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조정실에 들어가면서
저명한 암 전문 외과의사 한 분은 수술 환자를 회진할 때 웃는 얼굴로 환자를 대하는 것을 철칙으로 하고 있다고 한다. 그것이 환자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병의 회복에 도움을 주기 때문이리라.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을 대하여야 하는 조정위원에게도 그대로 들어맞는 말이다. 특히, 이번 사건의 원고는 매우 딱한 처지에 놓인 사람이기에 따뜻한 말 한 마디와 밝은 표정이 더욱 필요하다고 생각되었다. 그런데 오늘 사건의 성격은 어떠한가. 조정이 성공할 수 있으려면 어느 정도 밥이 익어야 하는데, 아직은 생쌀을 물에 담그어 놓은 것 같은 느낌이다. 조정안 도출을 위한 자료가 거의 제출되어 있지 않은 까닭이다. 아무래도 오늘 조정 성립은 어려울 듯싶다.
2. 사안의 내용
원고는 젊은 나이에 바레인으로 가서 간호사로 일하다가 환갑을 맞아 고국을 방문하였다. 지하철을 타고 가던 중 사고로 멈추어 선 전동차에서 철로 위로 내려서다가 발목 골절상을 입었다. 치료를 받았지만 여전히 목발을 짚고 다녀야 했고, 손해배상에 관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아 마음고생 끝에 소송을 제기하였다. 조기 조정에 회부된 사건의 기록을 보니 원고는 장래 치료비와 위자료 이외에 원고를 간호하기 위하여 바레인에서 날아 온 남편과 아들의 항공료 및 국내 체재비까지 청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손해의 범위와 관련하여 필요한 자료는 거의 제출하지 않았다. 피고는 사고 발생과 관련한 피고의 잘못을 인정하면서도 원고의 과실이 적지 않고 장래의 치료비 인정을 위하여 감정이 필요함을 지적하고 있었다.
3. 조정실 안에서
조정실에 들어서니 중동 사람으로 보이는 어른과 아이가 원고와 함께 앉아 있었다. 원고의 남편과 아들이다. 조정실 안의 모든 사람에게 부드러운 표정으로 목례를 한 뒤, 원고에게 다친 데는 어떤지 물었다. 원고는 대번에 피고 측의 무성의를 탓하면서, 일주일 뒤에 바레인으로 돌아가는데 다시는 고국에 발을 들여놓지 않겠다고 하였다. 조정위원은 오죽 마음이 상하였으면 그렇게까지 말씀하시겠느냐고 하면서 원고의 입장에 십분 공감을 표시하는 한편, 담당직원과 대리인(변호사)이 함께 출석한 피고 측에는 원고 측의 특수한 사정을 헤아려 조기에 사건을 매듭지을 수 있도록 협조하여 줄 것을 당부하였다. 원고의 응어리가 서서히 풀리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슬람교 신자로서 살고 죽는 것은 절대자의 뜻에 맡기겠으나, 사는 동안 고생 안 하도록 장래 치료비만큼은 받아야 되겠다고 하였다. 다행히 장래 치료비 예상액이 나와 있는 영문 소견서 한 통을 꺼내 제출한다. 손해배상의 범위와 관련한 조정위원의 법리 설명을 수긍하여 이제 장래 치료비와 위자료 문제로 쟁점이 좁혀지나 했더니 이번에는 피고 측에서 기왕에 피고가 부담한 입원치료비중 원고가 상급 병실에 입원하여 부담하게 된 부분은 원고가 부담하여야 한다는 새로운 이슈를 제기하였다. 진료행위의 성질상 상급 병실에 입원하여 진료를 받아야 하거나, 일반 병실이 없어 부득이 상급 병실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는 등의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상당인과관계가 있는 손해라고 할 수 없음을 설명한 뒤, 본격적으로 양측의 입장을 조율하였다. 다행히 원고는 장래의 치료비 전액을 지급받되 나머지 청구는 하지 않는 것으로, 피고는 손해액에 대한 더 이상의 다툼과 과실상계 주장을 하지 않는 것으로 물러섰다. 피고의 사정상 조정을 갈음하는 결정을 하기로 하면서, 조정이 성립되는 경우 원고가 돈을 받는 것도 챙겨 주어야 했다. 돈을 받아 원고에게 보내줄 사람의 은행계좌번호를 알아내게 한 다음 결정내용에 넣어 주었다. 피고가 이의를 제기하여 사건이 소송으로 넘어 갈 경우가 있을 수 있음을 일러 주고, 그에 대비한 국내 우편물 수령 장소의 신고, 대신 소송에 나가줄 사람에 대한 소송대리허가신청 등에 관한 서류들을 하나하나 챙겨 주었다. 말이 안 통해 궁금해 못 견뎌 하는 원고의 남편과 아들에게 간간이 진행 상황에 대하여 설명하여 주는 것도 조정위원이 할 일이었다.
4. 조정실을 나서면서
원고의 남편은 자기가 바레인에서 의사로 일하고 있다며, 조정위원더러 안내를 잘 해 드리겠으니 바레인을 꼭 한번 다녀가라고 진지하게 말하였다. 조정위원은 웃으면서 원고에게, “이제 마음이 다 풀렸으니 고국에 또 다녀가실 거지요?” 하고 물었다. 원고가 밝은 낯으로 “그럼요”라고 말을 받는다. 조정실을 나서면서, “오랜만에 고국으로 친정나들이 한 딸에게 꼭 필요한 것들을 챙겨 들려 보낸 때의 느낌이 바로 이런 걸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맞춤형 분쟁 해결이 가능한 조정제도, 그것을 필요로 하는 많은 사람들은 처음부터 조정제도를 이용하고 있을까. 그렇지 못하다면 숙제의 해결은 사법 정책 당국의 몫”이라는 생각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