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들어가는 말
대상판결은 피상속인의 자녀가 전부 상속포기를 한 경우에 손자녀가 상속인이 된다는 점을 인정하고, 피상속인의 손자녀(미성년자)에 대한 상속채권자의 채무이행청구를 인용하였다. 다만 피상속인의 자녀(상속인의 친권자)는 자신이 상속포기를 함으로써 자신의 자녀들이 상속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상속의 승인, 포기를 위한 기간이 도과하지 않아서 이 판결의 선고 이후 상속포기를 할 수 있다고 보았다. 아래에서는 평석에 필요한 범위에서 사실관계와 판결이유를 소개한 후 대상판결의 법리를 검토해 본다.
II. 사실관계
피상속인 갑은 2010. 8. 6. 사망하였는데, X(원고)에 대하여 6억 원의 차용금 채무가 있었다. 갑의 유족으로는 배우자인 을(남편)과 자녀 병, 정이 있었는데, 병과 정은 상속포기신고를 하여 수리되었다(2010. 11. 19.). 배우자 을은 상속포기신고를 하지 않았다(을은 갑의 X에 대한 채무의 연대보증인이다). 그러자 X는 병의 자녀 A, B와 정의 자녀 C(A, B, C는 모두 미성년자임)를 상대로 대여금의 지급을 청구하는 소를 제기하여 각각 2011. 8. 18. 과 2011. 9. 26. 소장 부본이 송달되었다.
제1심과 원심, 대법원은 모두 피상속인 갑의 차용금 채무가 손자녀인 A, B, C에게 상속되었다고 보고, X의 청구를 인용하였다.
III. 판결이유
상속을 포기한 자는 상속이 개시된 때부터 상속인이 아니었던 것과 같은 지위에 놓이게 되므로, 피상속인의 배우자와 자녀 중 자녀 전부가 상속을 포기한 경우에는 배우자와 피상속인의 손자녀가 공동으로 상속인이 된다.
따라서 이 사건에서는 피상속인 갑의 자녀 병, 정이 상속을 포기한 이상, 갑의 손자녀인 피고들(A, B, C)은 배우자 을과 공동으로 갑의 재산(채무)을 상속하게 된다.
다만 상속인은 상속개시 있음을 안 날로부터 3월내에 상속포기를 할 수 있고(민법 제1019조 제1항), 상속개시 있음을 안 날이란 상속개시의 원인이 되는 사실의 발생을 알고 이로써 자기가 상속인이 되었음을 안 날을 의미하지만, 종국적으로 상속인이 누구인지를 가리는 과정에서 법률상 어려운 문제가 있어 상속개시의 원인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는 바로 자신이 상속인이 된 사실까지 알기 어려운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에는 자신이 상속인이 된 사실까지 알아야 상속이 개시되었음을 알았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피상속인의 배우자와 자녀 중 자녀 전부가 상속을 포기한 때에는 피상속인의 손자녀가 배우자와 공동으로 상속인이 된다는 것은 상속의 순위에 관한 민법 제1000조, 배우자의 상속순위에 관한 민법 제1003조, 상속포기의 효과에 관한 민법 제1042조 등의 규정을 종합적으로 해석하여 비로소 도출되는 것이지 이에 관한 명시적 규정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므로, 일반인의 입장에서 피상속인의 자녀가 상속을 포기하는 경우 자신들의 자녀인 피상속인의 손자녀가 피상속인의 배우자와 공동으로 상속인이 된다는 사실까지 안다는 것은 오히려 이례에 속한다.
이 사건에서 피고들은 피상속인의 손자녀로서 위와 같은 과정을 거쳐 상속인이 되었으므로, 피고들의 친권자인 병, 정으로서는 자신들의 상속포기사실 등 피고들에 대한 상속개시의 원인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는 피고들이 상속인이 된다는 사실까지 알기 어려운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라고 봄이 상당하다. 나아가 상속포기로써 채무상속을 면하고자 하는 사람이 그 채무가 고스란히 그들의 자녀에게 상속될 것임을 알면서도 이를 방치하지는 않았으리라고 봄이 경험칙에 부합하는 점, 실제로 병, 정은 피고들이 상속인이 아니라고 일관되게 다투면서 이 사건 항소 및 상고에 이른 점 등을 고려하면, 피고들의 친권자는 적어도 이 판결이 선고되기 전에는 피고들이 상속인이 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고 인정할 여지가 충분하고, 그 경우 피고들에 대하여는 아직 민법 제1019조 제1항에서 정한 기간이 도과되지 아니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피고들이 이를 이유로 상속포기를 한 다음 청구이의의 소를 제기함은 별론으로 하고, 위와 같은 사정만으로는 원고의 피고들에 대한 청구를 배척할 사유가 되지 아니한다.
