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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24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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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세·부담금
가집행선고 취소에 따른 가지급물 반환에 있어서 원천징수세액의 처리
Ⅰ. 서론 원천징수란 소득금액을 지급하는 자(원천징수의무자)가 그 상대방(원천납세의무자)으로부터 세액을 과세관청을 대신하여 징수하는 것을 말한다. 원천납세의무자는 국가에 대하여 조세법상의 법률관계를 갖지 않으나 원천징수를 받아들여야 하는 의무를 부담한다. 따라서 원천징수의무자가 소득금액을 지급하면서 원천징수세액을 공제한 나머지 금액을 지급하면 원천징수의무자의 원천납세의무자에 대한 채무는 모두 변제로 소멸한다(대법원 2001. 7. 10. 선고 2001다16449 판결). 원천납세의무자가 원천징수의무자로부터 지급받은 소득이 법률상 원인이 없는 것으로 확정된 경우 원천납세의무자의 부당이득반환의무 범위가 원천징수세액을 공제한 실제 수령금액인지, 원천징수세액을 포함한 전체 소득금액인지에 대한 다툼이 있다. 이는 잘못 징수·납부된 원천징수세액에 대한 환급청구권과도 관련된 문제다. Ⅱ. 원천징수와 부당이득 반환 1. 원천납세의무자의 부당이득반환의무 범위 원천납세의무자에게 지급된 소득이 법률상 원인이 없는 경우 그 반환은 근본적으로 부당이득 반환이다. 원천납세의무자는 실제로 지급받은 돈을 반환하면 되고 원천징수세액으로 공제된 돈에 대하여는 아무런 이득을 취득하지 않았으므로 반환의무가 없다. 이는 변제자가 채무자를 대위하여 채무자의 제3자에 대한 채무를 변제하였는데 그 채무가 존재하지 아니하여 대위변제가 성립하지 않은 경우 채무자에게 변제금원 반환의무가 없는 것과 같다. 대법원 2020. 4. 9. 선고 2018다290436 판결은 주식회사가 법률상 원인 없이 대표이사에게 특별성과급을 지급하면서 원천징수세액을 공제한 나머지를 지급하였다가 원천징수세액을 포함한 전액에 대한 부당이득반환청구를 한 사안에서 대표이사는 원천징수세액을 제외하고 실제 지급받은 돈을 부당이득으로 반환할 의무가 있다고 판시하였다. 2. 원천징수세액의 처리 가. 국가의 부당이득반환의무 원천징수의무자가 원천납세의무자로부터 원천징수대상이 아닌 소득에 대하여 세액을 징수·납부하였거나 징수하여야 할 세액을 초과하여 징수·납부하였다면 국가는 원천징수의무자로부터 이를 납부 받는 순간 아무런 법률상의 원인 없이 그 원천징수세액 상당의 부당이득을 보유하게 된다(대법원 2002. 11. 8. 선고 2001두8780 판결). 따라서 국가는 원천징수의무자에게 원천징수세액 상당의 돈을 부당이득으로 반환하여야 한다. 나. 환급청구권의 귀속 관계 국세기본법은 원천징수의무자가 원천징수하여 납부한 세액에서 환급받을 환급세액이 있는 경우 그 환급액은 그 원천징수의무자가 원천징수하여 납부하여야 할 세액에 충당하고 남은 금액을 환급하되 그 원천징수의무자가 그 환급액을 즉시 환급해 줄 것을 요구하는 경우나 원천징수하여 납부하여야 할 세액이 없는 경우에는 즉시 환급한다고 정하고(제51조 제5항) 환급금은 납세자에게 지급하여야 한다고 정하면서(제51조 제6항) '납세자'란 납세의무자와 세법에 따라 국세를 징수하여 납부할 의무를 지는 자를 말한다고 정하고 있다(제2조 제10호). 이에 따르면 잘못 징수·납부한 원천징수세액에 대한 환급청구권은 납세자인 원천징수의무자에게 귀속되고 원천납세의무자에게는 인정되지 않는다고 해석된다. 대법원도 원천징수의무자가 원천납세의무자로부터 잘못 징수·납부한 원천징수세액에 대한 환급청구권은 원천납세의무자가 아닌 원천징수의무자에게 귀속된다고 보고 있다(대법원 2002. 11. 8. 선고 2001두8780 판결). Ⅲ. 원천징수와 가지급물 반환 1. 대상판결: 대법원 2019. 5. 16. 선고 2015다35270 판결 가. 사안 지급자가 제1심의 가집행선고에 따라 임의로 지연손해금 100을 가지급하면서 원천징수세액 20(기타소득에 대한 원천징수세율 20%)을 공제한 나머지 80을 실제로 지급하였는데 상소심에서 지연손해금 70이 의무 없는 것으로 확정되고 그 부분에 대한 가집행선고가 취소됨에 따라 가지급물 반환범위가 문제된 사안이다. 나. 판시요지 가집행선고 판결에 따른 지연손해금의 현실적인 지급은 원천징수의무가 발생하는 소득금액의 지급에 해당하고 지급자가 가집행선고 판결에 따라 지연손해금을 실제로 지급하면서 공제한 원천징수세액도 가지급물에 포함된다. 2. 평석 가. 가지급물 지급과 원천징수의무 1) 대상판결의 판시요지 수급자가 가집행선고 판결에 의하여 지급자로부터 실제로 지연손해금에 상당하는 금전을 수령하였다면 비록 본안판결이 확정되지 않았더라도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소득세법상 기타소득의 실현가능성은 상당히 높은 정도로 성숙·확정된다고 해야 하므로 가집행선고 판결에 따른 지연손해금의 현실적인 지급은 원천징수의무가 발생하는 소득금액의 지급에 해당한다. 따라서 공제된 원천징수세액 20을 포함한 지연손해금 100이 가지급물이다. 2) 검토 가집행선고 판결에 따른 임의지급이라는 이유만으로 원천징수세액을 포함한 전체 소득금액을 실제로 지급하여야 하고 소득세액 징수는 본안판결 확정 후 다른 절차를 통해야 한다는 것은 원천징수세제에 어울리지 않는다. 대상판결의 판시가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이에 대하여는 판례평석이 공간되었고 실무상 대상판결의 적용에 의문이 없다. 나. 가집행선고의 취소에 따른 가지급물 반환과 원천징수세액 1) 가지급물 반환의 법적 성질 가집행선고에 따른 변제의 효력은 그 가집행선고가 취소되는 것을 해제조건으로 발생한다(대법원 1995. 12. 12. 선고 95다38127 판결). 따라서 가집행선고 판결에 따라 금원을 지급받았다가 그 가집행선고가 실효됨에 따라 금원의 수령자가 부담하게 되는 원상회복의무는 성질상 부당이득 반환채무다(대법원 2005. 1. 14. 선고 2001다81320 판결). 2) 대상판결에 따른 가지급물 반환방법 가지급물 액수가 100(= 실제로 지급된 소득 80 + 원천징수세액 20)이므로 이 금액에서 정당한 지연손해금 30(= 실제로 지급된 소득 중 정당한 24 + 납부된 원천징수세액 중 정당한 6)을 뺀 나머지 70이 가집행선고 취소에 따라 법률상 원인이 없게 되는데 이 70은 실제로 지급된 소득 56(= 80-24)과 과다하게 납부된 원천징수세액 14(=20-6)로 구성된다. 따라서 수급자가 실제로 지급받은 가지급물 중 56을, 국가가 원천징수세액으로 납부된 가지급물 중 14를 각 부당이득으로 반환해야 한다. 대상판결에서는 지급자가 원천징수세액 14를 국가로부터 환급받기로 하여 가지급물 반환신청에서 제외한 까닭에 이 부분 가지급물 반환주체에 관하여는 명시적인 판시가 없었다. 3) 검토 원천징수세액을 공제한 나머지만을 지급하더라도 전체 소득금액 지급채무에 대한 변제로 유효하고(대법원 2001. 7. 10. 선고2001다16449 판결) 이는 가집행선고에 따른 지급이라 하여 달리 볼 것이 아니다. 따라서 원천징수세액 20을 포함한 전체 소득금액이 지급된 것으로 봐야 한다. 이때 원천징수세액 20은 실제로 지급된 것이 아니라 지급된 것으로 인정될 뿐이므로 그 인정효과가 상실되었을 때 실제로 지급된 것과는 달리 취급된다. 대위변제가 성립하지 않은 경우 채무자가 아니라 변제금원을 수령한 제3자가 변제자에 대하여 부당이득 반환의무를 부담하는 것처럼(대법원 1990. 6. 8. 선고 89다카20481 판결) 가집행선고가 취소되어 가지급물 지급의 변제효과가 상실된 경우 원천징수세액을 실제로 수령한 국가가 부당이득반환의무를 부담하게 된다. 따라서 대상판결이 공제된 원천징수세액도 가지급물에 포함된다고 판시하였다고 하여 수급자에게 공제된 원천징수세액에 대하여도 가지급물 반환의무가 발생한다고 봐서는 안 된다. 대상판결은 원천징수세액 부분도 가지급물 지급의 효력이 있고 가집행선고 취소에 따른 가지급물 반환대상이 된다고 본 것이고 이를 종래의 대법원판결에 비추어보면 지급자에 대한 원천징수세액 상당의 가지급물 반환의무(세액환급의무)는 국가에게 있음을 전제한 것으로 해석된다. 대상판결이 별다른 설명 없이 "공제한 원천징수세액도 가지급물에 포함된다", "피고가 구하는 바에 따라"라고 설시한 까닭에 수급자의 가지급물 반환의무가 공제된 원천징수세액에까지 미치는 것으로 오해되고 있어 아쉽다. Ⅳ. 결론 수급자가 지급자로부터 지급받은 소득을 법률상 원인이 없는 부당이득으로 반환하여야 할 경우 원천징수세액을 공제한 실제 수령금액을 반환하면 되고 이는 가집행선고의 취소에 따른 가지급물 반환에 있어서도 같다. 대법원 2019. 5. 16. 선고 2015다35270 판결은 가집행선고 판결에 따른 수급자에 대한 실제 금원의 지급과 국가에 대한 원천징수세액의 납부가 모두 가지급물 지급에 해당하고 가집행선고 판결이 취소된 경우 가지급물 반환의무로 수급자는 실제로 받은 돈을, 국가는 납부된 원천징수세액을 지급자에게 반환(환급)해야 한다는 취지로 해석해야 한다. 이정훈 고법판사(서울고법)
원천징수세액
가지급물반환
가집행선고취소
이정훈 고법판사(서울고법)
2020-11-09
기업법무
형사일반
채용비리와 업무방해
I. 대상판례 회사의 직원을 채용함에 있어 피고인(상무이사 D) 외 3인의 면접위원(A·B·C)이 면접을 실시하였는데 A가 채점표를 제출하고 먼저 면접장소를 떠난 후 D가 면접점수와 무관하게 자신이 임의로 순위를 정한 명단을 B·C에 제시하여 이들의 동의를 받고 그에 따라 최종합격자를 결정하였으며 대표이사인 E도 이러한 채용을 양해한 사안에서 검사가 A 또는 E에 대한 업무방해죄로 기소하였는데, 대법원은 (i) 직원채용업무는 대표이사에 귀속되고 A의 업무는 '공정하고 객관적인 직원채용에 관한 업무'가 아니라 직원채용을 위한 '면접업무'이며 (ii) 채점표를 제출하고 면접장소를 이탈함으로써 A의 면접업무는 종료되었으므로 그 후 D가 합격자선정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더라도 A에게 오인·착각·부지(이하 '오인')를 일으켰다고 할 수 없고 (iii) 대표이사 E도 위와 같은 채용방식을 양해하였으므로 E에게 오인을 일으켰다고 할 수 없다고 하면서 무죄 취지로 판단하였다. II. 검토 1. 판례의 유죄법리 채용비리가 사회적 문제로 제기되었다. 종래 판례는 이를 업무방해죄로 의율하여 왔다. 그리하여 점수조작으로 필기시험에 합격시켜 면접시험에 응시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면접위원으로 하여금 응시자의 정당한 자격 유무에 관하여 오인을 일으키게 하는 위계로 면접업무의 적정성 또는 공정성을 저해하여 면접위원에 대한 업무방해죄가 성립하고(2009도8506) 특정인이 부정하게 포함된 사정안에 대해 심의·의결을 하게 하는 것은 교무위원들의 입학사정업무의 적정성이나 공정성을 방해한 것이라고 한다(2017도19499). 요컨대 심사(면접이나 사정)의 대상자나 심사자료의 내용에 조작이 있으면 이를 토대로 하는 심사위원에 대한 업무방해가 된다는 것이다. 비록 채용권한은 대표자에게 있고(2005도6404) 심사위원의 업무는 그로부터 위임된 업무이지만 이는 독립된 업무로서 대표자와의 관계에서도 타인의 업무에 해당하여 대표자의 지시에 의한 경우도 마찬가지라 한다(2017도19499, 2009도8506, 92도255). 2. 채용비리는 업무방해 문제인가 가. 엄격해석의 요청 이와 같이 우리 판례는 채용비리를 업무방해죄로 의율하고 있지만, 업무방해죄를 형법상 구성요건으로 규정한 입법례는 일본형법 정도가 발견되고 독일형법도 프랑스형법도 그러한 규정이 없다. 일본형법의 업무방해죄는 원래 노동쟁의를 대상으로 만들어졌었다. 우리 형법은 법문상 그러한 제한이 없지만 노동쟁의와 관련하여 업무방해죄를 적용한 사례가 많았는데 근자에 이르러 실무상 채용비리로 그 적용범위가 확대되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채용비리에 업무방해죄를 적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영업 및 경제활동의 자유가 헌법상 보장되기 때문에 법률에 특별한 제한이 없는 한 기업은 누구를 고용할지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고 가령 특정한 사상이나 신조를 이유로 고용하지 않더라도 당연히 위법인 것은 아니라는 것이 판례이다. 