다33918 판결을 그 근거로 제시하였다. 1심 판결이 적시한 이 두 대법원 판결은 소위 중첩적 임치계약이론을 확립시킨 것이다.
위 1심 법원은 계속하여 “따라서 피고는 위 임치계약에 따라 J해운 또는 그가 지정하는 자에게 화물을 인도할 의무가 있고 J해운의 이행보조자로서 선하증권과 상환하여서 화물을 인도할 의무가 있으므로, 만약 선하증권을 제출하지 아니하는 실수입자가 화물의 인도를 요구하는 경우에는 피고는 먼저 운송인인 J해운의 동의를 받거나 화물의 인도를 요구하는 자에게 J해운의 화물인도지시서를 받아 오도록 요구하여야 할 주의의무가 있다”고 하면서 피고가 이러한 주의의무를 위반하였다는 이유로 피고는 불법행위로 인하여 원고가 입은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면서 원고의 청구를 인용하는 판결을 내렸다. 이에 따라 피고가 항소를 하였다. 한편 J해운의 승계참가신청에 대하여는 각하를 하였다. 이후 J해운은 보조참가인의 자격으로만 참가를 하였다.
Ⅲ. 서울고등법원 판결(2008. 3.27. 선고 2007나11837 판결)
서울고등법원은 “이 사건 화물이 피고의 주장과 같이 위 영구호스(필자 주 : 선박측에 고정되어 있는 강관부분으로서 선박 내 탱크와 육상탱크로 가는 고무호스를 연결시키는 부분을 말함) 연결점을 지날 때 또는 늦어도 피고의 저장탱크에 입고된 때 P사에 인도된 것으로 본다면 그 시점에 이미 선하증권의 정당한 소지인에 대한 불법행위는 성립하는 것이고, 따라서 인도 후에 이 사건 화물을 보관하는 지위에 있게 되는 피고가 운송인인 J해운의 이행보조자의 지위에 있지도 아니하며 불법행위 이후 피고가 이를 P사에게 반출하여 주었다고 한들 별도로 선하증권 소지인에 대한 불법행위가 성립하는 것은 아니라고 할 것이고[여기까지가 피고의 주장], 반면 원고 승계참가인의 주장과 같이 이 사건 화물이 피고의 저장탱크에서 P사에게 반출되는 시점에서 운송인인 J해운으로부터 P사에게 이 사건 화물이 인도된 것이라고 본다면, 피고는 적어도 운송인인 J해운과 사이의 묵시적인 임치계약에 의하여 이 사건 화물을 보관하는 지위에 있으면서도 임치인인 J해운의 지시나 선하증권과 상환없이 이 사건 화물을 무권리자에게 인도한 것으로 그로 인한 손해배상책임을 면할 수 없다고 할 것이다[뒷부분은 원고측의 주장]. 그러므로 이 사건 화물이 언제 운송인의 지배를 떠나 P사의 지배 하에 들어갔는지, 즉 그 인도시기를 언제로 볼 것인지가 이 사건의 쟁점이다”라고 법적 쟁점을 우선 명료하게 정리하였다. 서울고등법원은 그와 같은 정리 아래에서 유류화물 운송의 관행상 인도의 시점이 “화물이 선박의 영구호스 연결점”을 지날 때에 인도되는 것으로 보고 있는 관행, 유류화물과 컨테이너 화물의 보관상의 차이 등 제반요소를 들어 이 사건 화물의 인도는 “영구호스 연결점을 지날 때 또는 늦어도 피고의 저장탱크에 입고된 때”라고 판단한 뒤, 그렇다면 피고가 P사에게 선하증권을 상환함이 없이 이 사건 화물을 반출하여 주었다고 하여도 별도로 선하증권 소지인에 대하여 불법행위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판시하였다. 즉 서울고등법원은 1심 판결을 취소하고 원고의 청구를 기각하였다. 이에 원고가 상고를 하였다.
