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이 주주대표소송에서 패소한데 따른 배상액을 글로비스지분으로 전액 변제했다. 1심 판결 선고후 1주일만에 이뤄진 전격적인 조치다. 이에따라 이번 정 회장의 배상액변제가 소송을 제기한 소액주주들의 항소여부 등에 영향을 미칠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현대차는 지난 4일 정 회장이 글로비스주식 63만6,784주를 주주대표소송 변제용으로 현대차에 양도했다고 공시했다. 총 금액은 866억원. 지난달 25일 1심 재판부였던 서울중앙지법 민사21부(재판장 여훈구 부장판사)가 정 회장이 현대차에게 배상해야할 손해배상금이라고 선고(2008가합47881) 한 826억에 지연이자 등을 모두 더한 금액이다. 1심 배상액을 모두 배상함에 따라 정 회장은 앞으로 항소심이 진행되더라도 더 이상의 지연이자 등은 물 필요가 없게 됐다.
정 회장이 판결선고 1주일만에 전격적으로 1심 배상액을 모두 변제함에 따라 경제개혁연대 등 소송을 제기했던 소액주주들의 향후 행보에도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특히 정 회장이 배상액으로 변제한 금원이 모두 1심 법정공방에서 핵심쟁점이었던 글로비스주식이라는 점에서 여러 해석이 나오고 있다.
소액주주들은 1심에서 △정 회장이 글로비스 등 일부 계열사에 물량 몰아주기 방식으로 부당지원행위를 했다(계열사 부당지원행위)는 주장 외에도 △글로비스 설립과정에서 현대차가 글로비스지분을 인수하지 못하도록 기회를 탈취(이른바 '회사의 사업기회 유용 주장')해 현대차에 손해를 입혔다고 주장했다. 정 회장이 물어야 할 손해배상액이라고 주장한 금액도 계열사 부당지원행위와 관련해서는 975억원이었던 반면 글로비스 설립 지분인수기회 탈취부분에서는 10배가 넘는 1조원에 달했다.
하지만, 1심 재판부는 정 회장의 계열사 부당지원행위에 대한 책임만을 물어 826억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사업기회유용 주장에 대해서는 "우리 상법상 이사의 충실의무 위반사례로서 사업기회 유용금지가 적용되기 위해서는 그 사업의 기회가 회사에게 현존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사업기회이고 회사가 그 사업을 추진할 상당한 개연성이 있어 이사가 회사로 하여금 그 사업을 추진하게 해야 할 충실의무를 부담한다는 점이 인정돼야 한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현대차 실무진이 물류전문회사인 글로비스를 설립하는 업무에 참여하긴 했지만 다른 현대차그룹 계열사의 임·직원들도 참여해 설립을 추진했을 뿐만 아니라 애초부터 글로비스를 현대차그룹의 계열사로 설립하기 위해 논의한 것이지 현대차의 자회사로 삼겠다는 내용은 없었다는 것이다. 또 글로비스의 물류업무가 현대차 생산업무와 관련성이 있다는 등의 점만으로는 글로비스설립이 현대차에 현존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사업기회라고 볼 수 없어 정 회장이 현대차로 하여금 글로비스의 지분을 인수토록 해야할 충실의무를 부담한다고 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중견로펌의 한 변호사는 "(정 회장 입장에서) 1심 재판결과가 썩 만족스럽지는 못하더라도 그 정도면 선방한 것으로 볼 수 있지 않겠느냐"며 "법원의 판결을 충실히 따르는 모습을 보여줘 소송을 조기에 마무리하려는 의도가 아닐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변호사는 정 회장이 글로비스 주식으로 배상액을 변제한 것과 관련해서는 "1심이 인정한 손해배상액을 완제하는 것은 물론 항소심에서 사업기회의 유용문제가 또다시 쟁점으로 떠오르더라도 이번 배상액 변제를 통해 현대차가 사업기회를 사실상 일정부분 만회한 점을 강조하기 위함인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현대차는 이번 주주총회에서 정 회장을 사내이사로 재선임하는 안건을 상정하고 있지만 좋은기업지배구조연구소(CGCG)등 일부 소액주주들은 "정 회장이 현대차와 대규모 거래를 꾸준히 하는 현대모비스 및 글로비스의 지배주주여서 이해관계가 충돌하며 이사로서 충실의무와 선관주의의무를 위반해 회사에 손해를 끼친 의사결정을 해왔다"며 재선임을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대해 원고측인 경제개혁연대는 항소여부에 대해 '정 회장 측의 전향적인 태도변화가 없는 한 항소할 것'이라는 기본적인 입장을 유지하면서도 '협의 여지가 남아 있다'며 신중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경제개혁연대 관계자는 "1심 재판부가 정 회장의 계열사 부당지원행위에 대해 위법성을 인정한 것은 환영할 일이지만 글로비스를 통한 사업기회유용은 인용하지 않아 실망스럽다"며 "현대차그룹의 기업지배구조를 감안한다면 글로비스설립은 현대차의 사업기회로 봐야 하는 만큼 항소를 통해 이 부분에 대한 판단을 다시 받아봐야 한다는 기본입장에는 변함이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 관계자는 "지난 현대차(우주항공·현대강관 관련) 주주대표소송에서 봤듯이 현대차가 원고측과의 대화창구를 열어두고 있기 때문에 이번 1심 판결내용 및 향후 행보에 대해서도 협의기회가 있을 것"이라며 "아직까지 현대차그룹이 정 회장의 배상액 변제에 대한 경위나 앞으로의 계획 등에 대해 밝혀 오진 않았지만 앞으로 협의기회가 있다면 성실히 임할 것이다. 아직 항소여부에 대해 결정된 것은 없으며 신중하게 논의중이다"고 말해 합의 가능성도 있음을 시사했다.
앞서 1심 재판부는 당초 21일로 예정됐던 선고기일을 한 차례 연기해 최종선고 전 양측이 협의를 통해 사건을 풀 수 있도록 조정기일을 열었지만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었다. 1심 판결에 대한 항소기간은 판결문이 송달된 날로부터 2주 이내다. 1심 재판부는 판결선고 당일인 지난달 25일 판결문 정본을 원·피고측 대리인들에게 모두 송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