미국법에서도 업무방해죄 규정이 발견되지 아니하고 나아가 사기업이 부정한 고용을 하였다는 이유로 형사처벌되는 사례 역시 발견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업무방해죄의 구성요건 자체가 흔치 않을 뿐만 아니라 사기업에서의 채용비리를 형사처벌하는 것 또한 매우 이례적이다. 그렇다면 우리 업무방해죄를 운용함에 있어 가급적 그 적용범위를 엄격하게 제한하는 방향으로 해석함이 타당하며 이를 채용비리에 적용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나. 공정성과 불법의 주소 우리 판례는 업무의 적정성 내지 공정성이 방해된 경우에도 업무방해죄가 성립한다는 법리가 확고하다(2006도1721 등). 그러나 업무방해죄의 연혁과 입법례들을 살펴볼 때 이러한 법리가 반드시 타당한 것은 아니다. 일본에서는 대체로 업무수행 자체가 방해된 경우들이 실무상 문제되고 있으며 학설도 업무의 내용적 적정이나 공정이 방해된 경우는 업무방해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입장이 지배적이다. 채용비리가 사회적 비난을 받는 이유는 그것이 공정한 경쟁을 저해하기 때문이다. 공정한 경쟁의 기회를 박탈당한 다른 지원자들 나아가 공정함이 저해된 사회가 피해자이다. 채용비리에 대한 사회적 분노는 채용비리를 행한 회사나 면접위원들의 이익이 침해되었다는 데 있지 않다. 판례가 이들을 피해자로 한 업무방해죄로 의율하는 사이 정작 채용비리의 트리거가 된 청탁자(대체로 유력자)들은 처벌의 그물에서 벗어나고 있다. 공정성이라는 명분이 착시현상을 일으켜 공정의 피해자라기보다 오히려 가해자라 할 수 있는 회사 등을 보호하는 업무방해죄로 달려간 것이다. 사회적 분노는 불법을 구성할 수 있지만 그 불법을 담는 구성요건이 아닌 엉뚱한 구성요건을 끌어오는 것은 죄형법정주의에 반한다. 만일 채용비리의 불법이 회사나 면접위원들에 대한 것이라면 이들은 자신들의 업무가 방해되었다는 이유로 손해배상청구를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민법상 이러한 청구가 받아들여질지는 매우 의문이다. 채용비리의 불법은 업무방해에 있지 않다. 3. 판례 유죄법리의 이론적 난점 나아가 판례에 따라 채용비리를 업무방해로 의율한다 하더라도 그 법리(이하 '유죄법리')에는 여러 난점이 있다. 가. 업무의 타인성 채용절차는 다양하지만 필터링-서류전형-1차 면접-2차 면접의 단계를 거치고 각 단계마다 평가자(이하 '면접위원')의 평가를 토대로 인사팀이 사정표를 작성하고 이 표를 토대로 결정권자가 단계별 합격자를 결정하는 구조가 전형적이다. 유죄법리는 면접위원의 업무는 대표이사에 대해서도 독립된 타인의 업무이므로 대표이사나 인사팀의 점수조작은 면접위원의 업무를 방해한 것이라고 한다. 위 법리는 결국 위임인(대표이사)의 방해로 수임인(면접위원)이 수임업무를 적정하게 행하지 못한 피해를 입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위임인의 방해로 수임인의 업무가 적정하지 못한 결과로 되었더라도 선관의무(민법 제681조) 위배가 있다고는 할 수 없어 위임계약상 책임질 일이 없는 수임인이 어떠한 손해를 보았다고 할 수도 없다. 면접업무는 적어도 공정성에 관한 한 타인의 업무라고 하기 어렵다. 나. 업무의 내용범위 면접위원의 업무는 공정한 채용업무가 아니라 면접업무 자체이다. 대상판례는 이를 인정하고 면접업무가 종료된 이후에는 그 단계 채용절차가 끝나지 않았더라도 당해 면접업무에 대한 방해는 있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면접종료 후 사정표를 조작하여 결국 불공정한 채용업무가 되더라도 면접위원에 대한 업무방해는 성립하지 않는다. 이에 유죄법리는 다음 단계의 면접위원에 대한 위계가 된다고 한다. 그러나 이 논리는 최종면접에 부정이 있는 경우나 특별채용 또는 서류전형만 있는 경우에는 적용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앞서 본 바와 같이 채용업무의 공정성은 면접업무가 아니라면 면접업무는 주어진 대상자에 대한 면접평가 자체에 그치지 나아가 전단계에서의 대상자 선정이 정당했는지 여부까지 포함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유죄법리가 말하는 응시자 자격에 관한 위계는 업무범위 밖의 사항에 대한 것이고 이로써 면접업무의 공정성이 저해된다고도 할 수 없다. 유죄법리를 관철한다면 전단계의 조작은 이후의 모든 업무에 대한 방해가 된다고 하게 된다. 회사의 업무는 대체로 많은 사람이 협동하여 수행되는데 누군가 자신의 업무를 부정하게 행하였다면 이후에 관여하는 수많은 직원에 대한 업무방해죄가 성립하게 되며 회사에 대하여 범죄(가령 배임)를 저지른 사람은 언제나 업무방해죄를 동시에 범한 것이 된다. 이러한 결론은 타당하지 않다. 다. 위계의 상대방 대표자의 의사는 법인의 의사로 평가된다. 대표자가 기망행위자와 동일인이거나 공모하는 등 기망행위를 안 경우에는 착오가 있다고 할 수 없어 법인에 대한 사기죄가 성립하지 않는다(2016도18986). 마찬가지로 대표자가 채용비리에 관여한 경우에 회사에 대한 업무방해죄는 성립하지 않는다. 면접위원에 대한 죄가 독립적으로 성립할 수 있다고 보는 유죄법리에 의하더라도 면접위원이 공모·양해한 경우는 그에 대한 업무방해도 성립하지 않는다(2009도8506). 사장과 직원이 공모하여 점수를 조작하여 면접시험을 보게 한 사안에서 위계의 상대방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 판례(2005도6404)도 같은 궤에 있다. 이 판례는 면접위원들은 공모한 정황이 나타나지 않았음에도 이들에 대한 위계도 부인한 것으로 보이는데 회사(인사팀)의 부정이 면접업무에 대한 방해는 아니라는 것으로 위계인데 양해했다기보다 위계 자체가 아니라는 생각이 저변에서 발견된다. III. 결론 채용비리는 비난받을 행위이다. 그러나 이를 회사나 면접위원에 대한 업무방해로 구성하는 것은 엉뚱한 곳에서 책임을 묻는 것이다. 대상판례가 업무방해죄의 적용을 엄격하게 한 점에서는 진일보한 것이지만 면접위원에 대한 업무방해죄라는 틀을 벗어나지 못함으로써 모든 관여자가 똘똘 뭉쳐 비리를 저지른 경우에는 오히려 무죄가 되고 관여자가 적을수록 많은 죄가 성립하는 역전현상은 해결하지 못하였다. 채용비리는 업무방해로 의율할 것이 아니다. 이상원 교수(서울대 로스쿨)
채용비리
업무방해
채용
이상원 교수(서울대 로스쿨)
2020-10-29
형사일반
친작 여부에 관한 기망과 사법자제 원칙
1. 서론 필자는 일전의 기고(본지 2020.10.19.자 판례평석)에서 이 사건의 두 가지 큰 주제 - (a) 이 사건 그림들이 피고인의 창작인지, (b) 친작이 아닌 사실을 고지하지 않은 것이 기망행위인지 - 중 첫째에 대해 논하였다. 본고에서는 두 번째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친작’이다. 법률적 평가인 ‘창작’과 달리 ‘친작’은 순수히 사실의 문제다. 이와 관련하여 ‘작품제작에서 조수의 사용은 관행’이라는 주장이 있다. 평론가 반이정 등이 펼친 이 주장에 의하면 다빈치, 렘브란트 등을 비롯해 우리가 흔히 아는 거장들도 조수를 사용해 작품을 제작했으며 미술계에 그러한 관행이 존재해 온 이상 작품이 친작인지 따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현대미술론’과 함께 ‘조수 사용 관행론’은 이 사건 기소를 공격하는 주요 논리이다. 그러나, 조수 사용이 관행이라 하더라도 이로부터 친작의 중요성을 전면 부정하는 것은 논리의 비약이다. 이 글은 먼저 고지의무를 논하기 위해 작품이 친작인지가 거래상 의미있는 사실인가부터 시작한다. 궁극적으로 이 글은 대법원의 사법자제 원칙이 추구하는 결론의 과도함을 지적한다. 2. 친작 여부의 중요성 몇백년간 사라졌다가 최근에 발견된 다빈치의 <구세주(Salvator Mundi)>라는 그림이 2017년 경매에서 미술사상 최고가로 판매된 경위는 미술작품의 제작관행과 시장의 상관관계라는 점에서 연구자들이 주목하였다. 르네상스 시대 거장의 스튜디오는 공동작업을 하는 곳이었다. 그곳에서는 거장이 중심이 되어 조수, 도제 등 보조자들이 함께 작품을 만들었다. 비싼 가격을 제시하는 일부 고객은 거장의 손길이 더 들어갈 것을 주문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싼 그림을 찾는 고객들은 누가 실제로 작품을 만들었는지를 따질 입장은 아니었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구세주>를 감정한 전문가들은 이 그림의 얼마만큼이 다빈치의 손으로 그려진 것인가에 대해 의견의 일치를 볼 수 없었다. 이 작품을 경매한 크리스티가 말할 수 있는 최대한은 이 작품이 다빈치의 것이라는 “넓은 공감대”가 있다는 정도였다. 이 작품의 제작을 둘러싼 의문은 매수자의 구매의사와 가격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사정이었지만, <구세주>는 중동의 한 부호에게 미술사상 최고가에 낙찰되었다. 이 매수자의 구매동기는 알려져 있지 않다. 종합하자면, (ㄱ) 작품 제작에 조수를 사용하기도 한다는 것, (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친작인지 여부는 거래상 유의미하다는 것, 그리고 (ㄷ) 모든 매수자들이 친작 여부를 동일한 비중으로 고려하는 것은 아니며 구매동기는 다양할 수 있다는 것은 모두 참인 명제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이 전제 사실들로부터 친작 여부의 고지의무에 관하여 어떤 결론을 도출할 수 있을까. 3. 고지의무의 인정 여부 고지의무는 미술품을 구매하는 자의 입장에서 생각할 문제이다. 잘 알려진 문예비평가인 메이어 아브람스에 따르면 예술을 감상하는 태도에는 네 가지가 있다. (1) 형식주의: 작품은 그 자체만으로 감상해야 하고 다른 외부적 요소를 고려해서는 안된다는 입장이다. (2) 표현주의: 작품은 작가의 특별하고 심오한 감정의 표현으로서 의미가 있다는 입장이다. (3) 모방주의: 작품은 실제의 모방이라는 점에서 가치를 가진다는 입장이다. (4) 실리주의: 작품의 가치는 감상자가 얻는 교훈과 정서를 통해 평가된다는 입장이다. (1) 내지 (4)의 어느 입장을 취하느냐에 따라 친작의 중요성은 달라진다. 20세기 미국의 가장 영향력있던 미술비평가인 클레멘트 그린버그는 형식주의였다. 이 논리를 관철하면 대작이란 사실은 작품의 가치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예술가의 고뇌와 승화를 생각지 않고 그림을 감상할 수 없다는 입장(2)에서는 그림이 대작이라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실이다. 예술이 실제의 모방(3)이라고 보면 작가보다는 작품의 사실성에 더 큰 관심을 둘 것이다. 실리주의(4)에서 보면 친작의 중요성에 대해 작품의 내용과 의도에 따라 다양한 관점이 있을 것이다. 고지의무의 인정근거에 관하여는 “일반거래의 경험칙상 상대방이 그 사실을 알았더라면 당해 법률행위를 하지 않았을 것이 명백한 경우에는 신의칙에 비추어 그 사실을 고지할 법률상 의무가 인정된다”는 원칙이 있다. 앞에서 살펴 본 사정을 종합하면, 친작 여부는 “경험칙상 그 사실을 알았더라면 당해 법률행위를 하지 않았을 것이 명백한 경우”라고 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다. 대법원은 ‘미술품을 구매하는 동기나 목적, 용도 등이 다양하고 이 요소들이 제각기 다른 중요도를 가질 수 있으므로, 친작 여부는 일반적으로 작품 구매자들에게 반드시 필요하거나 중요한 정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고 하는 원심판단을 수긍하였다. 즉, 친작 여부에 대해 침묵한 것만으로는 기망이 되지 않는다. 4. 사법자제 원칙 여기까지는 별 문제가 없다. 결국, 부작위에 의한 기망에 있어서 친작 여부는 고지의무로 격상할 정도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건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바꾼 것은 사법자제 원칙이다. 