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에 도입돼 시행 6년째인 국민참여재판이 위기를 맞고 있다. 그동안 일부 강력 범죄에서만 실시되던 국민참여재판이 정치적인 사건에까지 확대된 상황에서 우리 사회가 대선 후유증에서 빠져 나오지 못해 이념 갈등이 법정으로 확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의 사법참여를 통해 법원 판결의 투명성과 신뢰성을 담보하기 위해 도입된 국민참여재판에 대해 정치권이나 일부 언론이 '튀는 판결'이라거나 '제도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비판하면서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법조계는 정치권의 이념 편향적인 태도와 사법 경시풍조, 법원·검찰의 제도 운영 미숙, 국민들의 소극적인 배심원 참여 등을 위기의 원인으로 꼽으면서 한국형 국민참여재판이 제대로 안착할 수 있도록 개선하는 데 힘을 모아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2008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열린 국민참여재판에서 배심원들이 선서하고 있다. 대구지법에서 진행된 이 재판에서 배심원들은 강도상해 혐의로 기소된 피고인에 대해 만장일치로 집행유예 평결을 내렸다.
◇'공정한 참여재판' 위해 관할이전 등 적극 이용해야= 정치권에서 비판했던 주요 사건은 트위터에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에 대한 허위사실을 공표해 비방한 혐의(공직선거법 위반)로 불구속 기소된 시인 안도현(52·우석대 교수)씨에 대한 재판이었다. 배심원들이 만장일치로 무죄평결을 내리자 정치권은 곧바로 "야권 지지층이 강한 지역에서 재판이 이뤄져 공정하지 못했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그같은 지적에는 충분한 보완책이 있다. 형사소송법은 사건의 공평성을 유지하기 어려워질 수 있는 사건에 대해 검찰의 청구로 가장 가까운 상급법원으로 관할이전을 신청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공평성을 유지하기 어려운 사유에는 '지방의 민심'도 포함돼 있다. 실제 2011년 11월에는 광주지법 파산부 재판장 시절 법정관리 사건 대리인으로 고교 동창 변호사를 선임하도록 하고 동창 변호사로부터 얻은 정보를 이용해 투자 수익을 남긴 혐의(뇌물수수) 등으로 불구속 기소된 선재성 판사에 대한 항소심을 "광주지역에서는 공정한 재판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검찰의 요구로 서울고법에서 재판한 사례가 있다(2011초기555). 또 배심원 선정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면 검찰과 피고인이 모두 기피신청을 할 수 있다. 배심원이 9명이면 5명, 7명이면 4명까지 아무런 이유를 제시하지 않고도 기피신청을 할 수 있다. 재판의 공정성이 우려될 때는 전원을 바꿔달라고 요구할 수도 있다. 서울지역의 한 판사는 "미국에서는 공판 내용 못지 않게 배심원 선정 과정도 심혈을 기울이는데, 우리나라는 아직 배심원 선정 절차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특정 사건으로 본질 왜곡…'감성재판' 지적은 부당
항소도 가능해 '배심원 오류' 바로 잡을 수 있어
미숙한 제도운영·저조한 배심원 출석률 극복해야
국민사법참여위원회가 마련한 '가중 다수결제'도 신중한 재판을 하기 위한 제도다. 현행 제도상으로는 다수결로 무죄 평결을 내리지만, 국민사법참여위원회 안은 배심원 4분의 3이상의 찬성을 의결 정족수로 정했다. 의결정족수가 부족하면 평결이 성립하지 않아 법관이 독자적으로 판단할 수 있게 된다. 일부 혐의에 대해 배심원 의견이 5:4로 엇갈리면서 무죄가 나와 도마 위에 올랐던 '나꼼수' 사건도 가중 다수결제도가 도입되면 평결이 성립하지 않는다. 이밖에 △배심원 평결이 법리에 맞지 않으면 법관이 이유를 기재하고 평결에 따르지 않을 수 있도록 하는 점 △배심원 평결이 만장일치가 되지 않으면 법관이 배심원들을 상대로 사안에 대한 설명을 할 수 있는 점 △1심 참여재판에서 배심원 평결에 따라 무죄판결이 나면 검찰이 항소를 못하는 미국과 달리 우리나라는 항소가 가능하도록 한 점 등도 '배심원의 오류'를 바로잡을 수 있는 장치들이다.
