펀드에 출자한 그룹 계열사 자금 465억원을 빼돌린 혐의(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횡령)로 기소돼 재판을 받고 있는 최태원(52) SK그룹 회장이 김원홍(53) 전 SK해운 고문에게 사기를 당했다고 주장했다.
22일 서울고법 형사4부(재판장 문용선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항소심(2013노536) 공판에서 최 회장은 "경제나 정치 분야에 정통한 김원홍을 믿고 거의 모든 개인 재산을 맡겼는데 6000억원을 사기당했다"며 "SK계열사 펀드를 조성하고 돈을 건넨 것도 김씨의 종용에 의한 것"이라고 말했다.
최 회장은 애초 1심에선 펀드 조성에 대해 몰랐다고 하다가 항소심에서 "그룹 차원의 전략적 펀드 조성을 위해 추진한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날 다시 "김원홍의 요구 때문"이라고 말을 바꾼 셈이다.
최 회장의 법정 진술에 따르면, 그는 1998년 손길승 전 회장으로부터 무속인 출신으로 알려진 김원홍씨를 소개받았다. 이어 2005년부터 선물옵션 투자금 명목으로 개인 재산 6000억원을 김씨에게 맡겼고 지금까지 돌려받지 못했다고 했다.
최 회장은 다만 김씨의 요구에 펀드 조성을 지시했지만, 계열사 돈이 김씨에게 송금된 사실은 몰랐다는 기존 입장을 유지했다. 이공현 변호사는 "결국 횡령 혐의를 부인하는 것이지만 피고인은 법적 책임이 엄중하다는 점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 공판에서 제시된 김원홍과의 대화내용 녹음 파일 증거 신청을 철회하며 "실타래를 풀자고 최 회장을 설득했다"고 말했다.
이 변호사는 "2012년 6월 이후 최 회장과 김원홍의 관계는 단절됐다"며 "김씨를 사기죄로 형사 고소하고 투자금 반환소송을 내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문 부장판사 "김원홍과의 관계가 사건 정황에 중요하긴 하지만 공소사실 자체와 연관이 없는 얘기"라며 "펀드 출자금 선지급 과정 경위를 몰랐다는 피고인의 진술 내용이 거짓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재판장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고 말했다.
이날 문 부장판사가 4시간 가량 이어진 공판 과정을 대부분 재판부 직권 심리에 쓰면서 검찰이나 변호인 측의 신문이 상대적으로 부족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날 검찰이 최태원 회장에게 펀드 관리 수수료 관련해 질문을 하는 도중 문 부장판사는 "검사 그만합시다. 별로 중요한 부분이 아닌데 그런 얘기는 나중에 합시다"라며 재차 질문을 막았다. 최재원 부회장 변호인에게는 "변호인이 사태 파악을 못한다"며 핀잔을 주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