Ⅳ. 대법원 판결의 요지
1. 이와 같은 약정에 따라 운송인이 유조선 도착 후 갑판 위의 용구호스 연결점을 통하여 수입업자가 미리 확보한 육상의 저장탱크에 연결된 파이프 라인으로 유류화물을 보낸 경우에, 위 약정에 불구하고 운송인이 수입업자와 별도로 육상의 저장탱크를 관리하는 창고업자에게 수입된 유류화물을 임치하였다고 볼 수 있는 사정이 없는 한 창고업자는 운송인의 유류화물 운송 내지 보관을 위한 이행보조자의 지위에 있다고 할 수 없으므로 유류화물이 위 영구호스 연결점을 지나는 때에 운송인의 점유를 떠나 창고업자를 통하여 수입업자에게 인도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대법원 2004. 10.15. 선고 2004다2137 판결 참조).
2. 이 경우 그 창고업자가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운송인의 유류화물 운송 내지 보관을 위한 이행보조자의 지위에 있다고 볼 수 있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운송인이 창고업자에 대하여 인도하는 때에 수입업자에 대한 인도가 종료되어 운송인은 유류화물에 대한 점유를 비롯한 사실상의 지배를 상실하게 되고, 운송인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유류화물에 대한 점유를 하고 있던 선하증권 소지인 역시 유류화물에 관한 사실상의 지배를 잃게 되는 등 운송물에 대한 권리가 침해된다. 따라서 선하증권 소지인이 유류화물의 인도에 동의하였다는 등의 다른 사정이 없는 이상 운송인은 면책각서의효력을 선하증권 소지인에게 주장할 수 없으므로, 운송인이 선하증권과 상환없이 수입업자로부터 위임받은 창고업자에게 유류화물을 인도함으로써 선하증권의 정당한 소지인이 유류화물에 대한 지배를 상실하는 등 운송물에 대한 권리를 침해당하는 손해를 입게 되어 선하증권의 소지인에 대한 불법행위가 성립한다 할 것이고, 그 이후 창고업자가 임치물인 유류화물을 수입업자에게 출고하면서 선하증권 등을 교부받지 아니하였다 하더라도 이는 임치인인 수입업자와의 사이에 이루어진 임치 약정에 따른 것이므로 그 사정만으로는 선하증권의 정당한 소지인에 대한 새로운 불법행위가 성립한다고 할 수 없다.
3. 대법원은 위와 같은 이유를 설시하면서 원심의 판단은 정당하다고 하며, 원고의 상고를 기각하였다.
Ⅴ. 평석
1. 해상화물의 인도시기
화물의 인도란 화물에 대한 사실상 지배의 이전이다(졸고, 국제항공화물인도와 관련된 법률문제, 한국해법학회지 제22권 제1호263면). 이러한 점은 해상화물이나 항공화물 사이에 차이가 있을 수 없다. 인도시점과 관련한 대법원의 판결은 세 가지가 주목된다. 첫째, 대법원은 인도 시점과 관련하여 “운송인이 수입업자와 별도로 육상의 저장탱크를 관리하는 창고업자에게 수입된 유류화물을 임치하였다고 볼 수 있는 사정이 없는 한 창고업자는 운송인의 유류화물 운송 내지 보관을 위한 이행보조자의 지위에 있다고 할 수 없으므로, 유류화물이 위 영구호스 연결점을 지나는 때에 운송인의 점유를 떠나 창고업자를 통하여 수입업자에게 인도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판시를 하고 있다. 둘째, 유류화물에 대한 지배와 관련하여 “수입업자로부터 위임받은 창고업자에게 유류화물을 인도함으로써 선하증권의 정당한 소지인이 유류화물에 대한 지배를 상실”한 것이라고 판시하였다. 셋째, 창고업자의 불법행위 책임의 성립 가능성에 대하여 “그 이후 [필자 주: 즉, 창고에 인도된 이후] 창고업자가 임치물인 유류화물을 수입업자에게 출고하면서 선하증권 등을 교부받지 아니하였다 하더라도 이는 임치인인 수입업자와의 사이에 이루어진 임치 약정에 따른 것이므로 그 사정만으로는 선하증권의 정당한 소지인에 대한 새로운 불법행위가 성립한다고 할 수 없다”고 판시하였다. 이 세 가지의 판시사항은 모두 지극히 타당한 것이다.
