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률신문이 창간50주년 기념으로 연재하고 있는 '법조야사'(법률신문 4월12일자 3면)에서 '공포된 적이 없는 위헌적인 법률'이라고 지적했던 '국방경비법'에 대해 헌법재판소가 지난달 26일 "국방경비법은 폐지될 때까지 아무런 의심없이 국민들에 의해 유효한 법률로 취급받았다"며 합헌 결정을 내려 관심을 끈다.
헌법재판소 전원재판부(주심 김효종·金曉鍾 재판관)는 지난달 26일 "국방경비법은 군정장관이 직권에 의해 '법령'으로 제정한 것이거나, '조선경비청에 대한 규정'을 개정하는 '기타 법규'로서 군정청관보에의 게재가 아닌 다른 방법에 의해 공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며 합헌결정을 내렸다.(99헌바36)
재판부는 또 "미군정기의 법령체계·제정·공포방식이 과도기적이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법령 기타 법규'의 형식을 가진 법령이 반드시 '법률'보다 하위의 규범이라 할 수 없고 공포방식도 정형화돼 있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재판부는 특히 "국방경비법 일부 조항은 48년 7월 이전부터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며 "폐지될 때까지 아무런 의심없이 국민들에 의해 유효한 법률로 취급받는 등 국민들과 법제정당국 및 법집행당국에 의해 실질적으로 규범력을 갖춘 법률로 승인됐다"고 밝혔다.
이로써 48년 7월5일 공포된 것으로 되어 있는 국방경비법을 둘러싼 위헌시비는 공포 후 52년여가 지나서야 비로소 일단락됐다.
김선명씨(76) 등 3명은 국방경비법 위반죄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95년 8·15 때 가석방된 후 "국방경비법은 공포된 일이 없는 무효 또는 부존재의 법률이므로 이에 근거한 수감은 법률상 근거 없는 불법행위"라며 서울지법에 손해배상청구 소송과 함께 위헌제청신청을 냈으나 99년 4월 기각당하자 이 사건 위헌소원을 냈었다.
국방경비법은 48년 7월5일 공포돼 8월4일부터 효력이 발생, 62년1월20일 폐지될 때까지 해안경비법과 함께 '간첩 잡는 법'으로 통했다. 이후 반공법과 국가보안법이 이 법을 대체할 때까지 무려 16만∼20만건 정도의 간첩사건 연루자가 이 법에 의해 처벌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법령체계나 사회가 극도로 혼란했던 해방직후 군정기에 제정됐던 국방경비법은 군정청 법령집에 공포날짜와 발효일자만 실려 있을 뿐 공포번호는 없다. 또 이 법이 실제 공포된 관보나 제정경위에 관한 직접적인 자료도 현재로서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해 유현석(柳鉉錫) 변호사(73)는 법률신문 법조야사에서 "국방경비법은 48년 7월5일 공포, 8월4일 발효, 법률호수 미상이라고 되어 있지만 남조선과도정부법령 209호가 48년 7월3일 공포됐고 동결재산해제와 관련한 210호가 48년 7월12일 공포됐으므로, 3일과 12일 사이인 5일 공포된 것으로 돼 있는 국방경비법은 사실상 공포된 적이 없는 유령법률"이라고 지적했다.
이 보도가 나간 후 "공포되지 않았다는 근거 문서나 서류가 있느냐"는 일부 독자들의 질문에 대해 柳 변호사는 "특별한 근거 서류는 없다. 하지만 법령이 언제 공포되고 공포번호가 몇 번인지에 대한 증명은 정부가 할 일이지 국민이 할 일이 아니다"며 "법령을 공포한 미군정이 이에 대한 증명을 하지 못하고 공포번호를 미상으로 처리한 것은 공포한 적이 없기 때문"이라며 다시 한 번 국방경비법의 위헌성을 지적하기도 했었다.
이 사건의 당사자 중 한사람인 김씨는 6·25가 한창이던 51년 10월15일 인민군 정찰대원으로 근무 중 철원에서 유엔군에 체포됐다.
김씨는 53년 7월25일 중앙고등군법회의에서 국방경비법 위반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뒤 95년 8·15 때 형집행정지로 풀려나기까지 무려 43년 10개월 동안이나 수감생활을 해 '세계 최장기수'라는 기록을 갖고 있기도 하다.
김씨는 지난해 9월, 61명의 비전향장기수와 함께 북한으로 송환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