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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조라운지 커버스토리] ‘지재권 전문 로펌’ 설립 20년… 박승문 ‘다래’ 대표변호사

    “사람이 재산이라는 믿음으로 필요한 인력 확보에 전력”

    강한 기자 strong@lawtimes.co.kr 입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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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한민국 최초 지식재산권 전문로펌 '다래'가 올해 10월 설립 20주년을 맞았다. 다래는 국내외 소송·자문·출원·컨설팅 등을 아우르는 토털 서비스를 선도하며 지재권 분야 최강 로펌으로 성장했다. 다래는 "한국에 지재권 전문로펌이 필요하다"는 한 특허법원 판사의 20여년전 소망과 뚝심에서 출발했다. 바로 박승문(60·사법연수원 13기·사진) 다래 대표변호사다. 법조인이 새로운 시도에 나서는 것이 익숙치 않던 시절, 그는 선망의 대상이던 판사직을 내려놓고 새로운 터전을 일군 '프런티어(Frontier, 개척자)'다.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와 남들이 말리는 길을 개척하는 '소신'과 '고집'이 현재의 그를 만들었다. 올해 회갑을 맞은 박 대표는 "물러날 때를 알아야 한다. 65세가 되면 로펌을 후배들에게 물려줄 것"이라며 "만약 회사와 후배들이 부탁한다면 이후 5년 정도는 무보수를 조건으로 일해줄 수도 있다"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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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승문(60·사법연수원 13기·사진) 다래 대표변호사는 1999년 특허법원에서 함께 근무하던 고(故) 조용식 대표변호사(15기)와 함께 다래를 설립했다. 다래는 지재권에 특화된 변호사와 변리사를 조합해 국내외 각종 지재권 소송에서 기념비적 성과를 많이 낸 지재권 분야 대표 로펌으로 성장했다. 최근에는 맞춤형 기술 컨설팅과 엑셀러레이팅 등 신(新) 법률사업 영역을 개척하며 새로운 시장도 열고 있다.


    중학교 시절 TV ‘수사반장’에 빠지며

    정의감 키워


     다래는 법무법인과 특허법인, ㈜다래전략사업화센터 등 3개 법인으로 구성돼 있다. 박 대표는 법무법인과 특허법인 대표는 물론 특허 동향분석·공동 연구개발·기술평가 및 기술사업화·엑셀러레이팅 업무 등을 하는 다래전략사업화센터의 위원도 맡고 있다. 그는 "세 법인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갈 수 있도록 중재자·방향설정자 역할을 하고 있다"며 "다래는 특허·기술과 관련된 가장 광범위하고 전문적인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조직으로 거듭나고 있다"고 강조했다. 

     

    서울 출신인 박 대표는 한 학년 터울인 형과 다섯 살 어린 남동생 사이에서 아래 위를 두루 살피는 사려 깊은 둘째로 자랐다. 수(數)에 밝아 동네에서 수학신동으로 유명했는데, 형제가 모두 성적이 우수해 주변의 부러움을 샀다. 같은 학교에 다녔던 형과 박 대표는 전교 1~3등에게만 주어지는 성적 우수 장학금을 거듭 받게되자, 서로 번갈아 수상을 포기하며 후순위 친구들에게 장학금을 양보하기도 했다. 하지만 형과 달리 그는 고교 졸업과 함께 자신이 원하던 서울대에 진학하지 못했다. 이 경험은 그가 보다 단단해지는 계기가 됐다고 한다.

     

    검사 지원하려고 했지만

    주변권유에 판사의 길로


    "저요, 공부 잘했습니다. 그런데 대학입시에 실패했습니다. 제게는 큰 시련이었습니다. 패배감과 열등감 속에서 허우적 거렸습니다. 부모님께서 재수생 아들을 뒀다는 말을 듣게 될 것이 무엇보다 싫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대학에 진학하는 대신 사법시험 합격으로 실패를 만회하겠노라 다짐했죠. 그렇지만 돌아보면 그 시련이야말로 제 인생에 큰 약이 됐습니다. 1년간, 남보다 빨리, 인내와 겸손을 배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능동적인 태도가 삶에서 얼마나 큰 성과를 내는지 몸에 새겼습니다."

     

    그는 서울의 한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고시반에 들어가 사법시험 준비에 돌입했다. 캠퍼스의 낭만을 뒤로 하고 옆구리에 법서를 낀 유난스러운 신입생으로 학내에서 화제가 됐다. 하지만 그해 여름 부모님 몰래 반수(半修)의 길을 선택했다. 낮에는 전공수업을 듣는 대학생으로, 밤에는 독서실에서 대학입시를 준비하는 수험생으로 동분서주했다. 이듬해 높은 성적으로 서울대 법대에 합격하고 이후 준비 2년 만에 사법시험에 합격하면서 그는 다시 한번 화제가 됐다.