IV. 평석
1. 피상속인의 자녀들이 모두 상속포기를 하는 경우 손자녀가 상속인이 되는가의 여부
민법상 제1순위 상속인은 피상속인의 직계비속이고, 직계비속 중에서는 촌수가 가까운 사람이 선순위로 상속인이 되므로, 피상속인에게 자녀와 손자녀가 있는 경우에는 자녀가 상속인이 된다. 그러나 자녀들이 전부 상속포기를 하는 경우에는 상속포기의 소급효에 따라서 처음부터 상속인이 아니었던 것으로 되므로, 손자녀가 제1순위 상속인 된다. 그러므로 피상속인 갑의 자녀인 병과 정이 상속을 포기한 경우에 갑의 손자녀인 A, B, C가 상속인이 된다는 해석은 현행법상 불가피하다.
2. 상속의 승인, 포기 기간의 도과 여부
자녀의 상속포기에 의해서 상속인이 된 손자녀도 역시 상속개시 있음을 안 날로부터 3월내에 상속포기를 하여 상속채무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 손자녀 A, B, C는 모두 미성년자이므로, 상속의 승인 또는 포기를 할 수 있는 3개월의 기간은 친권자인 병과 정이 A, B, C를 위하여 상속이 개시된 것을 안 날로부터 기산한다(민법 제1020조). 따라서 친권자인 병과 정은 상속개시의 사실(피상속인 갑의 사망)과 그로 인하여 A, B, C가 상속인이 되었음을 안 날로부터 3개월 내에 상속포기신고를 할 수 있게 된다. 여기서 친권자인 병과 정을 기준으로 "A, B, C가 상속인이 되었음을 안 때"가 언제인지를 확정하는 것이 중요한데, 대상판결에서는 이 판결이 선고된 때로 볼 수 있다고 한다. 즉 대법원에서 상속채무가 손자녀에게 승계되었음을 전제로 상속채권자의 청구를 인용하면, 그 때 비로소 친권자인 병과 정은 A, B, C가 피상속인 갑의 상속인이 되었음을 알게 된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친권자인 병과 정은 대법원 판결이 선고된 날부터 3개월 내에 A, B, C를 위하여 상속포기신고를 할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해석론은 미성년자인 A, B, C를 상속채무에서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와 유사한 사안을 다룬 이전의 판결(대판 2005.7.22, 2003다43681)과 비교해 보면 '상속개시 있음을 안 날'에 대한 대상판결의 태도는 종전의 법리를 다소 벗어난 것으로 생각된다. 위의 2003다43681 판결에서는 상속채권자가 피상속인의 처와 자녀들을 상대로 구상금청구소송을 제기하였다가 이들이 상속포기를 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피고를 피상속인의 손자녀로 정정하는 당사자표시정정신청을 하였는데, 대법원은 당사자표시정정에 의하여 자신들이 피고가 되었음을 알게 된 때에 피상속인의 손자녀들은 자신들이 상속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판단하였다(따라서 이날부터 3개월 내에 상속포기를 할 수 있다). 이러한 법리에 비추어 본다면 대상판결에서 있어서도 친권자인 병과 정은 A, B, C를 상대로 채무이행을 청구하는 소장 부본이 송달된 때에 이들이 상속인이 되었음을 알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대상판결에서는 이와 달리 친권자인 병과 정은 A, B, C가 상속인이 되었음을 알지 못한 것으로 인정하면서, 그 이유로 병과 정이 A, B, C는 상속인이 아니라고 일관되게 다투었다는 점을 들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설시는 상속인(또는 그의 친권자)의 주관적인 인식에 따라 '상속개시 있음을 안 날'의 기산일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피상속인의 자녀가 전부 상속을 포기한 경우에 손자녀가 상속인이 된다는 해석론이 이미 판례로 확립되어 있다는 점에 비추어 보면, 적어도 논리적으로는 A, B, C를 피고로 한 소장 부본이 송달된 때에 친권자로서는 이들이 상속인이 되었음을 알았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된다. 이렇게 본다면 이 날로부터 3개월이 경과한 후에는 이미 단순승인으로 의제되어 더 이상 상속포기를 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결론은 미성년자의 복리를 심각하게 침해하는 것이므로, 대법원의 입장에서는 판결의 선고일부터 승인, 포기의 기간이 기산된다고 보아서 상속포기의 기회를 제공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판결의 취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나, 종전의 법리를 벗어나는 다소 무리한 해석론을 전개하였다는 지적을 받을 여지는 있다고 생각된다.
3. 다른 해석론의 가능성
친권자가 자신의 상속포기로 인하여 자녀들이 상속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자녀들을 위하여 상속포기를 하지 않아서 단순승인으로 의제되었다면, 이는 친권의 소극적 남용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상속채권자가 이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미성년자인 손자녀를 상대로 채무의 이행을 청구하는 것은 신의칙에 반하는 권리남용으로서 허용될 수 없다는 쪽으로 이론구성을 할 수 있는 여지도 있었다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