◇법조계·법학계, 참여재판 본질 훼손 우려 목소리= 최근 참여재판에 대한 비판이 일자 법원행정처 관계자는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는 비판이 아니라 특정 사안에 대해 재판이 공정하지 못했다고 비난하는 것은 그 사건에 참여해 양심적으로 판단한 배심원들을 모독하는 것일 뿐 아니라 참여재판의 본질을 훼손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국민참여재판의 최종 형태가 의결돼 입법을 앞둔 시점에서 최종 판결도 아닌 몇몇 사례를 들어 참여재판을 왜곡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서울의 다른 판사는 "배심원과 법관의 견해가 어긋나는 비율이 7.5%정도인데, 이 비율이 높다고 비판한다면 법관과 배심원 의견이 만장일치가 되길 바라는 셈"이라며 "배심원 평결과 법관의 판단이 항상 일치하면 국민참여재판을 도입할 필요가 없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또다른 부장판사는 "참여재판에서 변호인들은 배심원을 설득하는 기술에 대한 연구를 많이 하는 반면, 공판검사들은 이 부분에 대한 적응력이 떨어지는 것으로 보이는데, 검사의 역량을 키울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지난해 우리나라를 방문했던 존 리(44·John Z. Lee, 한국명 이지훈) 미국 일리노이주 북부지구 연방지방법원 판사는 "배심원을 상대해 보지 않은 많은 사람들은 배심원들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배심원들과 일할수록 그들이 얼마나 현명한지를 느끼게 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법관과 배심원들의 의견 불일치의 원인이 배심원들이 현명하지 못하거나 법리에 무지하기 때문이 아니라 있을 수 있는 견해 차에 기인한 것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학계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다. 국민사법참여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신동운 서울대 로스쿨 교수는 "재판의 신뢰성에 대해 지적을 받아 시민의 의견을 들어보겠다며 출발한 게 참여재판인데, 참여재판이 감성재판이라는 지적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종전 공판에서는 '장외변론'이 가능하다는 의혹을 받고 전관예우 논란이 생길 수 밖에 없었다"며 "시민이 재판과정을 직접 지켜본다는 의미에서 국민참여재판은 국민의 목소리를 전달하고 사법부가 공정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제도"라고 말했다. 하태훈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일정 사건에 대해 참여재판 적용을 배제해야 한다는 정치권의 주장에 대해 "일부 사건에만 적용하자는 거라면 그 사건은 어떻게 정할 것인가, 매번 자의적인 기준으로 정할 것이냐"라고 반문했다.
◇연일개정과 배심원후보 저조한 출석률은 극복해야할 과제= 하지만 보완해야 할 점도 적지 않다. '연일 개정'은 배심원들의 판단과 직결된다. 대부분의 참여재판이 '당일선고'를 하다보니 재판이 길어지고, 배심원들과 재판 당자사 모두 체력적으로 지친 상태에서 밤늦은 시간에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기 힘들다는 문제가 생긴다. 재판 과정에서 제기된 다양한 쟁점에 대해 배심원들이 판단할 여유가 그만큼 없게 된다. 대법원 관계자는 "지금까지는 주로 쟁점이 단순한 강력범죄를 위주로 참여재판이 진행됐기 때문에 당일 선고를 했지만, 횡령이나 배임 등 쟁점이 다양하고 깊이 있는 심리가 필요한 사건에서는 연일개정을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연일개정은 예산과 배심원 참여율 등 현실적인 문제가 걸림돌이다.
배심원들 출석률이 낮은 것도 극복해야 할 과제다. 법원행정처가 밝힌 통계에 따르면 참여재판이 실시된 2008년 1월부터 지난 9월까지 배심원으로 소환통보를 받은 사람은 11만 2897명이다. 그 중 실제 출석한 사람은 27.7%인 3만 1352명에 불과했다. 법원행정처 관계자는 "송달이 안되거나 제척사유가 있어서 배심원 적격이 있는 사람을 제외한 '실질 출석률'을 따지면 50%에 가깝게 돼 그렇게 낮은 편은 아니다"라면서도 "앞으로 배심원 기피제도가 활발하게 활용된다면 더 많은 배심원을 소환할 필요가 있고, 예산이 그만큼 필요하게 되는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좌영길·홍세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