대법원은 고지의무에 대하여 판단하는 도입부에서 “위작 여부나 저작권 다툼 등이 없는 한 법원은 미술작품의 가치 평가에 대해 전문가의 의견을 존중하는 사법자제 원칙을 지켜야 한다”라고 하였다(법관이 법률의 기준이 아닌 “전문가의 의견”을 따라야 한다는 부분에 대해 필자는 그 사법관에 심각한 의문을 가지고 있으나, 지면상 이 점은 다음 기회에 논한다). 친작 여부에 관한 고지의무의 문제에 한정해서 보면 사법자제 원칙은 훈시적인 언급이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다. 앞에서 보았듯이 고지의무의 유무는 굳이 사법자제 원칙을 동원하지 않아도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법자제 원칙은 그보다 훨씬 심각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사법자제 원칙의 내용은 실제로는 원심의 다음의 언급을 승인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원심은 “구매 당시 피해자들이 내심으로 작품이 피고인의 친작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더라도, 작품이 위작 시비 또는 저작권 시비에 휘말린 것이 아닌 이상, 그 제작과정이 피해자들의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기대와 다르다는 이유로 피해자들이 착오에 빠져 있었다거나 피고인에 의하여 기망당했다고 볼 수 없다”라고 했던 것이다. 여기서 원심은 단순히 고지의무를 부정하는데 그친 것이 아니라 착오 자체를 부정하였다. 피해자들 대부분은 “피고인이 그림의 전부를 직접 그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그 가격에 매수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취지로 진술했다. 그런데 원심은 그 진술만으로는 친작임을 전제로 매수했다고 볼 수 없다고 하면서, 이어서 위 인용된 설시를 하였다. 그 핵심은 ‘위작 또는 저작권 문제가 아닌 이상’ 실제 사실과 피해자의 인식 간의 괴리가 있었다 해도 착오나 기망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위작이나 저작권 문제가 아닌 이상 작품의 가치에 대한 착오나 기망의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한 것인데, 일회성에 불과한 이 설시를 굳이 하나의 도그마로 완성한 것이 사법자제 원칙이다. 대법원은 ‘위작 여부나 저작권 다툼 등이 없는 한 법원은 미술작품의 가치 평가에 대해 사법자제 원칙을 지켜야 한다’라고 했던 것이다. 5. 적극적 기망 이 사건에는 소극적 기망 외에 적극적 기망의 요소가 있다. 피고인은 각종 언론, 전시, 판매과정에서 자신이 친작하는 것처럼 행세했다. 공소사실은 소극적 기망과 적극적 기망의 요소들이 섞여 있었는데, 1심과 원심은 공소사실의 요체는 부작위에 의한 기망이라고 보았다. 그것은 공소사실의 많은 부분이 “사실을 고지하지 아니하였다”는 형식으로 기술되어 있기 때문이다. 상고심에 이르러 검찰은 피고인이 작품의 저자인 것처럼 행세했다는 ‘묵시적 기망’의 부분에 대해 원심이 판단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 묵시적 기망은 작위에 의한 기망의 일종이다. 그것은, 피고인이 그 행위를 통해 친작이라는 외관을 창출했고 피해자들은 그 때문에 원래는 사지 않았을 가격에 작품을 샀다는 것이다. 검찰 주장은, 원심은 공소사실을 부작위에 의한 기망의 측면에서만 바라보았을 뿐, 기망행위에 의해 적극적으로 착오가 야기된 측면은 고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법원의 대답은 그 점은 원심이 이미 판단했다는 것이다. 부작위에 의한 기망으로 어떻게 작위에 의한 기망을 이미 판단했다는 것인가? 관건은 착오의 부정에 있다. 원심은 위작이나 저작권 문제가 아닌 친작 여부만 가지고는 착오가 될 수 없다고 했고, 대법원은 사법자제 원칙으로 이를 ‘원칙’의 수준으로 격상했다. 그 결과, 피고인이 친작 행세를 했다 해도 피해자는 착오상태에 있지 않고 기망행위는 성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위작 문제도 아니고 저작권 문제도 아니기 때문이다. 친작 여부의 소극적 기망에 있어 고지의무를 부정한 대법원의 결론은 수긍할 수 있다. 그러나, 적극적 기망에 대한 일률적 면책까지 시사하는 사법자제 원칙은 동의하기 어렵다. 사실관계에 따라서는 친작 여부가 기망·착오·처분과정의 중요한 고리였고 가해자는 의도적으로 이를 이용하였을 수 있다. 사법자제라 하여 이를 모두 불문에 붙인다는 것은 사법의 기능을 지나친 것이다. 안태용 변호사 (서울회)
조영남
대작
사기
안태용 변호사 (서울회)
2020-10-27
금융·보험
항공·해상
보험계약의 변경과 최대선의의무의 관계
1. 기초사실 원고는 원심 공동피고(이하 '소외 회사'라고 한다)와 원고가 생산하여 브라질 소재 매수인에게 수출한 크레인 자재(이하 '이 사건 화물'이라고 한다)를 마산항에서 브라질까지 운송하기로 하는 해상운송계약을 체결하였다. 소외 회사는 실제 해상운송인인 피고 보조참가인과 이 사건 화물에 관한 운송계약을 체결하였다. 보험자인 피고는 원고와 이 사건 화물에 대한 해상적하보험계약을 체결하였고 보험증권(이하 '이 사건 보험증권'이라고 한다)에는 "이 보험증권 하에서 발생하는 일체의 책임 문제는 영국의 법과 관습에 의해 규율된다(All questions of liability arising under this policy are to be governed by the laws and customs of England)"는 문구가 기재되어 있었다. 이 사건 선박의 일등항해사는 출항일에 이 사건 화물의 일부가 손상되어 있었다는 취지의 본선수취증(Mate's Receipt)을 발행하였다. 피고 보조참가인은 위와 같은 내용의 본선수취증이 발행되자 소외 회사에게 고장선하증권을 발행하거나 원고로부터 보상장(Letter of Indemnity, LOI)을 발행받아야 무사고 선하증권을 발급받을 것이라고 통지하였다. 그러나 원고는 소외 회사의 보상장 발행 요청을 거절하였다. 소외 회사가 선임한 검정인은 이 사건 화물에 대한 적부와 고박이 통상적인 기후조건 아래에서 해상운송을 감당하기 적절하게 시행되었다고 판단된다는 내용의 검정보고서를 발행하였다. 그러나 소외 회사는 피고에게 검정보고서를 송부하면서 위에서 본 사실관계와 달리 "선적 전까지 이 사건 화물 상태가 양호 또는 정상으로 화물에 이상이 없고 고장 선하증권이나 보상장이 발행되었거나 그러한 사정이 없다"고 알렸다. 한편 소외 회사는 피고에게 반복하여 소외 회사에 대한 대위권 포기특약{Subject To Waiver Of Subrogation Right Against The Named Applicant(forwarder), 이하 '이 사건 대위권 포기특약'이라 한다}을 추가해 줄 것을 요구하였고 피고는 이 사건 대위권 포기특약을 추가하는 것으로 이 사건 보험계약을 변경하였다. 피고 보조참가인의 대리점인 ○○종합물류는 피고 보조참가인에게 무사고 선하증권의 발행을 요청하면서 '무사고 선하증권의 발행으로 인하여 피고 보조참가인이 부담하게 되는 모든 책임에 관하여 피고 보조참가인을 면책시키고 자신이 보상하겠다'는 내용의 보상장을 발행하고 이 사건 선박의 선장을 대리하여 소외 회사에게 무사고 마스터 선하증권(Master B/L)을 발행하였다. 이 사건 선박이 브라질에 도착하여 하역작업을 개시하려고 할 때 이 사건 화물이 손상된 사실이 확인되었다(이하 '이 사건 사고'이라고 한다). 원고는 이 사건 수출계약에 따라 이 사건 사고로 손상된 화물의 수리작업을 진행하고 그 비용을 지출하였다. 원고는 피고에게 이 사건 사고로 인한 손해보상을 청구하였지만 피고는 원고에게 이 사건 사고에 관하여 보상하지 않겠다는 면책 통보를 하였다. 2. 판결이유 영국 해상보험법(Marine Insurance Act 1906) 제17조는 '해상보험계약은 최대선의(utmost good faith)에 기초한 계약이며 만일 일방당사자가 최대선의를 준수하지 않았을 경우 상대방은 그 계약을 취소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영국 해상보험법상 최대선의의무는 해상보험계약의 체결·이행·사고 발생 후 보험금 청구의 모든 단계에서 적용된다. 특히 계약의 체결 단계에서 가장 엄격하게 요구된다. 즉 이러한 최대선의의 원칙에 기초하여 같은 법 제18조는 피보험자가 계약 체결 전에 알고 있는 모든 중요한 사항을 보험자에게 고지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사항이란 보험자가 보험료를 산정하거나 위험을 인수할지 여부를 결정함에 있어서 그 판단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사항을 의미한다. 이처럼 영국 해상보험법상 최대선의의 의무는 보험계약 체결 이후에도 계속되는 공정거래의 원칙(a principle of fair dealing)으로 계약 전반에 있어서 준수되어야 하지만 계약의 이행 단계에서도 최대선의의무를 광범위하고 일반적인 의무로 인정하면 피보험자에게 과도한 부담을 초래하고 계약관계의 형평을 훼손할 우려가 있다. 따라서 일단 계약이 성립된 이후에는 계약 상대방의 편의를 증대시키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행동할 것을 요구하는 정도에는 이르지 않고 상대방에게 손해를 일으키거나 계약관계를 해치지 않을 의무로 완화된다고 보아야 한다{Manifest shipping Co. Ltd v. Uni-Polaris shipping Co. Ltd.(The Star Sea), 2001 Lloyd's C.L.C.608}. 특히 영국 해상보험법상 보험계약 계속 중 기존 계약의 내용을 추가 또는 변경할 때에는 해당 변경사항과 관련하여 중요한 사항에 대하여만 고지의무를 부담하는 것이지 제18조에 규정된 고지의무와 같이 모든 중요한 사항에 대하여 고지하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3. 이 사건 대법원 판결의 분석 소외 회사는 피고에게 이 사건 화물에 관하여 보상장 발행 없이 무사고 선하증권이 발행될 것이라고 통지한 후 이 사건 대위권 포기특약을 추가하는 내용으로 보험계약을 변경하였는데 이러한 일련의 행위가 계약체결 후 최대선의의무 위반이 되는지 문제 된다. 대법원은 "영국 해상보험법상 최대선의의무가 보험계약의 전 과정에서 요구된다 하더라도 계약체결 이후 그 의무의 강도와 내용은 완화될 뿐만 아니라 계약변경과 관련해서는 변경되는 내용과 관련한 중요한 사정에 관하여만 고지하면 된다"고 판시하였는데 이는 The Star Sea사건의 영국 판례의 법리를 정확히 기술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피보험자 등의 보험계약 체결 후의 행위가 영국법상 계약체결 후 최대선의의무에 반하는지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은 'Carter v. Boehm사건 (1766) 3 Burr 1911'에서 Mansfield경이 설시한 최대선의의무 내지 고지의무의 목적으로부터 찾아야 할 것이다. 영국 법원은 보험계약상 고지의무가 요구되는 이유를 사기의 방지와 선의성 제고에 있다고 보고 있고 보험계약 체결 후의 고지의무위반 여부의 실정법적 근거를 영국 해상보험법 제17조뿐만 아니라 동 법 제18조 내지 제20조의 유추적용에서 찾고 있다. 대법원은 보험계약의 변경과 관련하여 고지의무위반이 있었는지 여부를 이 사건 보상장이 발행된 일련의 경위가 이 사건 보험계약에서 변경된 사항에 관하여 중요한 사항이라고 볼 수 있는지 여부에 초점을 맞추어 이 사건 보상장이 보험계약 변경에 있어 고지대상인 중요한 사항이 아니라고 판시하였다. 이 사건에서 대법원이 판시한 바와 같이 이 사건 보상장이 송하인인 원고가 아닌 피고 보조참가인의 선박대리점이 소외 회사의 부탁을 받아 발행한 것이고 해상운송 실무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의미의 보상장도 아니라는 점에서 피고의 계약체결에 결정적 역할을 못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사건 보험계약의 체결에 있어 보상장의 제공 여부는 피고의 원고에 대한 대위권행사의 전제가 되는 중요한 문제였다는 점에서 보상장 작성 주체가 원고가 아닌 제3자라고 하더라도 보상장의 발행여부는 신중한 보험자의 계약변경의 결정에 있어 일정한 기여를 할 수는 있다거나 다른 사실과 결합하게 되면 결정적 영향을 줄 수 있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대법원 판시는 영국법상 보험계약 체결 후 고지의무의 법리를 오해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한편 영국 법원은 고지의무위반의 성립요건으로서 중요한 사항의 불고지 등으로 인해 보험자가 보험계약을 체결하도록 유도(Induce)되었어야 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 사건 보상장이 발행된 일련의 경위는 신중한 보험자 입장에서 판단할 때 중요한 사항이지만 보상장 발행 여부가 피고의 보험계약 변경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보다 적절한 해석일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사건의 경우 보상장 발행 여부는 계약변경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사항이지만 그러한 사정이 피고의 보험계약의 변경에 유인의 요소로 작용하지 않았다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이정원 교수 (부산대 로스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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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원 교수 (부산대 로스쿨)