사실, 이 사건의 사안에 대하여 대법원이 종래 적용하여 오던 소위 “중첩적 임치계약 이론”을 그대로 적용하였다면 보세창고업자인 피고는 운송인인 J해운이나 선하증권의 소지인에 대하여 선하증권을 상환 받고 적법하게 화물을 반출해야 할 계약상 또는 법적인 의무를 지게 되는데, 이를 위반하고 화물을 반출하여 주었으므로 피고는 선하증권 소지인인 원고에 대하여 불법행위에 의한 손해배상책임을 진다는 결론이 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 대법원 판결은 피고가 그러한 손해배상책임을 지지 않는다고 판결을 내렸는 바, 결론은 물론 위 이유의 측면에서 대법원의 위 판결은 그 이전의 대법원 판결을 광정한 것이라고 본다.
2. 대법원의 판결 이유에서 주목할 판시사항
위 세 가지 판시사항을 가지고 살펴 보면, 첫째의 판시사항은 유류화물에 대하여 인도시기를 화물이 고무 호스를 통하여 육상 탱크로 들어 가기 위하여 선상의 영구호스를 떠나는 순간이라고 판단함으로써 유류화물의 인도시기를 명확히 하였다는 점이다. 둘째는 보세창고가 수입업자에 의하여 위임을 받았으므로 그 창고로 들어 가게 되면 해상운송인의 점유는 상실된다는 점을 명확히 하였다는 점이다. 종래 대법원 판결은 보세창고 설 영인 이 그 화물을 선하증권을 상환하면서 정당하게 인도하는 순간까지 해상운송인은 보세창고 설영인 을 통하여 간접점유를 하는 것이고, 운송인의 화물인도의무는 종료되지 않는 것이라고 이론 구성을 하였었다. 마지막으로 보세창고 설영인 이 임치인의 요청에 따라 화물을 반출한 경우, 비록 선하증권을 상환함이 없이 이를 하였다 하더라도 선하증권의 소지인이나 해상운송인에 대하여 불법행위책임을 지지 않는다고 판시한 점이다. 이 사항 역시 당연한 것이었음에도 그 동안 ‘중첩적 임치계약이론’이 적용된 결과 보세창고 설영인 은 그 동안 선하증권 소지인이나 해상운송인에게 불법행위를 이유로 한 손해배상책임을 지는 것으로 판결이 내려져 왔었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면 이번에 내려진 이 사건 대법원 판결은 실로 획기적인 전환이다.
3. 중첩적임치계약 이론이 폐기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번에 내려진 위 대법원 판결이 종래 적용하여 오던 중첩적 임치계약이론을 전면적으로 폐지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인가? 법 형식논리적으로 말한다면 그렇게 단정하기에 이르다. 왜냐하면 이번에 내려진 대법원 판결은 전원합의체 판결도 아니고 마치 대법원의 이 사건 판결이유가 유류화물에 국한하여 적용되는 것과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는 이번에 내려진 위 대법원 판결이 종래 적용하여 오던 중첩적 임치계약이론을 전면적으로 폐지한 것이라고 선언하지 않았어도 앞으로 중첩적 임치계약이론이 적용될 여지는 없어 졌다고 단언한다. 오히려 중첩적 임치계약이론은 탄생시부터 문제가 허다하게 많았고, 그로 인하여 왜곡된 판결이 양산되었으며, 왜곡은 또 다른 왜곡으로 이어지는 현상이 있었는데 졸고, 위 국제항공화물인도와 관련된 법률문제, 263 내지 265면, 졸고, 수입화물의 흐름에 대한 실무적 이해, 국제거래법학회지 제15집 제2호 (2006), 241 내지 244면, 대법원은 이러한 문제점을 광정할 기회를 기다리다가 위 대법원 판결에 이르러 이러한 중첩적 임치계약이론을 완전히 폐기한 것이라고 평가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