     

    98년 개원 특허법원 판사 중 1명

     전문성에 눈 떠

     

    "사법연수원을 수료하고 1983년 최전방 강릉 전투비행단 공군 검찰관으로 부임했습니다. 가자마자 중위가 하사를 폭행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하사를 의무대에 보내고, 군의관에게 상해진단서 발급을 요청했더니 분위기가 이상해지더군요. 초임 법무관이 군의 관행을 모르고 지나치게 나선다고 본 것입니다. 결국 중위는 정식 입건 대신 가벼운 내부징계를 받았습니다. 이후 술을 마시고 외부에서 사고를 친 장교를 구속시켰다가 눈총을 사기도 했습니다."

     

    법조인으로서 정의와 젊은 날의 혈기를 품었던 그였지만 어린 시절에는 내성적이며 수줍은 성향으로 별명이 '새색시'였다고 한다. 항상 남을 배려하면서 어려운 친구를 도우려 애썼다. 누가 약한 친구를 괴롭히면 끝까지 따라가 지적할 만큼 강단도 있었다. 박 대표는 "어릴적 꿈은 공학박사였지만, 중학생 때 TV 프로그램 '수사반장'에 푹 빠지면서 정의감을 키웠다"고 했다. 군법무관을 마치고 '검사'를 지원하려 했지만 주변의 권유로 판사의 길을 걷게 됐다.

     

    ‘불혹’에 새로운 도전

     故 조용식 대표와 ‘다래’ 설립

     

    1986년 인천지법 판사로 법관이 된 박 대표는 원칙을 지키되, 법 앞에 만인은 평등하고 누구도 특별대우나 차별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자신의 신념을 관철시키려 애썼다. 박 대표는 "범죄별 양형기준표가 잘 정리돼 있지 않아 법관에 따라 양형 편차도 컸던 시기였다"며 "안타까운 처지의 피고인의 사정을 살피기 위해 노력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거짓말을 하면서 무죄를 주장하는 사람은 논리정연하게 혼을 내는 편이었다"며 "기록을 꼼꼼히 살폈다"고 회상했다.

     

    사법연수원 시절 특허청 단기근무에 지원하기도 한 박 대표는 특허법원 근무를 발령 받기 전 대학원에서 관련 교육을 받으며 지재권 분야와 인연을 맺었다. 그러다 1998년 개원한 특허법원 1호 판사 중 한 명으로 부임했다. 밤낮으로 재판과 연구에 매진하면서 본격적으로 전문성에 눈을 떴다. 재판부별로 배정된 기계·전자·화학 분야 기술심리관에게 기술 설명을 들었고, 특히 특허청구범위에 대한 해석 등 관련 전문지식과 역량을 길렀다. 당시 특허법원에는 총 3개의 재판부가 있었는데, 이영애(71·3기) 전 춘전지법원장이 그의 부장판사였고 좌배석이 고(故) 조용식 대표였다.

     

    특허사건은

    기술과 법의 완전한 이해 필요한 영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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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발명을 했음에도 특허청구범위를 제대로 기재하지 않거나 너무 구체적으로 기재한 탓에, 권리를 충분히 보호받지 못하거나 오히려 적게 보호 받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사회 전반에 지재권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도움을 줄 수 있는 전문가가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변리사 등 전문가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도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특허법원 개원 당시 사건 대부분의 소송대리는 변리사들의 영역이었고 변호사가 맡는 일은 드물었습니다. 하지만 특허사건은 기술은 물론 법에 대해서도 완전한 이해가 필요한 영역이었기에 변호사와 변리사의 협업이 시너지 효과를 낼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런 충분한 인적구성을 갖춘 지재권 전문 로펌이 만들어지면 더욱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고, 우리 특허소송 전반을 한단계 더 업그레이드 시킬 길이라고 믿었습니다."

     

    그가 불혹(不惑)의 나이에 새로운 도전에 나선 이유다. 그는 1999년 조용식 대표, 윤정열·김정국 변리사(당시 특허심리관)를 설득해 함께 다래를 설립했다. 지재권을 전문으로 다루는 로펌이 설립된 것도 처음이었지만, 변호사와 변리사가 권리와 책임을 동등하게 나누고 함께 법인을 설립한 점도 당시로서는 이례적이어서 화제가 됐다. 현재 윤 변리사는 다래 특허법인의 대표를, 김 변리사는 다래에서 전기·전자 영역을 책임지고 있다. 직원을 포함해 13명으로 출발한 다래는 현재 150명의 식구를 거느리고 있다. 다래가 설립된 1999년은 박 대표가 세례를 받고 토머스 모어로 거듭난 해이기도 하다. 

     

    초창기 우여곡절도 많았다. 지재권 전문 로펌이라는 개념은 법조계에서 생소했다. 무모한 도전이라며 만류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는 머뭇거리는 기술전문가를 영입하기 위해 열 장이 넘는 장문의 편지를 보내 설득했다. 그리고 법원에서 자신과 조 대표의 사표 수리가 지연돼 난관에 봉착하기도 했다.


