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기관이 기업과 짜고 허위로 대출계약을 체결했다면 금융기관의 파산관재인은 기업에 대출금 상환을 청구할 수 없다는 판결이 나왔다. 이는 파산관재인을 금융기관이 기업과 통모(通謀)하는 데 관여하지 않은 '선의의 제3자'로 판단해 대출금 상환을 인정한 대법원 판결과 배치되는 것이어서 대법원의 최종 판단이 주목된다.
서울중앙지법 민사10부(재판장 강인철 부장판사)는 최근 A저축은행 파산관재인인 예금보험공사가 대여금의 명의를 빌려줬던 B사 등을 상대로 낸 대여금반환 청구소송(2013가합540780)에서 원고패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대출 약정과 관련된 서류들이 작성되긴 했지만, 이 대출은 A저축은행 경영진의 조직적이고 치밀한 범죄에 의해 이뤄진 (통정허위표시에 의한) 허위대출로 보인다"며 "실제로 대출 이자를 지급한 곳도 B사가 아닌 A저축은행이고, B사가 대출 관련 서류에 날인함으로써 어떠한 이득을 취득한 것이 없어 대출약정이 체결됐다고 인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A저축은행은 대출 약정이 통정허위표시에 해당하더라도 파산관재인은 실질적으로 새로운 법률상 이해관계를 가지는 제3자로서 선의이므로 대출약정이 유효하다고 주장하지만, 파산관재인을 저축은행에 대비해 특별히 보호할 실익은 없어 보인다"며 "오히려 만일 보호하게 된다면 심히 형평과 정의에 반하는 결과가 초래된다고 판단되는 점 등을 고려하면 파산관재인이 B사에 대출금의 지급을 청구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A저축은행은 2010년 4월 B사에 80억원을 대출해주는 계약을 체결한 뒤 이자와 원금 등 120억원을 받지 못했다고 주장하며 B사를 상대로 "10억원을 우선 지급하라"는 소송을 냈다. B사는 "A저축은행이 금융감독원 감사에 대비할 수 있도록 명의만 빌려달라고 부탁해 들어준 것으로 실제로 대출한 것은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A저축은행은 판결에 불복해 최근 항소했다.
대법원은 그동안 명의만 빌려주는 대출약정이 채무 부담의 의사 없이 형식적으로 이뤄진 것에 불과해 민법이 규정하고 있는 통정허위표시에 해당하는 무효의 법률행위라고 판단하면서도, 파산관재인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통정허위표시를 이유로 무효를 주장할 수 없다고 판결해 왔다.
법조계에서는 "파산관재인은 파산자의 재무상태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사람인데 새로운 법률관계가 형성됐다는 이유로 선의의 제3자로 보호한다면 채무자에게 너무 가혹하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지난 2008년에도 서울고법은 파산관재인이 채무자를 상대로 낸 대여금반환 청구소송(2005나64530)에서 "파산재산의 처분권이 파산관재인에게 이전됐더라도 권리·의무의 주체는 여전히 파산자 본인이어서 새로운 법률관계가 형성됐다고 보기는 어렵다"며 원고패소 판결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파산관재인을 '선의의 제3자'로 인정해 대출금을 반환해야 한다면서 이 판결을 파기하고 서울고법으로 되돌려 보냈다. 법원 관계자는 "파산관재인이 파산자의 사정을 자세히 알고 있어 선의의 제3자로 인정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파산관재인은 파산자의 채권자를 위해 일하기도 하는 만큼 채권자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선의를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사정이 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