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소는 이번에 한정위헌청구를 원칙적으로 허용하는 결정을 내림에 따라 청구인이 헌법소원 청구 단계에서 구체적으로 법률의 어떤 점이 자신의 기본권을 침해하는지 주장할 수 있어 헌법재판이 효율적으로 진행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는 헌재가 그동안 간헐적으로 한정위헌결정을 해오던 소극적인 태도를 버리고 앞으로는 법원과의 관계를 의식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한정위헌 결정을 활용하겠다는 의지를 표명으로 풀이된다.
지난달 27일 이강국 소장을 비롯한 헌법재판관들이 선고를 내리고 있다. 이번 결정에는 퇴임 전에 한정위헌 청구 허용 문제를 정리하겠다는 이 소장의 의중이 강하게 작용한 것으로 전해졌다.
◇헌법소원 신청 범위 넓어질 듯=특정 법률에 대해 '~라고 해석하는 한 헌법에 위반된다'라고 주장하는 한정위헌 취지의 헌법소원이 가능해지면 헌법소원 청구인은 굳이 법률조문 전체가 위헌이라는 주장을 하지 않고도 헌법소원이나 위헌법률심판 제청신청을 할 수 있게 된다.
이번에 문제가 된 수뢰죄에서의 준공무원 처벌조문 한정위헌 결정에서도 헌법소원을 낸 당사자는 '형법상 수뢰죄로 처벌되는 공무원에 직업공무원이 아닌 지방자치단체 산하의 심의위원이 포함된다고 해석하는 한 헌법에 위반된다'며 한정위헌을 선언해 달라고 청구했다. 청구인 입장에서는 수뢰죄 처벌조항 자체를 위헌이라고 주장하는 헌법소원을 내는 것보다 부담이 훨씬 덜해진 셈이다.
법원에서는 "법원이 재판의 전제가 되는 법률에 대한 한정위헌결정의 기속력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권리구제 측면에서 큰 의미는 없다"는 시각도 있다.
이에 대해 전상현 헌법연구관은 "그동안 법규정이 어떻게 자신의 기본권을 침해하는지 구체적으로 주장한 사건이 오히려 막연하게 어떤 법조항은 위헌이라고 주장한 사건보다 각하될 위험성이 높았는데, 한정위헌청구를 원칙적으로 허용함으로써 그런 모순점을 시정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한정위헌청구는 법원의 재판과 관련이 없는 사건에서 효력을 발휘할 가능성이 있다. 대법원은 법원의 재판과 관련이 없는 사건에 대한 한정위헌 결정은 크게 문제삼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헌재가 지난해 11월 경력법관제가 도입되기 전에 사법연수원에 입소한 연수생들(42기)에게 법관 즉시임용 기회를 주지 않은 것은 위헌이라는 법원조직법 부칙에 대한 한정위헌 결정(2011헌마786·2012헌마188 병합)은 재판과 무관하기 때문에 상황이 조금 다르다는 게 법원의 설명이다.
대법원 관계자는 "대법원이 한정위헌의 기속력을 인정하지 못한다는 것은 재판에 적용되는 법규범의 해석과 관련된 것"이라며 "42기 임용문제는 법원조직법 부칙에 관한 것으로 재판규범이 아니기 때문에 기속력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과는 측면이 다르다"고 설명했다.
즉 헌재의 한정위헌 결정에 따른다 해도 대법원 판례에 어긋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사법연수원 42기 법관 즉시 임용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사례는 한정위헌신청 사건은 아니었지만, 이처럼 법원의 재판과 관련이 없는 사건에서 한정위헌신청은 인용될 경우 좀 더 직접적 구제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번 결정의 배경은= 한 헌법연구관은 "이번 결정은 갑자기 나오게 된 게 아니라 4기 헌재가 원래 한정위헌청구가 원칙적으로 허용되지 않는다는 입장에 대해 회의적이었고, 이강국 소장 퇴임을 앞두고 이 문제를 정리를 하는 의미에서 선례를 변경하게 된 것"이라고 밝혔다.