2020-10-26
민사일반
금전채권자의 공유물분할청구권 대위행사와 보전의 필요성
I. 사실관계 원고는 한국자산관리공사로부터 A에 대한 양수금채권을 양수한 채권자이다. 이 사건 아파트는 원래 B의 소유였는데 B가 사망함에 따라 2013년 5월 23일 피고 앞으로 '2011년 12월 7일 협의분할에 의한 상속'을 원인으로 한 소유권이전등기가 되었다. 이후 위 상속재산분할협의가 사해행위로서 취소되어 '2016년 11월 15일 사해행위 취소'를 원인으로 이 사건 아파트의 7분의1 지분(이하 '이 사건 공유지분')은 A의, 7분의6 지분은 피고의 공유로 경정하는 내용의 등기가 이루어졌다. 이 사건 아파트에는 위 소유권이전등기가 되기 전부터 농업협동조합중앙회 앞으로 채무자 C, 채권최고액 2억4000만 원인 근저당권과 채무자 C, 채권최고액 합계 1억800만 원인 근저당권이 각 설정되어 있었다. 한편 A의 채권자인 신용보증기금이 이 사건 공유지분에 대한 강제경매를 신청하여 경매절차가 개시되었으나 경매법원은 2017년 2월 8일 신용보증기금에 '이 사건 공유지분의 최저매각가격이 압류채권자의 채권에 우선하는 부동산의 부담에 미치지 못한다'고 통지한 다음 2017년 2월 17일 경매신청을 기각하였다. 원고는 A를 대위하여 피고를 상대로 공유물분할을 구하는 소를 제기하였다. II. 대상판결의 내용 1. 다수의견의 요지 금전채권자가 공유물분할청구권을 대위행사하는 것은 책임재산의 보전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어 채권의 현실적 이행을 유효·적절하게 확보하기 위하여 필요하다고 보기 어렵고 채무자의 자유로운 재산관리행위에 대한 부당한 간섭이 되므로 보전의 필요성을 인정할 수 없다. 따라서 극히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금전채권자는 부동산에 관한 공유물분할청구권을 대위행사할 수 없다고 보아야 한다. 이는 채무자의 공유지분이 다른 공유자들의 공유지분과 함께 근저당권을 공동으로 담보하고 있고 근저당권의 피담보채권이 채무자의 공유지분 가치를 초과하여 채무자의 공유지분만을 경매하면 남을 가망이 없어 민사집행법 제102조에 따라 경매절차가 취소될 수밖에 없는 반면 공유물분할의 방법으로 공유부동산 전부를 경매하면 민법 제368조 제1항에 따라 각 공유지분의 경매대가에 비례해서 공동근저당권의 피담보채권을 분담하게 되어 채무자의 공유지분 경매대가에서 근저당권의 피담보채권 분담액을 변제하고 남을 가망이 있는 경우(이하 '이 사건 유형'이라고 한다)에도 마찬가지이다. 2. 반대의견의 요지 이 사건 유형에서는 채권자가 채무자의 재산권에 속하는 공유물분할청구권을 대위행사하여 채권의 현실적 이행을 유효·적절하게 확보할 수 있도록 허용할 필요가 있다. 이 사건에서는 부동산의 각 공유지분 위에 존재하는 공동근저당권으로 인하여 책임재산인 '채무자의 공유지분'에 대한 강제집행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이 사건 아파트의 경우 현물분할이 불가능하거나 현물분할로 인하여 현저히 가격이 감손될 염려가 있으므로 공유물 전부의 경매를 명하여 대금을 분할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분할 방법이다. 이러한 경우에 채권자가 공유자인 채무자를 대위하여 공유물분할청구권을 행사하면 채무자의 공유지분 경매대가에서 공동근저당권의 피담보채권 분담액을 변제하고도 공유자인 채무자에게 배분될 몫이 남을 수 있고 채권자는 이를 통해 비로소 금전채권의 만족을 얻을 수 있게 된다. III. 검토 대상판결의 다수의견은 대법원 2015. 12. 10. 선고 2013다56297 판결(이하 '2015년 판결')을 변경하면서 금전채권자가 공유물분할청구권을 대위행사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허용되지 않는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이와 달리 반대의견은 2015년 판결의 입장을 유지하면서 이 사건 유형의 경우에는 공유물분할청구권의 대위행사가 허용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결론의 차이는 채권자대위권 제도를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 공유관계를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1. 채권자대위권 제도에 관한 시각 차이-보전의 필요성 다수의견은 공유물분할청구권 대위행사가 '일반적으로' 금전채권의 현실적 이행 확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또한 채권자대위권 행사로 인하여 채무자의 책임재산 감소가 방지되거나 책임재산이 증가되는지를 '법률적인' 관점에서 평가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반면 반대의견은 논의의 범위를 이 사건 유형으로 한정하여 적어도 '이 사건 유형에서는' 공유물분할청구권 대위행사가 금전채권의 현실적 이행 확보에 도움이 된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또한 채권자대위권 행사로 인하여 금전채권의 현실적 이행이 확보되는지를 '현실적인' 관점에서 평가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필자는 다수의견보다 반대의견이 더욱 설득력을 가진다고 생각한다. 다수의견은 (i) 채권자가 공유물분할청구권을 대위행사한다고 하여 채무자의 책임재산 감소가 방지된다거나 책임재산이 증가한다고 일반적으로 말할 수 없고 (ii) 공유부동산 전체를 매각하면 공유지분만을 매각할 때보다 공유지분의 매각대금이 더 커질 수 있다는 사실상의 가능성만으로 채무자의 책임재산이 늘어난다고 법률적으로 평가할 수 없다는 점을 들어 보전의 필요성을 부정하였다. 그런데 (i)의 서술 중 '책임재산 감소 방지', '책임재산 증가' 부분은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 오늘날 우리 법에서 채권자대위권 제도는 책임재산 보전을 위한 제도라기보다 채권의 현실적 이행 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한 제도로 자리매김하고 있기 때문이다. (ii)의 서술에 대해서는 공유지분의 매각대금이 더 커질 수 있다는 '사실상의 가능성'을 쉽게 무시해버릴 것은 아니라는 비판이 가능하다. 더구나 다수의견이 일반론 차원에서는 채권의 '현실적' 이행이 유효·적절하게 확보되는지를 기준으로 하여 보전의 필요성을 판단하여야 한다고 하면서 공유물분할청구권의 대위행사에 관한 맥락에서는 '법률적'인 잣대로 판단한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문제는 이 사건 유형의 구체적인 사안에는 위 (i) 및 (ii)의 서술이 적용될 수 없다는 점이다. 대상판결의 사안에서 공유물은 아파트의 한 호실로서 이를 현물분할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기대하기 어렵다. 그에 따라 공유물분할이 대금분할 또는 가액보상의 방법으로 이루어지면 금전채권의 현실적 이행 가능성이 확보될 수 있다. 또한 이 사건 유형에서는 공유지분에 대한 경매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므로 공유지분의 매각과 공유부동산 전체의 매각을 비교하는 것은 실현 불가능한 구제수단과 실현 가능한 구제수단을 비교하는 것이어서 타당하지 않다. 2. 공유관계에 관한 시각 차이-부당한 간섭 다수의견은 공유자의 의사에 초점을 맞추었다. 공유자들이 공유관계를 현 상태 그대로 유지하기를 희망한다면 그러한 공유자들의 의사는 존중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반면 반대의견은 공유관계에 수반되는 법적인 제약에 초점을 맞추었다. 공유자가 원하지 않는 시기에 공유물분할이 이루어져 공유물 전부를 지분에 따라 사용할 수 있었던 기존의 사용관계가 소멸하더라도 이는 공유관계에 따른 제약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이러한 공유관계에 관한 시각 차이는 금전채권자의 공유물분할청구권 대위행사가 부당한 간섭인지에 관한 입장 차이로 이어졌다. 필자는 이 논점에 관해서도 다수의견보다 반대의견이 더욱 설득력을 가진다고 생각한다. 채권자대위권 제도는 채권자의 이익(채권의 현실적 이행 확보)을 채무자의 이익(자유로운 재산관리)보다 우선시키는 제도이고 채권 보전의 필요성이 인정되는 한 채무자의 재산관리에 대한 간섭을 허락하는 제도이다. 채무자에 대한 부당한 간섭을 쉽게 인정하는 것은 채권자대위권 제도의 취지에 비추어 타당하다고 보기 어렵다. 더구나 '부당한 간섭'을 매우 엄격한 요건 아래에서만 인정하였던 판례의 경향에 비추어보면 더욱 그러하다. IV. 나가며 필자는 ① 공유지분에 대한 강제집행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② 공유물분할이 대금분할 및 가액보상 방법으로 이루어질 것이 비교적 확실한 경우에는 금전채권자의 공유물분할청구권 대위행사를 허용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대상판결의 사안에서는 공유물분할청구권 대위행사가 채권의 현실적 이행을 확보하는 데 유효·적절한 수단이고 공유물분할청구권 대위행사에 수반되는 법적 문제들이 채권자의 권리 보호를 외면할 정도로 중대한 문제라고는 볼 수 없으며 채무자 및 공유자의 이익이 채권자의 이익보다 반드시 더 보호 필요성이 높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필자가 더욱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부분은 대상판결의 다수의견이 새롭게 제시한 법리가 앞으로 제기될 수 있는 사건들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대상판결이 다수의견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의 의미를 공백 상태로 남겨두는 한편 공유물분할청구권의 대위행사 사건에서 발견되는 문제점들이 극히 예외적인 경우에는 과연 해결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답을 하지 않았다. 다수의견의 입장은 재고될 필요가 있지만 앞으로 법원이 이러한 법리를 어떻게 적용하고 발전시켜 나갈지가 오히려 더 중요한 문제라고 하겠다. 이소은 임상교수(서울대 로스쿨)
공유물분할청구
강제집행
부동산
공동소유
이소은 임상교수(서울대 로스쿨)
2020-10-22
형사일반
그림 대작 사건 - 현대미술론의 수용인가?