    변호사·변리사의 협업이

    시너지 효과 낼 수 있어

     

    "무한정 기다릴 수가 없어 윤관 대법원장께 장문의 메일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조 판사(조용식 대표)의 사표가 수리될 때까지는 두 변리사와 제가 구두가 닳도록 돌아다니며 개업 준비를 했죠. 서울에 오피스텔을 얻어 놓고 모여서 어떤 로펌을 만들지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습니다. 사무실을 구하기 전 한 달간 바른에서 신세를 지기도 했죠. 우리 네 사람이 20년간 혼연일체가 돼 특별한 갈등 없이 오직 다래의 성장을 위해 함께 일해올 수 있었던 것은 축복입니다. 무엇보다 사람이 재산이라는 믿음으로 적재적소에 필요한 인력을 두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특히 오랜기간 특허소송 업무를 수행하면서 변리사들의 탁월한 검색 능력과 해결 능력은 큰 힘이 됐습니다. '다래'라는 이름은 제가 제안했는데, 순우리말이라 입 안에 혀가 구르는 느낌도 좋습니다. '다 올래? 많이 오세요!'라는 뜻이 되고, 일본어로 하면 '누구든지 오세요'라는 의미도 되지요."

     

    박 대표는 특허를 무기로 한 외국기업의 공세를 받던 우리 기업들을 많이 대리하면서 법조계와 산업계에서 '국내 토종 지킴이'라는 평가를 받았을 때와, 중소기업의 생사가 걸린 소송을 대리해 승리한 덕분에 해당 회사 직원들이 계속 근무할 수 있게 됐을 때, 코스닥 상장을 목전에 둔 여러 기업들을 상대로 상장저지를 위해 특허소송을 제기한 경쟁업체의 시도를 무력화했을 때 "다래를 만들기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고 회상했다. 그러면서 "그와 같은 승리와 성과의 뒷면에는 변호사와 변리사 등 전문가의 완벽한 협업과 성과 공유라는 나름의 경영철학이 굳게 작동했다"고 설명했다.

     

    사건이 만들어지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변화에 맞춰

    새로운 법률서비스 영역 개척 필요

     

    박 대표는 "사건이 만들어지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사회 변화, 환경 변화에 발맞춰 새로운 법률서비스 영역을 끊임없이 개척하고 그것을 고객에게 어필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로펌 구성원들 간 기계적 결합이 아닌 화학적 결합을 위한 투자와 전문가 영입에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20년 전 다래를 설립했을 때 수임료보다 요즘 수임료가 더 떨어졌다는 인상도 받습니다. 반면 직원 급여는 2.5배가량 상승했습니다. 변호사 수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공급과잉을 이뤘고, 국가경제 사정의 어려움도 만만치 않습니다. 각 로펌에서도 같은 고민이 깊어지고 있으리라 짐작합니다. 특히 지금과 같은 변호사 양성 제도 아래에서 법률시장 상황은 계속 악화될 가능성이 높고, 국내 로펌업계 발전도 쉽지 않겠죠. 이제 로펌도 살아남기 위해 새로운 상품, 더 나은 서비스를 만들어내야 합니다"


    청년변호사들

    ‘그 분야 최고’ 꿈 갖고 도전해야


    그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정도경영'을 목표로 세우고, 공동설립자들과 이 원칙을 굳게 지켜왔다. "이제는 쉬고 싶다"면서도 4차산업혁명 등 최근의 기술과 사회 변화를 주제로 이야기 할 때는 눈이 반짝였다. 청년변호사들을 향해서는 "일반의가 아닌 특정 분야의 전문의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해달라"며 "과거에 비해 시장 환경이 좋지 않고 미래가 밝지 않아 걱정이 많겠지만, 'V.I.P. 변호사'가 되기를 권한다"고 말했다. 특정 분야 최고변호사가 되겠다는 꿈(Vision)을 갖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자기개발(Innovation)에 최선을 다하며, 매사에 열정(Passion)적으로 일 한다면 큰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의미다.


    "매출누락, 안 했습니다. 세무조사, 겁나지 않습니다. 가압류 신청서 등 간단한 서류절차도 변호사 직접하는 것이 설립 초기부터 지켜온 우리의 원칙입니다. 브로커가 전화를 하면 들어보지도 않고 전화를 끊도록 직원들을 교육했습니다. 치열하게 살았고, 전문영역을 발굴했고, 큰 돈을 벌 수도 있었겠지만 부끄럼 없이 회사를 운영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로펌을 이끌다보면 이런저런 일이 있기 마련입니다. 제가 알지 못한 가운데 상처를 준 일도 많을 것이라 짐작합니다. 태평양·율촌 등 큰 로펌 설립자들께서 한창 일할 수 있는 나이에 후배들을 위해 로펌을 물려주고 떠나는 모습이 감동적이었습니다. 저도 실천할 것입니다. 누구보다도 다래를 사랑하고 발전을 기원하니까요. 다래는 제 것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직원들 것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