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 목격자가 용의자 한 명만을 단독으로 본 뒤에 한 범인식별 진술은 다른 사정이 없는 한 그 신빙성이 낮다고 봐야한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이 판결은 수사기관이 목격자에게 여러 명을 용의자와 함께 제시하고 목격자가 이 중 한명을 지목하는 선진 외국과는 달리 한 명의 용의자와 대질시키거나 사진을 보여주고 범인 여부를 확인하는 현재의 수사관행에 제동을 거는 것이다.
이에 따라 앞으로 수사기관은 이번에 대법원이 제시한 범인식별 진술의 신빙성 확보기준에 맞도록 수사방식을 바꾸지 않을 경우 증거능력을 인정받지 못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대법원 형사2부(주심 柳志潭 대법관)는 히로뽕을 판매한 혐의(마약류관리에관한법률위반)로 구속기소된 강모씨(32)에 대한 상고심(☞2003도7033) 선고공판에서 이같이 판시하고 징역 1년2월과 추징금 4백만원을 선고한 원심을 지난 2월27일 확정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용의자의 인상착의 등에 의한 범인식별 절차에 있어 용의자 한 사람을 단독으로 목격자와 대질시키거나 용의자의 사진 한 장만을 목격자에게 제시해 범인 여부를 확인하게 하는 것은 사람의 기억력의 한계 및 부정확성과 구체적인 상황 하에서 용의자나 그 사진상의 인물이 범인으로 의심받고 있다는 무의식적 암시를 목격자에게 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며 "따라서 이러한 방식에 의한 목격자의 진술은 그 용의자가 종전에 피해자와 안면이 있는 사람이라든가, 그러한 진술 외에도 그 용의자를 범인으로 의심할 만한 다른 정황이 존재하는 등의 부가적인 사정이 없는 한 그 신빙성이 낮다고 봐야 한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또 "목격자 진술의 신빙성을 높게 평가할 수 있게 하려면 범인의 인상착의 등에 관한 목격자의 진술 내지 묘사를 사전에 상세히 기록한 다음, 용의자를 포함해 그와 인상착의가 비슷한 여러 사람을 동시에 목격자와 대면시켜 범인을 지목하도록 해야 하고 용의자와 목격자 및 비교대상자들이 상호 사전에 접촉하지 못하도록 해야 하며, 사후에 증거가치를 평가할 수 있도록 대질 과정과 결과를 문자와 사진 등으로 서면화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여야 할 것이고 사진제시에 의한 범인식별 절차에 있어서도 기본적으로 이러한 원칙에 따라야 한다"고 설명했다.
재판부는 이어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메스암페타민을 판매한 사람이 피고인이라는) 참고인 정모씨의 진술은 범인식별 절차에서 신빙성을 높이기 위해 준수해야할 절차를 제대로 지키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 피고인이 범인일 가능성이 있다는 암시가 주어졌을 개연성이 있다는 점에서 높은 정도의 신빙성이 있다고 하기는 어렵다"며 "하지만 정씨가 메스암페타민 구입 직전 핸드폰으로 수차례에 걸쳐 통화한 사람이 피고인이라고 인정되는 점 등 부가적인 사정을 보태어 보면 범인식별에 관한 정씨의 검찰진술은 그 절차상의 하자에도 불구하고 높은 정도의 신빙성을 인정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강씨는 지난 2000년12월 부산수영동에서 정모씨로부터 4백만원을 받고 히로뽕 1백그램을 판매한 혐의로 구속기소돼 2심에서 징역 1년2월과 추징금 4백만원을 선고받았다.
대법원 관계자는 "인간의 기억력은 부정확한 면이 많고, 어떤 용의자가 범인으로 혐의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목격자가 아는 경우 목격자의 범인식별에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준다는 것이 선진외국들의 연구결과"라며 "향후 수사관행도 대법원이 제시한 기준에 맞춰 시행돼야 증거능력을 인정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