1. 서론 가수 조영남이 화가를 써서 그린 그림을 자신이 그린 것처럼 판매했다고 해서 사기로 기소된 사건은 세간을 들끓게 했다. 이에 대한 입장은 미술계에서도 양분되었고 평론가들은 나름대로 예술관을 내세워 사건을 논하였는데, 특히 일부는 현대미술이라는 현상 자체가 개념-실행의 분리를 전제하고 있는 것이어서 예술의 핵심은 개념에 있고 실행은 누가 하던 상관없다는 주장을 펼쳤다. 평론가 진중권은 1심이 기망행위를 인정한 것은 법원이 '현대미술'을 잘못 이해했기 때문이라면서 대법원에서 피고인의 무죄가 확정된 것은 '한국의 법원과 미술계가 비로소 현대미술의 개념에 눈을 뜬 사건'이라고 환영하였다. 마찬가지로 피고인은 이번 판결을 통해 자신이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실제 제작은 전업화가 등을 사용하는 창작방식이 인정받았다고 하면서 문제된 작품들에 대해 당당히 자신을 작가로 표방한 전시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언론도 이러한 시각을 여과없이 전달하였으며 법률가들 중에도 비슷한 시각을 공유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그런데 최근 공개된 이 사건 대법원 판결문을 보면 그러한 이해와는 정반대로 읽힐 수 있는 부분이 설시되어 있다. 이것은 판결에서 비상하게 공을 들여 말하고 있는 저작권 법리 부분이다. 여기서 대법원은 피고인이 이 작품들의 작가라는 원심의 판단에 대해 사실상 긍정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이 글은 이 사건 판결의 의미를 분명히 해서 이를 둘러싼 불필요한 오해가 양산되는 것을 피하고자 하는 것이다. 2. 원심 판결 공소사실의 요지는 피고인이 공소외인을 사용하여 작품을 제작한 사실을 고객에게 알리지 않은 채 판매한 것이 신의칙상 고지의무 위반으로서 기망행위라는 것이다. 1심은 (1) 피고인은 자신이 창작하지 않은 작품을 (2) 이 사실을 고지하지 않은 채 판매한 것이 기망행위라고 판단하였다. 피고인을 무죄라고 본 원심의 판결이유는 크게 두 부분 (a) 이 그림들은 피고인이 창작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b) 이 사건 거래에서 신의칙상 고지의무를 인정할 수 없다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각각 1심의 판단 (1)과 (2)에 대응하는 것이다. 즉, 원심은 1심의 (1)과 (2)를 모두 배척하였고, 원심 판결이유 (a)와 (b)는 병렬적으로 무죄 결론에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a)와 (b) 중 어느 하나가 배척되더라도 두 가지 모두가 배척되지 않은 이상 원심의 무죄결론은 유지될 수 있는 구조였다. 원심은 판결이유 (a), 즉 이 작품들은 피고인이 창작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점을 말하기 위해 상당한 정성을 쏟았다. 여기서 원심은 일부 평론가의 논리와 흡사하게 현대미술에서 개념-실행이 분리되는 점을 언급하고 미술사상 저명 화가들의 이름을 들면서 이들의 창작에서 조수의 사용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진 점을 지적하였다. 미술이론적 설명을 넘어 원심은 공소외인이 한 작업은 '밑그림의 제작'에 불과하다고 평가하고 피고인의 창작적 기여에 대해 세세하게 설시하였다. 그 다음 판결이유 (b), 즉 신의칙상 고지의무가 있는가의 점에 대해서는 위 (a)의 논의와는 별개로, 피해자들의 구매동기가 다양하기 때문에 친작인지 여부가 거래의 주된 요소라고 말하기 어렵고 '친작이 아니었다면 구매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피해자들의 진술이 진심이 아니었을 가능성, 그리고 고지의무의 구체적 범위와 이행방식을 확정하기 어렵다는 이유를 들어 그 의무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원심이 확정됨에 따라 대부분은 원심판결의 (a)와 (b)가 모두 받아들여진 것으로 생각한다. 특히 이 사건을 두고 세간에서 떠들썩하게 전개된 입론들은 모두 (a)에 관련된다. 그런데, 대법원 판결을 보면 대법원은 (a)에 대한 원심의 판단을 긍정하지 못하고 있다. 대법원이 원심을 인용한 것은 (b), 즉 신의칙상 고지의무의 존부에 관해 사법자제의 원칙을 선언하면서 원심의 결론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원심판결은 (a)와 (b)가 모두 배척되지 않은 이상 인용될 수 있는 구조였기 때문에 대법원이 (a)에 대한 원심판단을 긍정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원심의 무죄 결론은 유지될 수 있었다. 3. 검찰 상고이유 제1점 상고심에 이르기 전까지 저작권은 전혀 논점이 아니었다. 관건은 어디까지나 친작이 아님을 고지하지 않은 것이 기망행위인가였고 저작권은 논외라는 점에 대해서 아무도 이론이 없었다. 원심은 분명하게 "공소사실은 피고인이 저작권을 보유하였는지를 문제 삼지 않았다"고 지적하고 저작권에 대한 판단 자체를 거부하였다. 그런데 원심에서 패한 검찰의 상고이유 제1점은 '원심판결에 나타난 저작자, 저작물에 관한 법리오해'였다. 저작자와 저작물에 대한 주장은 검찰 스스로도 한 적이 없고 원심도 판단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해서 상고이유 제1점이 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저작권법에 존재하는 '2인 이상이 저작물의 작성에 관여한 경우 그중에서 창작적인 표현형식 자체에 기여한 자만이 그 저작물의 저작자가 되고, 창작적인 표현형식에 기여하지 아니한 자는 비록 저작물의 작성 과정에서 아이디어나 소재 또는 필요한 자료를 제공하는 등의 관여를 하였다고 하더라도 그 저작물의 저작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라는 법리 때문이다. 원심은 판결이유에서 피고인이 아이디어 내지 컨셉트를 기여하였음을 여러 차례 강조하였다. 원심의 판단은 '공소외인들은 보수를 받고 피고인의 창작물에 대한 아이디어를 작품으로 구현하기 위해 작품제작에 도움을 준 기술적인 보조자일 뿐'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원심이 스스로 인정한 이 사실을 '창작적인 표현형식에 기여하지 아니한 자는 아이디어나 소재를 제공하였더라도 저작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라는 위 공식에 대입하면 피고인은 저작자가 아니며 오히려 공소외인이 저작자가 된다. 그 때문에 검찰의 상고이유 제1점은 친작 여부의 고지의무가 아니라 저작자 결정에 관한 법리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4. 대법원의 판단 검찰 상고이유 제1점은 불고불리를 명백히 위반한 것이었다. 검찰이 이를 모른 것은 물론 아니었다. 저작권 법리와 원심의 판결이유를 대조하면 적어도 문언상으로 선명하게 원심의 자가당착이 나타났고 검찰은 이것을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상고이유 제1점은 그대로 배척해 버려도 무방한 것이었지만 대법원은 그러지 않았다. 대법원은 이를 배척하기 전에 이 사건의 저작권적 함의에 대해 비중있게 설시를 하였다. 대법원은 '창작적인 표현형식에 기여하지 아니한 자는 비록 아이디어나 소재를 제공하였더라도 저작자가 아니다'라는 바로 그 법리를 언급한 다음, '저작자 아닌 자가 마치 저작자인 것처럼 행세하여 그 미술품을 판매하였다면 이는 형법상 사기죄에 해당할 수 있다'고 하였다. 대법원은 저작자의 결정이 매우 어려운 문제라는 점을 거듭 강조하였지만 "원심이 이 사건 미술작품의 저작자가 피고인이라고 본 것이나 그와 같은 창작방식이 미술계에 존재한다고 기술한 데에 논란이 있을 수 있다"고 인정하였다. 원심은 작품의 저작자가 피고인이라고 말한 적이 없는데 왜 대법원은 원심이 그런 판단을 했다고 본 것인가? 원심은 그 판결이유에서 이 작품들은 피고인의 창작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대법원은 원심의 판결이유 중 고지의무의 불인정은 받아들였다. 그러나, 대법원은 저작권 법리에 판결이유의 절반을 할애하면서도 이 그림들이 피고인의 창작이라는 원심의 판단은 끝내 긍정하지 않았다. 5. 이 사건의 저작권적 함의 일부에서는 '이 사건이 저작권법 위반으로 기소되었다면'하는 가설을 제기하고 있다. 그러나 이 사건을 저작권법 위반으로 단정하기에는 어려운 사정이 존재한다. 출발은 물론 저작인격권에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저작재산권과 달리 저작인격권은 일신전속적이며 양도, 포기할 수 없다. 피고인이 대가를 주고 작품을 인도받았다 해도 여기에 수정·서명을 하여 자기 작품으로 공표한 행위는 저작인격권의 침해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두 가지 넘기 어려운 장애가 있다. 첫째, 업무상 저작물의 경우는 저작인격권이 인정되지 않는다. 1심은 피고인과 공소외인 간의 법률관계는 고용이 아닌 대등관계로 보았다. 그러나 원심은 고용은 아니더라도 피고인이 일방적으로 제작을 지시하고 공소외인은 이의없이 따르는 관계였다고 시사하고 있다. 둘째는 저작인격권이 아무리 일신전속적이라 해도 이를 행사하지 않겠다고 동의하는 것까지 막지는 못한다. 이 사건에서 묵시적 동의의 존재는 검찰이 저작권법 위반을 기소하지 않은 배경이 아니었을까 추측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법원 판결의 저작권 설시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저작권법 위반은 별론, 저작자가 누구인가 하는 것은 합의로도 변경 못하는 강행규정이기 때문이다. 저작권 제도가 개념예술을 중핵으로 하는 현대미술론에 호응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현대미술이 개념이 예술이라고 주장한다면 저작권은 표현에 예술의 영혼이 있다고 본다. 개념이 아닌 표현형식을 보호한다는 것은 저작권 제도의 철학적 기초다. 바로 이 점에서 이 사건에서 현대미술론이 수용되었다는 어떠한 근거도 찾아보기 어렵다. 안태용 변호사 (서울회)
사기
대작
조영남
안태용 변호사(서울회)
2020-10-19
민사일반
의료사고
의료과오소송에서 증명책임의 경감