실제로 대다수의 헌재 관계자들은 헌재가 한정위헌 결정을 꾸준히 내리면서 한편으로는 한정위헌청구를 받아줄 수 없다는 선례를 남긴 데 대해 비판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전했다. 다른 헌법연구관은 "한정위헌청구가 금지된다는 어떤 명문규정도 없음에도 그동안 헌재가 헌법소원의 대상에서 법원의 재판을 제외하고 있는 헌법재판소법 규정을 의식해 지나치게 조심스러운 선례를 만들었다"며 "이번 결정은 한정위헌결정을 내리는 헌재 입장에서 당연한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이번 결정에서 한정위헌 신청이 허용되서는 안 된다는 반대의견을 낸 3명의 재판관은 모두 법원 출신의 신임 재판관이라는 점이 눈길을 끌었다. 이진성·김창종·강일원 재판관은 "한정위헌청구를 원칙적으로 적법하다고 해서 받아들이더라도 심판의 대상범위를 '법원의 해석'으로 한정한 것은 규범통제제도로써 헌법재판의 특성에 부합하지 않고, 합헌 또는 단순위한결정을 하게 될 경우 심판대상이 달라지는 문제점이 있으며, 결국 법원의 재판을 심판대상으로 하는 것이므로 허용될 수 없다"는 의견을 냈다.
익명을 요구한 헌재 관계자는 "법원에서 처음 온 재판관들은 아무래도 한정위헌에 대해 조심스러워하는 면이 있는데, 헌법재판을 거듭해서 하다보면 생각이 달라질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한정위헌 관련 법원 사건, 어떤 게 있나= 가장 주목 받는 사건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와 관련한 형사사건으로 피고인들이 재심을 신청한지 벌써 1년이 지났다.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기소돼 벌금형을 받은 김기백(60)씨는 지난해 1월 10일 서울고법에 재심을 청구했지만, 담당 재판부인 형사6부(재판장 이태종 부장판사)는 아직까지 재심개시 여부에 대한 판단을 미루고 있다(2012재노2). 헌재는 2011년 12월 트위터를 비롯한 SNS를 이용한 사전선거운동을 금지한 공직선거법 조항에 한정위헌 결정을 내렸다(2007헌마718).
지에스(GS)칼텍스에 대한 707억원대 법인세 부과처분 행정소송 재심사건도 마찬가지다. GS칼텍스가 지난해 6월 22일 청구한 재심사건은 서울고법 행정11부(김의환 부장판사)에 배정됐지만 반년이 넘도록 결정이 내려지지 않고 있다(2012재누110). 헌재는 같은해 5월 부과처분의 근거가 된 구 조세감면규제법 부칙 제23조에 대해 한정위헌 결정을 내렸다(2009헌바123).
법원의 재판과 관련이 없는 법원조직법 한정위헌 사건에서는 당사자들의 권리구제 시기가 문제되고 있다.
이미 대법원은 사법연수원 42기를 포함한 100명의 로클럭(재판연구원) 선발을 마치고 지난해 11월 28일 합격 통보를 했다. 로클럭 채용 계약이 2월 중에 진행된다는 점과 군법무관 출신 법관 임명이 4월에 진행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늦어도 1월 중에는 임용 방안이 나와야 한다는 지적이다.
다만 이러한 방안이 나오면 한동안 혼란은 불가피할 전망이다. 법관임용이 안 될 것으로 알고 로클럭이나 검사 등 다른 진로를 택한 사법연수원생들이 법관 임용에 지원할 경우 연쇄 이동 사태가 벌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 사법연수원 42기 출신 법관 선발 인원에 따라 경력법관 선발자와 군법무관 출신 법관임용 수는 그만큼 줄어들게 된다.
<좌영길·이환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