1. 사실관계 원고는 2013년 7월경 피고로부터 추간판 절제술과 인공디스크 삽입술 등을 시행 받았다. 피고가 시행한 전방 경유 요천추 추간판 수술(이하 '전방 경유술'이라고 한다)의 대표적인 합병증은 비뇨기관과 성기관 등에 분포하는 상하복교감신경총의 손상이고 위 신경총에 손상이 가해지는 경우 남성에게는 역행성 사정이 발생하는바 원고는 위 수술 후 사정장애 및 역행성 사정 등의 증상(이하 '이 사건 장해'라고 한다)을 보이고 있다. 2. 소송의 경과 원고의 피고에 대한 손해배상청구에 대하여 인천지방법원은 2014가합3052 판결로 원고가 이 사건 수술 직후 그 장해 진단을 받았을 뿐 아니라 그 부위의 밀접한 연관성 등으로 미루어 이 사건 수술과 장해 사이에 다른 원인이 개재되었을 가능성이 희박한 점 등을 종합하면 이 사건 장해는 피고가 이 사건 수술을 시행하는 과정에서의 과실에 의하여 초래된 것이라고 추정함이 상당하다는 이유로 원고의 청구를 인용하였다. 서울고등법원은 2016. 12. 8. 선고된 2016나2021634 판결(이하에서는 '원심판결'이라고 한다)에서 제1심 판시와 비슷한 이유로 피고의 항소를 기각하였으나 대법원은 2019. 2. 14. 선고 2017다203763 판결(이하에서는 '대상판결'이라고 한다)로 원심이 의료소송에서의 증명책임, 과실과 인과관계의 추정에 관한 법리를 오해하고 이 사건 수술 과정에서 피고에게 요구되는 주의의무의 구체적 내용이 무엇인지 등에 관하여 필요한 심리를 다하지 않은 잘못을 저질렀음을 이유로 원심판결을 파기하였다. 3. 대상판결의 요지 가. 의료과오로 인한 손해배상청구 사건에서 일반인의 상식에 비추어 의료행위 과정에서 저질러진 과실 있는 행위를 증명하고 그 행위와 결과 사이에 의료행위 외에 다른 원인이 개재될 수 없다는 점을 증명한 경우에는 의료상 과실과 결과 사이의 인과관계를 추정하여 손해배상책임을 지울 수 있도록 증명책임이 완화된다. 나. 의료행위는 고도의 전문적 지식을 필요로 하는 분야로서 일반인으로서는 의사의 과실, 그 과실과 손해 사이의 인과관계를 밝혀내기가 매우 어렵다. 따라서 문제된 증상 발생에 관하여 의료과실 이외의 다른 원인이 있다고 보기 어려운 간접사실들을 증명함으로써 그와 같은 증상이 의료과실에 기한 것이라고 추정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경우에도 의사의 과실로 인한 결과 발생을 추정할 정도의 개연성이 담보되지 않는 사정을 가지고 막연하게 중대한 결과에서 의사의 과실과 인과관계를 추정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의사에게 무과실의 증명책임을 지우는 것까지 허용되지는 않는다. 의료행위로 후유장해가 발생한 경우 후유장해가 당시 의료수준에서 최선의 조치를 다하는 때에도 의료행위 과정의 합병증으로 나타날 수 있다면, 후유장해가 발생되었다는 사실만으로 의료행위 과정에 과실이 있었다고 추정할 수 없다. 다. 피고가 전방 경유술을 택한 것이 의사에게 인정되는 합리적 재량의 범위를 벗어난 것이라고 볼 수 없으므로 거기에 주의의무 위반을 인정할 수 없고 수술 중에 위 신경총이 손상되어 이 사건 장해가 발생하였다고 보더라도 그것만으로 피고의 과실을 추정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 사건 장해는 전방 경유술에 따른 일반적 합병증으로 볼 여지가 있으므로 원심으로서는 신경손상을 예방하기 위하여 피고에게 요구되는 주의의무의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인지 등을 살펴, 신경손상과 그로 인한 역행성 사정 등의 결과가 수술 과정에서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합병증의 범위를 벗어나 피고의 의료상 과실을 추정할 수 있는지를 판단했어야 한다. 4. 검토 의료행위의 전문성과 진료과정의 밀실성, 그에 따른 증거의 편재성 등으로 일반인이 의료과실로 인한 손해 발생 사실을 명확히 증명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따라서 소송을 통한 손해의 공평 분담을 위해서는 환자 측의 증명책임을 경감시키는 방안을 강구할 필요가 있다. 그에 따라 대법원은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사실상 추정론'에 근거하여 간접사실에 경험칙을 적용하여 과실과 인과관계를 동시에 추정하는 방식으로 과실 등에 대한 증명책임을 경감하기 시작하였다. 그 후 '일반인의 상식'에 기초하여 과실을 증명한 후 인과관계를 추정하는 방식에 따른 대법원 1995. 2. 10. 선고 93다52402 판결이 선고되었고 영미법상의 일반상식론(Common knowledge theory) 또는 사실추정칙(Res Ipsa Loquitur Doctrine)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는 위 판결은 그 의미 등에 관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의료소송에서의 증명책임 경감에 관한 획기적인 판례로서 수많은 관련 사건에서 인용되고 있다. 한편 위 93다52402 판결 이후에도 간접사실에 의하여 과실과 인과관계를 동시에 추정하는 방식을 보충적 또는 병존적으로 사용하는 판결들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그 간접사실들이 의사의 과실을 추정할 수 있는 정도로 개연성이 담보되는 것이어야 한다고 하거나 발생된 악결과가 통상의 합병증인 경우에는 과실 추정이 불가하다고 하는 등으로 증명도를 더 높임으로써 증명책임 경감에 역행하는 듯한 재판례들이 많이 보이고 있다. 대상판결 역시 그와 궤를 같이 하고 있는바 그 판결에는 아래와 같은 문제점들이 있다. 첫째, 대상판결은 판시내용 등으로 미루어 간접사실에 의한 동시추정 방식에 따른 것으로 보임에도 그와 관계없는 93다52402 판결을 원용함으로써 증명책임 경감의 방식에 혼란을 야기한다. 위 판결과 Common knowledge theory나 Res Ipsa Loquitur Doctrine의 연관성으로 미루어 그 법리는 극히 예외적인 의료과오사건에 적용될 수 있을 뿐임에도 그와 무관한 사안에까지 무분별하게 그 판지를 원용함으로써 과실 증명을 불가능하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법원은 93다52402 판결이 의사의 과실이 명백한 일부 사안에서라도 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일반인의 상식에 반하는 과실'의 의미를 명확히 하고 그에 따른 의료행위 준칙을 제시하는 노력을 하든가 증명책임 감경에 관하여 종전의 동시추정의 방식으로 일원화하는 결단을 하여야 할 것이다. 둘째, 동시추정의 방식에 과도한 한계를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법원 2004. 10. 28. 선고 2002다45185 판결은 동시추정의 방식을 채용하면서도 '막연하게 중한 결과에서 의사의 과실 및 인과관계를 추정함으로써 의사에게 무과실의 증명책임을 지우는 것까지 허용되는 것은 아니다'고 판시하였고 그 입장은 그대로 대상판결에까지 이어져 왔다. 그러나 동시추정의 방식에 한계가 있음을 밝힌 재판례 사안들 대부분은 '다른 원인 개입가능성의 배제 불가'라는 사정과 관련되어 있는바 인과관계만 인정되면 무제한 확장이 가능한 '다른 원인'의 인정 여부에 관하여 법원의 자의적 판단이 개입할 수 있다는 점, 진료 정보와 의학지식 측면에서 현저하게 열세인 환자 측에게 그 개입가능성에 대한 증명책임을 부담시키는 것은 위험영역설이나 증거거리설에 비추어 너무 부당하다는 점 등을 종합하면 2002다45185 판결 입장은 부당하고 이와 궤를 같이하는 대상판결에는 동의할 수 없다. 셋째, 환자 측에게 의사의 과실 등과 관련하여 너무 높은 증명도를 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상판결은 피고가 신경손상 위험이 없는 후방 경유술이 가능함에도 그 위험이 따르는 전방 경유술을 시행한 것은 의사의 재량으로 과실 인정과는 무관하고 후유장해가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합병증 범위를 벗어났다고 볼 수 없는 한 그 발생사실만으로 의료행위 과정에 과실이 있었다고 추정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재량에는 그에 따른 책임이 부과되거나 그 수위가 더 높아져야 하는 점, 후유장해가 발생한 영역이 의사가 지배하는 범위 안에 있는 점, 정보나 증거 측면에서 후유장해가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합병증 범위 내라는 의사의 증명이 환자가 그 반대사실을 증명하는 것보다 훨씬 용이할 것으로 보이는 점 등을 종합하면 이 사건 장해가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합병증 범위 내라는 사실에 관한 증명책임을 의사에게 부담시키는 것이 옳다고 보여지므로 위 장해가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합병증으로 볼 여지가 있다는 대상판결의 견해에는 역시 동의할 수 없다. 나아가 환경정책기본법 제44조와 환경오염피해 배상책임 및 구제에 관한 법률 제6조, 제조물책임법 제3조와 제3조의2, 자동차손해배상보장법 제3조 등에서 무과실책임이나 인과관계의 추정 등을 규정하고 있는 점, 의료소송의 경우 진료계약이 체결된 사람들 사이의 분쟁일뿐더러 미용 목적의 성형수술이나 치과 보철치료 등과 같이 결과채무로 파악할 수 있는 의료행위가 적지 않는 등 의료소송에서의 증명책임이 환경침해소송 등보다 더 높아야 할 이유가 없는 점 등을 고려할 때 과실 등에 관한 증명책임 전환에 관한 법해석론 또는 입법론적 검토도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김태봉 교수(전남대 로스쿨)
의료소송
입증책임
의료과실
김태봉 교수(전남대 로스쿨)
2020-10-15
노동·근로
민사일반
사무장병원의 임금 지급의무의 주체에 관한 고찰
1. 들어가며 우리나라 의료법은 의료기관은 의료인 외에 법률상 인정되는 의료법인·비영리법인 등에 의하여서만 개설이 가능하고 이들을 제외한 비의료인은 개설 자체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사무장병원은 의료법 제33조 제2항을 위반하여 의료기관을 개설할 수 없는 비의료인이 의료기관을 개설·운영하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사무장병원은 우리나라 의료시장에서 인적 인프라가 충분하지 못하고 비의료인의 경제력에 의존한 기형적인 영리 목적 의료기관을 창출하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의료가 지향하는 비영리성과 공공성에 배치되고 의료시장질서에 교란을 가져올 수 있다. 무엇보다 사무장병원의 외관을 빌미로 정부로부터 요양급여와 각종 보조금의 혜택을 부정수급하고 허위로 의료보험을 청구하고 있어 국민건강보험의 재정에 누수를 가져오는 큰 원인이 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립된 사무장병원에서 근무하는 고용의사를 비롯한 직원들에 대한 임금이 제때에 지급되지 못하는 경우 그와 같은 임금지급채무를 위반한 자가 사무장병원의 실질적 운영자인 비의료인인 사무장인지 아니면 사무장병원의 명의자인 의료인인지가 최근 대법원 판결을 통해 쟁점이 된 바 있다. 비록 사무장병원이 법가치에 반하는 유형이라고 하더라도 임금지급채무의 지급은 근로자의 보호를 위해 필요한 영역이며 동시에 이는 사무장병원 개설·운영 약정의 효력과 사무장병원의 채권·채무관계의 귀속 등과 연계되는 문제이다. 2. 대법원 2020. 4. 29. 선고 2018다263519 판결의 태도 대법원은 2020. 4. 29. 선고 2018다263519 판결에서 "X병원은 의료인이 아닌 피고가 의사인 甲의 명의를 빌려 개설한 이른바 사무장 병원에 해당하고 원고 등은 형식적으로는 甲과 근로계약을 체결하였지만 피고가 X병원을 실질적으로 운영하면서 원고 등을 직접 채용하고 업무와 관련하여 원고 등을 구체적이고 직접적으로 지휘·감독하면서 직접 급여를 지급한 사정을 감안하면 원고 등과 피고 사이에 실질적인 근로관계가 성립되었다고 봄이 타당하다. 따라서 피고가 원고 등에 대하여 임금 및 퇴직금 지급의무를 부담한다. 이와 같이 원고 등과의 근로계약에 따른 임금 및 퇴직금 지급의무는 처음부터 피고에게 귀속되는 것이지 X병원의 운영과 손익을 피고에게 귀속시키기로 하는 甲과 피고 사이의 약정에 따른 것은 아니므로 위 약정이 강행법규인 의료법 제33조 제2항에 위반되어 무효가 된다고 하더라도 피고가 원고 등에 대하여 임금 및 퇴직금 지급의무를 부담하는 데는 아무런 영향이 없다"고 판단하면서 원심판결을 파기·환송하였다. 3. 사무장병원 개설·운영 약정의 효력과 사무장병원의 채권·채무관계의 귀속 대상판결과 같이 비의료인이 사무장병원을 설립하기 위하여 의료인과 체결한 동업계약은 강행법규 위반으로 사법상 무효가 된다. 즉 대법원은 사무장병원 개설·운영 약정이 무효이므로 의료기관 운영과 관련하여 얻은 이익이나 취득한 재산, 부담하게 된 채무 등은 모두 의료인 개인에게 귀속된다고 판시한 바 있다(대법원 2003 9. 23. 선고 2003두1493판결, 대법원 2014. 9. 26. 선고 2014다30568 판결, 대법원 2016. 12. 27. 선고 2013다48241 판결). 대체로 사무장병원의 개설·운영 약정 형태가 의료인과 비의료인의 동업관계인 경우에는 조합계약의 형태로 비의료인이 의료인을 고용하는 경우에는 고용과 손익귀속에 관한 혼합계약 형태로 체결된다. 그렇다면 사무장병원의 개설 및 운영과 관련하여 취득한 재산과 법률행위로 인한 채권·채무 전부가 면허를 가졌다고 하여 명의자인 의료인에게 일률적으로 귀속된다고 보아서는 안 되고 구체적 법률관계에 따라 실제 계약당사자가 누구인지에 관한 해석을 통하여 개별적으로 결정하여야 한다. 사무장병원 개설·운영 약정의 형태가 조합계약이거나 이와 유사하여 의료인이 의료기관의 운영과 손익에 관여하는 경우에는 대부분 의료인이 계약당사자로서 채권·채무관계의 귀속 주체가 될 것이다. 그러나 비의료인이 자금을 투자하여 시설을 갖추고 의료인을 고용하여 그 명의로 의료기관을 개설하고 의료인이 병원 운영이나 손익에 전혀 관여하지 않고 급여만을 받는 경우에는 의료인 명의로 대외적인 계약이 체결되었더라도 개개 법률관계마다 실제 계약당사자가 누구인지를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무효인 사무장병원 개설·운영 약정에 따라 당사자가 이미 급부를 이행하였다면 이는 부당이득이 되어 반환을 청구할 수 있는데(민법 제741조) 강행법규에 해당하는 의료법 제33조 제2항에 위반하여 급부한 경우에 불법원인급여(민법 제746조)가 되어 그 반환청구가 제한되는지 여부가 문제이다. 대법원은 기본적으로 의료법 제33조 제2항에 위반하는 행위라 할지라도 당사자간 상호 급부한 것의 반환을 청구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대법원 2003 9. 23. 선고 2003두1493판결, 대법원 2011. 1. 3. 선고 2010다67890 판결). 그러나 의료법 제33조 제2항에 위반한 사무장병원 개설·운영 약정은 제103조의 반사회적 행위로서 무효가 되고 이에 따라 이행한 급부의 반환을 구하는 것은 불법원인급여에 해당하여 허용할 수 없다고 보아야 한다. 다만 제746조 단서(불법원인이 수익자에게만 있는 경우)에 해당하거나 수익자의 불법성이 급부자의 불법성에 비해 현저히 큰 경우에는 반환을 청구할 수 있다고 파악하는 것이 타당하다. 4. 사무장병원 내 근로계약의 효력 근로기준법은 민법의 특별법에 해당하므로 근로기준법이 적용되는 근로계약에 대하여는 근로기준법에 의거하여 판단하게 된다. 따라서 사무장병원 개설·운영 약정에 의하여 설립된 사무장병원이 근로기준법 제11조의 요건을 갖춘 사업 또는 사업장에 해당하는 경우 근로기준법의 적용대상이 된다. 그러므로 사무장병원에 근무하면서 근로를 제공하는 직원과 고용의사, 임상병리사, 간호사, 방사선사 등의 보건의료종사자는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에 해당하게 된다. 이 때 사무장병원에서 누가 사용자인지 즉 사무장병원의 명의를 빌려준 의사인지 아니면 비의료인인지가 문제된다. 대법원 2011. 10. 27. 2009도2629 판결에서도 비의료인과 의료인 간 동업 형태의 사무장병원에 해당하기 위한 비의료인의 개입 정도는 그 의료기관의 시설 및 인력의 충원·관리, 개설신고, 의료업의 시행, 필요한 자금의 조달, 그 운영성과의 귀속 등을 주도적인 입장에서 처리하는 정도를 요구한 바 있는데 이와 같이 비의료인이 근로계약의 체결에 있어서도 주도적 입장에서 관리하고 개입한 사정이 보인다면 근로계약의 실질적 당사자에 해당하므로 사용자로 파악하여야 할 것이다. 즉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사무장병원의 대외적 법률관계에 있어 사무장병원의 명의자인 의료인에게 일률적으로 귀속된다고 보아서는 안 되고 개별적인 법률관계에 따라 실제 계약당사자가 누구인지에 관한 해석이 필요하다. 이는 근로계약의 사용자가 누구인지에 관하여 대법원이 관련 법규의 내용에 관계없이 실질적인 근로관계를 기준으로 하여야 한다고 한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보인다. 5. 대상판결의 검토 대상판결은 의료인과 비의료인이 체결한 사무장병원 개설 약정이 무효이므로 병원 운영과 관련하여 얻은 이익이나 취득한 재산, 부담하게 된 채무 등은 모두 일률적으로 의사 개인에게 귀속된다고 본 일부 대법원 판결들과 달리 대외적으로 비의료인이 의료인 명의로 체결한 고용계약의 귀속 주체를 개별적 법률관계에서 실제 당사자가 누구인지에 따라 판단하였다는 점에서 매우 타당한 결론이라고 생각한다. 즉 사무장병원 개설·운영 약정의 내용과 효력 여하는 비의료인이 의료인 명의로 체결한 임대차, 소비대차, 리스계약, 고용계약 등에 영향을 미치지 않으며 이들 개별적 법률관계에서 발생하는 채권·채무관계는 당해 계약의 해석에 따라 정하여지는 실질적 당사자에게 귀속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대상판결에서 다투어진 임금지급의무의 주체에 관하여 보면 원고 등이 甲을 사용자로 하여 근로계약서를 작성하였으나 실제 비의료인이 원고 등을 비롯한 X병원의 직원들을 채용한 점, 업무수행 과정에서 직원들을 구체적이고 직접적으로 지휘·감독한 점, 직원들에게 급여를 지급하였고 의료인에게도 매월 약정된 급여를 지급하였던 사정을 종합하면 명의자인 의료인이 아니라 행위자인 비의료인이 당사자로서 고용계약상 임금지급의무를 부담하는 것으로 보아야 하는바 대법원이 사무장병원의 실질적인 운영자가 누구인지, 직원들의 채용 및 근로계약서 작성 주체가 누구인지, 직원들의 업무를 지휘·감독하고 급여를 지급한 주체가 누구인지 등의 사정을 고려하여 근로계약상 임금지급의무의 귀속 주체를 결정한 것은 해당 근로계약의 실체와 부합하는 판단이라 하겠다. 백경희 교수(인하대 로스쿨)
임금
사무장
퇴직금
병원
백경희 교수(인하대 로스쿨)
2020-10-12
민사일반
지식재산권
특허사건의 사실심 변론 종결 이후 확정된 정정과 재심 사유 여부
Ⅰ. 사실관계 원고는 2015년 12월 24일 피고를 상대로 특허심판원에 '롤방충망의 록킹구조'라는 이름의 이 사건 특허발명에 대해 진보성 부재를 이유로 등록무효심판(2015당5713)을 청구하였다. 특허심판원은 심판청구를 기각하였으나 불복소송에서 특허법원은 2016년 10월 21일 진보성을 부정하면서 심결을 취소하였다. 그러자 피고는 2016년 11월 4일 상고하면서 2016년 11월 28일 문제가 된 청구항에 대해 정정심판 청구를 하였고 특허심판원이 2017년 2월 8일 정정을 받아들이는 심결을 하여 그 무렵 피고에게 송달되었다. Ⅱ. 전원합의체 판결의 요지 ① 특허가 무효라는 특허법원 판결이 상고심에 계속되어 있는 중에 해당 특허에 대해 정정심결이 확정되면 해당 판결에 대해 민사소송법 제451조 제1항 제8호의 재심사유(판결의 기초로 된 행정처분이 다른 행정처분에 의하여 변경된 때)가 있다고 보아 파기환송 해 온 종전 판례들을 변경한다. ② ⅰ) '판결의 기초로 된 행정처분이 다른 행정처분에 의하여 변경된 때'란 판결의 심리·판단 대상이 되는 행정처분 그 자체가 그 후 다른 행정처분에 의해 확정적·소급적으로 변경된 경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확정판결에 법률적으로 구속력을 미치거나 또는 그 확정판결에서 사실인정의 증거자료가 된 행정처분이 다른 행정처분에 의하여 확정적·소급적으로 변경된 경우를 말하는 것이다. ⅱ) 심결과의 관계에서 원처분으로 볼 수 있는 특허결정은 심결취소소송에서 '심리·판단해야 할 대상'일 뿐 '판결의 기초가 된 행정처분'으로 볼 수는 없다. 따라서 사실심 변론종결 후에 특허발명의 명세서 등에 대해 정정심결이 확정되더라도 판결의 기초가 된 행정처분이 변경된 것으로 볼 것은 아니다. ⅲ) 특허권자가 특허무효심판 절차에서는 정정청구를 통해 그 심결취소소송의 사실심에서는 정정심판 청구를 통해 특허무효 주장에 대응할 수 있음에도 사실심 변론종결 후 확정된 정정심결에 따라 사실심 법원의 판단을 다툴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분쟁의 해결을 현저하게 지연시키는 것으로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그 밖의 논거들에 대한 소개는 생략). ③ 이런 법리는 특허권의 권리범위 확인심판에 대한 심결취소소송과 특허권 침해를 원인으로 하는 민사소송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어야 한다. 특히 특허권에 기초한 침해금지 또는 손해배상 등을 구하는 소송에서 그 특허가 무효로 될 것임이 명백하여 특허권자의 청구가 권리남용에 해당한다는 항변이 있는 경우 특허권자로서는 특허권에 대한 정정심판청구, 정정청구를 통해 그런 무효사유를 해소했거나 해소할 수 있다는 사정을 재항변으로 주장할 수 있다. 특허권 침해를 원인으로 하는 민사소송의 종국판결이 확정되거나 그 확정 전에 정정의 재항변을 제출하지 않은 특허권자가 사실심 변론종결 후 정정심결의 확정을 이유로 사실심 법원의 판단을 다투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Ⅲ. 평석 엄밀히 살펴보면 대상판결은 두 가지 유형의 소송에 대해 정정이 미치는 영향을 언급하고 있다. 즉, ⅰ) 특허무효 등 심결취소소송과 ⅱ) 특허침해나 권리범위확인 관련 소송이다. 정정의 확정을 재심사유로 취급하지 않는 논거 역시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 정정의 확정이 '판결의 기초로 된 행정처분이 다른 행정처분에 의하여 변경된 때'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과 ⓑ 특허권자 등 당사자가 소송 과정에서 적시에 정정에 관련된 조치를 취할 수 있었음에도 이를 미루다가 사실심 변론 종결 후에 비로소 이를 내세우는 것은 민사소송법 제1조(신의성실의 원칙) 위반에 해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1. 무효심결 취소소송에 관하여 특허법이 원처분(특허등록)에 대한 다툼을 반드시 심판에 의하도록 하고 다른 형태의 불복을 허용하지 않음을 감안하면 심결에 대한 불복소송은 그 실질상 원처분에 대한 불복으로서 일체·연결성을 가지는 것으로 볼 수도 있으므로 무효심결에 대한 불복소송에서 대상판결의 ⓐ 논리는 그 자체로는 설득력이 있다. 정정제도가 특허권자에 의해 무효분쟁에서 절차 지연수단으로 악용되지 않도록 한다는 면에서 ⓑ 역시 타당한 법리 설시라 할 것이다. 대상 판결에 따르면 사실심 변론 종결 후 이루어진 정정에 재심사유를 인정하지 않고 종전 청구항을 기준으로 상고심을 진행함에 따라 해당 특허의 무효가 확정되면 정정에도 불구하고 해당 특허는 무효로 소멸하고(이기택 대법관의 다수의견에 대한 보충의견) 상고심이 원심의 결론과 달리 정정 전 특허가 유효라고 하여 원심을 파기하면 환송심은 정정 후의 특허를 기준으로 유·무효를 다시 판단하게 될 것이다. 2. 침해소송에 대하여 대상판결은 '이러한 법리는 특허권의 권리범위 확인심판에 대한 심결취소 소송과 특허권 침해를 원인으로 하는 민사소송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어야 한다'고 하여 ⓐ, ⓑ 법리를 모두 특허침해소송 등의 사실심 변론 종결 후 정정이 확정된 때에도 적용하고 있으나 이는 문제이다. ⓐ의 경우 해당 특허 자체의 유·무효가 문제 되는 무효소송과 달리 침해소송의 소송물을 생각하면 해당 특허의 유·무효와 그 내용은 '판결의 기초가 된 행정처분'일 뿐 '심리·판단해야 할 대상'이 아님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결국 침해소송 등에서는 대상판결의 법리 중 ⓑ만이 유효한 근거로 남는다고 해야 한다. 특허권자는 침해소송 과정에서 해당 특허의 무효가 예상되는 경우 이를 피하기 위해 정정심판청구(혹은 정정청구)를 할 수 있다. 또한 침해소송의 피고가 해당 특허에 무효사유가 명백함을 이유로 권리남용의 항변을 하는 경우 그에 대한 재항변 사유로서 '장차 정정을 통해 무효사유가 치유될 것이 명백하다'는 점을 내세울 수도 있다(이른바 '정정의 재항변'). 문제는 특허권자가 침해소송의 사실심 변론 종결 전까지 정정절차를 밟거나 정정의 재항변을 하지 않았다가 침해소송에서 패소한 이후 정정을 이유로 상고심에서 재심사유를 주장하는 것을 허용할지 여부이다. 대상판결은 '정정의 재항변' 개념을 정면으로 받아들이면서 ⓑ를 논거로 이를 불허하고 있다. 실제로 미국은 침해소송 판결이 확정된 이후 재심사나 정정을 통해 특허의 유·무효나 권리범위가 바뀌더라도 확정판결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으로 하고 있으며 일본에서는 특허침해 소송 판결이 확정된 후에는 해당 특허를 무효로 하거나 정정하는 심결이 확정되더라도 이를 침해소송의 재심사유로 주장할 수 없다(일본 특허법 제104조의4). 우리나라에서도 특허권자가 침해소송 과정에서 피고의 무효 주장에 대응하여 정정심판을 청구하거나 정정의 재항변을 하지 않은 채 청구항의 유지를 시도하다가 결국 무효 사유가 인정되어 청구기각을 당하자 비로소 정정심판을 청구하여 권리범위를 확보한 뒤 재심으로 판결 번복을 시도하는 것 등을 막을 필요가 있으므로 이 한도에서 대상판결의 취지는 적절해 보인다. 3. 문제점 무효심결 취소소송에 대해 앞서 본대로 대상판결의 ⓐ, ⓑ가 모두 법리상 근거는 있다고 하더라도 ⓐ 논거는 여전히 실천적 문제를 남긴다. 즉 사실심 변론 종결 이후 이루어진 정정은 일도양단적으로 배척되고 정정 전 청구항만을 근거로 원심의 당부를 판단하는 결과 상고심에서 정정 전 청구항이 무효로 확정되면 무효를 극복하기 위해 수행된 정정은 의미가 없어지고(정정과 무관하게 해당 번호의 특허는 무효로 된다고 하므로) 반대로 정정 전 특허가 유효하였다고 판단되면 오히려 정정을 통해 축소된 권리만 존속하게 되는 일도 예상된다. 권리자가 사실심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뒤늦은 정정을 할 수밖에 없었던 개별적 사정이 있더라도 일절 고려되지 않는 점 또한 문제이다. 이는 모두 상고심이 사실심 변론 종결 후의 정정에 대해 일괄적으로 재심사유를 인정하지 않고 정정 전 청구항을 기초로 판단하는 데서 비롯된다. 반면 사실심 변론 종결 후에 이루어진 정정에 관해 ⓑ의 시각을 기본으로 그 수용 여부를 판단한다면 이런 문제점은 적절히 해결될 수 있다. 예컨대 상고심 계속 중인 특허에 대해 정정이 확정되더라도 '당사자가 상소로 그 사유를 주장하였거나 이를 알고도 주장하지 아니한 때에는 그렇지 아니하다'는 재심의 보충성 규정(민사소송법 제451조 제1항 단서) 취지를 유추하거나 소송상 신의칙을 적용하여 재심사유 존부를 개별적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대법원은 특허권자가 취한 절차상 태도 등을 신의칙에 입각해 파악한 뒤 부득이한 사유가 있으면 재심사유를 인정하여 원심을 파기환송함으로써 정정 후 청구항에 따라 판단하도록 하고 그렇지 않으면 재심사유를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정정 전 청구항을 근거로 스스로 판단하게 될 것이다. 결국 사실심 변론 종결 이후의 정정을 종전 판례처럼 일률적으로 재심사유로 보거나, 대상 판결처럼 일률적으로 재심사유가 아닌 것으로 보는 대신 상고심이 이를 '개별화·상대화' 하는 셈이다. 한편 침해소송에서는 본디 대상판결의 ⓐ 논거는 적용될 여지가 없고 ⓑ 논거만이 유효함은 앞서 본 바와 같다. 요컨대 사실심 변론 종결 후 이루어진 정정의 재심사유 여부 판단 시 '특허권자 등 당사자가 소송 과정에서 적시에 정정에 관련된 조치를 취할 수 있었음에도 이를 미루다가 사실심 변론 종결 후에 비로소 이를 내세우는 것은 민사소송법 제1조(소송상 신의칙) 위반에 해당할 수 있다'는 논거(ⓑ)는 합당하지만 "정정의 확정이 '판결의 기초로 된 행정처분이 다른 행정처분에 의하여 변경된 때'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논거(ⓐ)는 법리적·실천적으로 적지 않은 문제점을 내포한 것으로 보인다. 조영선 교수(고려대 로스쿨)
특허발명
특허심판원
특허
조영선 교수(고려대 로스쿨)
2020-10-08
공정거래
부동산·건축
장기계속공사에 관련된 불법행위에서 손해배상청구권의 소멸시효
1. 사실관계 원고(국가)의 요청에 따라 조달청장이 공고한 장기계속공사에 관한 입찰에서 甲회사 공동수급체는 2009년 12월 중순경 乙회사 등과 담합한 바에 따라 입찰에 참가하여 2010년 2월 24일 낙찰자로 선정되었다. 이에 甲회사 공동수급체는 2010년 3월 24일 원고와 위 공사에 대하여 구 국가를 당사자로 하는 계약에 관한 법률(이하 '국가계약법')에 따른 장기계속공사계약의 1차분 차수별 계약을 체결하였는데(이하 '이 사건 제1차 계약') 그 계약서에 1차분 차수별 계약의 공사대금과 공사준공일 외에도 총 공사금액과 총 공사준공일을 부기하였고 그 후 2012년 1월 13일까지 차수별로 제2차 내지 제4차 계약을 체결하여 결국 총 공사금액은 당초보다 50억 원 정도가 증액된 1976억9650만 원으로 변경되었다. 원고는 2010년 3월 30일부터 2012년 12월 29일까지 피고 甲회사에게 공사대금의 대부분을 지급하였고 피고 甲회사는 2014년 7월경 이 사건 공사를 완성하였다. 그 후 공정거래위원회는 2014년 12월 12일 甲회사 공동수급체와 乙회사 등의 담합행위가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 제19조 제1항 제8호의 부당한 공동행위에 해당한다는 이유로 甲회사와 乙회사 등에게 시정명령 및 과징금 납부명령을 하였다. 2. 소송의 경과 원고는 위 시정명령 등에서 드러난 사실관계를 바탕으로 2015년 11월 13일 甲회사 등을 상대로 불법행위에 따른 손해배상청구의 소를 제기하였다. 이에 피고 甲회사 등은 원고의 손해배상채권이 총괄계약 및 제1차 계약이 체결된 때로부터 국가재정법(제96조 제1항)이 정한 5년의 소멸시효기간이 지나 소멸하였다고 항변하였고 1심 법원 및 원심 법원은 위와 같은 소멸시효항변을 받아들여 원고의 청구를 기각하였다. 이 사건 제1차 계약시에 이 사건 공사 전체에 관한 총괄계약과 1차분 차수별 계약이 동시에 성립하였고 위 각 계약을 통하여 피고 甲회사의 총 공사금액에 대한 권리의무가 확정됨으로써 그 때 총 공사금액 전부에 관한 손해가 원고에게 현실적으로 발생하였다고 본 것이다. 이에 원고가 상고하였고 대법원은 아래와 같은 이유로 원고의 상고를 받아들여 원심판결을 파기환송하였다. 3. 대법원의 판단 국가계약법상 장기계속공사계약은 우선 1차 년도의 제1차 공사에 관한 계약을 체결하면서 총 공사금액과 총 공사기간에 대한 합의(총괄계약)를 부기하는 형태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위 총괄계약은 그 자체로 총 공사금액이나 총 공사기간에 대한 확정적인 의사의 합치에 따른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사업의 규모나 공사금액·기간 등에 관하여 잠정적으로 활용하는 기준으로서 각 연차별 계약의 체결에 따라 연동된다. 따라서 총괄계약의 효력은 계약상대방의 결정, 계약이행의사의 확정, 계약단가 등에만 미칠 뿐이고 계약상대방이 이행할 급부의 구체적인 내용, 계약상대방에게 지급할 공사대금의 범위, 계약의 이행기간 등은 모두 연차별 계약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확정된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이 사건에서 甲회사 공동수급체가 국가와 총 공사금액 및 총 공사준공일을 부기하여 이 사건 공사의 제1차 계약을 체결과 동시에 총괄계약을 체결한 사정만으로는 원고가 甲회사에 지급할 총 공사대금이 구체적으로 확정되었다고 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 사정만으로 원고의 甲회사 등에 대한 손해배상채권 전부의 소멸시효가 위 제1차 계약의 체결시부터 진행하여 모두 완성되었다고 본 원심판단에는 장기계속공사계약에서 총괄계약과 차수별 계약의 관계 및 총괄계약의 효력에 관한 법리오해 등 잘못이 있다. 4. 평석 가. 장기계속공사계약에서 총괄계약의 효력에 대한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의 의미 대상판결은 대법원 2018. 10. 30. 선고 2014다235189 전원합의체 판결의 법리를 장기계속공사계약과 관련된 불법행위에 기한 손해배상청구권의 장기소멸시효의 기산점에 적용하였다. 위 전원합의체 판결에서는 장기계속공사계약에 있어서 총 공사기간의 연장과 관련된 간접비가 문제되었는데 총괄계약의 총 공사금액 및 총 공사기간은 각 차수별 계약을 체결하는 잠정적 기준에 불과하고 차수별 계약에 의하여 위 공사금액 등이 비로소 구체적으로 확정된다고 보아서 총 공사기간이 연장되었더라도 공기연장비용이 이미 차수별 계약금액에 포함되었고 그에 따라 공사가 진행되었다면 계약금액의 조정을 인정할 수 없다는 이유로 위 간접비청구를 배척하였다. 대상판결은 위 전원합의체 판결의 법리에 따라 구체적인 손해액의 확정이 차수별 계약을 통하여 확정된다는 점을 들어 각 차수별 계약시점을 위 손해배상청구권에 있어서 장기소멸시효의 기산점이 된다고 판시하였다. 나. 장기계속공사에서 총괄계약의 효력과 소멸시효의 관계 (1) 총괄계약의 법적 구속력을 인정할지 여부는 장기계속공사계약과 관련된 불법행위에 있어서 손해배상청구권의 소멸시효 기산점에 대한 논의에도 영향을 준다. 필자는 위 총괄계약 중 공사기간이나 공사대금에 대한 내용이 장차 차수별 계약에 의하여 확정될 구체적인 내용에 대한 잠정적인 기준에 불과하다는 위 전원합의체판결의 다수의견 논리에 찬성하지는 않지만 소멸시효에 관련한 부분만 보면 위 논리를 따름으로써 대상판결의 판시와 같은 결론에 비교적 쉽게 도달할 수 있는 이점이 있음을 수긍한다. 제1차 계약과 동시에 총괄계약이 체결된 사정만으로 甲회사 등에게 지급할 총 공사대금이 구체적으로 확정되었다고 볼 수 없다면 곧바로 그때 甲회사 등의 총 공사금액에 대한 권리의무가 확정되었다거나 원고의 손해가 이 시점에서 현실화되었다고 보기 어렵고 손해의 현실화는 구간별로 공사금액이 정해지거나 또는 변경된 각 차수별 계약의 체결시가 된다. (2) 그러나 위와 같은 결론에 이르기 위하여 반드시 위 전원합의체 판결 다수의견의 논리에 의할 필요가 있는지는 의문이다. 총괄계약에 의하여 당사자들은 총 공사기간과 총 공사대금을 기준으로 대금지급의무 및 공사완성의무를 확정적으로 부담하고 대상판결의 사안에서와 같이 개별 차수별 계약에 따라 공사대금이 증액되었다면 그에 따라 손해도 차수별 계약에 의하여 변경·확정되어 그 때부터 위 증액된 부분과 관련된 손해배상청구권의 소멸시효가 진행된다고 볼 수 있다. 다. 계속적 불법행위의 소멸시효 법리의 유추가능성 그런데 혹시 차수별 계약에 의하여 종래 총괄계약에서 정한 공사대금의 액수가 변경된 경우에 마지막 차수별 계약의 시점에서 공사대금 전체와 관련된 손해배상청구권의 소멸시효가 비로소 진행한다고 해석할 여지는 없을까? 이와 관련하여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계속적 불법행위에 있어서 소멸시효에 관한 논의이다. 대상 판결의 사안은 가해행위 자체가 공사도급계약의 체결로 종결되고 손해가 계속적으로 발생하는 것은 아니며 다만 손해의 구체적인 확정 및 현실화 시점이 문제될 뿐이므로 이를 계속적 불법행위로 볼 것은 아니다. 그러나 위 손해의 현실화시점이 결국 손해배상청구권의 장기소멸시효의 기산점이 된다는 점에서 보면 계속적 불법행위에 있어서 전부진행설·개별진행설·분류설과 같은 손해배상청구권의 소멸시효 기산점에 대한 논의로부터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그렇다면 계속적 불법행위의 소멸시효와 관련하여 '진행 중의 손해에 대하여는 그 진행이 정지한 때로부터 소멸시효가 진행한다'는 전부진행설의 해석론이나 이를 입법화한 유럽연합의 Directive 2014/104/EU에 따른 독일의 경쟁제한방지법의 규정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이선희 교수(성균관대 로스쿨)
공정거래
담합
장기계속공사
국가계약
이선희 교수(성균관대 로스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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