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Legaledu
  • 법률신문 법률정보

    법조회고록

    밤나무 검사의 자화상 (15-1)

    3부 채색(彩色) ⑮ 짧고도 길었던 6개월

    박솔잎 기자 desk@lawtimes.co.kr 입력 :
    글자크기 : 확대 최소
  • 인쇄
  • 메일보내기
  • 기사스크랩
  • 스크랩 보기
  • 2022_song_book.jpg

     

    전국 검찰의 1/3 규모였던 공룡 같은 지방검찰청


    서울지방검찰청 검사장 -Ⅰ

    (1993. 3. 17. - 1993. 9. 20.)

     

     

    1993년 2월 김영삼 대통령이 대한민국의 제14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김 대통령의 문민정부(文民政府)가 내건 대한민국의 국정지표는 4개였다. 깨끗한 정부, 튼튼한 경제, 건강한 사회, 통일된 조국, 이것이다. '깨끗한 정부' 이 다섯 글자는 많은 뜻을 함축하고 있음을 알았다. 대통령으로 취임하자마자 전격적으로 금융실명제가 단행됐다. 곧이어 공직자 재산등록제의 내용이 공표됐다. 가히 혁명적이라 할 만한 조치였다.


    검사장급 이상의 검찰 간부를 포함한 정부의 차관급 이상을 대상으로 실시된 이 공직자 재산등록제는 이미 그 자체로서 수많은 고위공직자의 퇴진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내가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직에 있을 때 이미 재산등록제가 시행돼 재산 등록을 마친 수많은 공직자의 재산에 관한 숱한 내용의 기사가 각종 매체에 홍수처럼 쏟아지기에 이르렀다. 걷잡을 수 없는 질풍과 노도가 이미 몰아닥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많은 검사장급의 인사가 이런 공직자 재산공개의 문턱에 걸려 넘어져 옷을 벗고 야인이 됐다.


    1993년 3월 8일 문민정부 출범 후 두 번째 법무부 장관으로 현직 검찰총장인 김두희(金斗喜) 씨가 발탁됐다. 문민정부가 출범하면서 2월 26일 초대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됐던 분이 자녀의 외국 유학에 관련된 불미스러운 내용의 보도로 인해 임명된 지 10일 만에 사퇴함으로써 벌어진 일이다. 한마디로 '참사(慘事)'였다.

     

    181467.jpg
    현재의 서울중앙지방검찰청 <사진=대검찰청 박현철 대변인>

     

    이 일을 두고 내가 '참사'라고 쓴 이유가 있다.


    대통령이 한촌에서 밭 가는 촌부나 나물 캐는 아낙네를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하더라도 이를 위법한 것이라 할 수 없다. 그러나 검찰총장으로 임명되려면 법률의 엄격한 규정에 따라 그 직을 수행할 만한 자격과 능력을 갖춰야 한다. 또, 검사들이 모두 우러러 존경할 만한 인품을 갖춘 검사여야 한다.

     

    그뿐인가? 법무부 장관이 대통령에게 검찰총장의 임명을 제청하려면 국무회의에 그 임명제청안을 상정하여 의결을 거쳐야 한다. 대통령이 임명하는 공직 중 이런 절차를 거쳐야 하는 보직은 검사인 검찰총장과 군인인 합참의장, 3군의 참모총장뿐이다. 이 5개의 보직은 국가의 존립과 명운을 좌우하는 직책이기 때문이다. 같은 장관급인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을 어떻게 하나의 저울로 달 수 있겠는가?


    말이 발탁일 뿐, 이런 참사의 결과로 세 번째 임기제 검찰총장으로 임명돼 겨우 3개월을 지냈던 김두희 씨가 법무부 장관에 기용됐다. 이것이 좋지 않은 선례가 되어 반드시 지켜져야 할 검찰총장의 임기제가 인사권자의 자의에 따라 번번이 농락당하는 검찰의 불행한 역사가 기록으로 남게 된 것이다.


    그와 같은 날 검찰총장으로 임명된 사람은 고등고시 고시 15회 출신으로 김두희 검찰총장과 같은 날짜의 인사 발령으로 대검찰청 차장검사직에 있던 박종철(朴鍾喆) 씨였다. 따라서 그의 재직 기간도 검찰총장 김두희 씨와 같은 3개월이었다. 많은 검찰 간부가 이런저런 사유로 검찰을 떠난 뒤였다.

     

    곧이어 검사장급 이상의 검사를 대상으로 대대적인 검찰 인사가 단행됐다. 김두희 장관이 법무부 장관으로 취임한 지 10일이 지난 1993년 3월 17일이 그날이다. 이 날짜의 인사 발령으로 내가 서울지방검찰청의 제33대 검사장으로 부임했다. 나와 같은 날의 인사 발령으로 김도언(金道彦) 대전고등검찰청 검사장이 박종철 씨의 후임으로 대검 차장검사직에 전보됐다.


    대한민국 검찰의 핵이라 할 만한 서울지방검찰청의 검사장으로 발령받고 보니, 개인적으로는 영광된 일이었으나 그 직을 어떻게 수행할 것인지 스스로 생각해 봐도 책임감만이 어깨를 짓누를 뿐, 앞이 막막해지는 느낌이었다. 서울지방검찰청의 검사장이란 자리가 이렇게 갑자기 내게 오리라고는 사실 크게 기대하지 못하고 지냈기 때문일 것이다.


    나의 검사장 발령 날짜인 그날 9시에 서울고·지검의 서초동 청사 대강당에서 나의 취임식이 열렸다. 그 당시는 대검찰청의 신청사는 준공되지 못하였으나 서울지방검찰청은 서초동의 신청사에 입주해 있던 때였다. 취임식장에서 낭독한 나의 취임사는 어디에 두었는지 찾지 못하여 그 자료가 내게 남아 있지 않았는데, 나는 오랜 세월 뒤에 다시 이를 읽을 수 있었다. 어떤 사연일까?


    내가 검찰을 떠난 먼 훗날 나의 대학 동기생 한 사람이 서울지방검찰청의 검사장으로 취임했다. 내가 법제처장으로 재직할 때였다. 이 사람이 나의 취임사를 감명 깊게 들은 기억이 있었던지, 부임하기 전에 서울지방검찰청에 연락해 송종의 검사장의 취임사 내용을 알고 싶으니 그 취임사를 복사해 보내 달라고 지시했던 모양이다.


    그 지시에 따라 제대로 활자화된 나의 취임사의 사본이 즉시 그에게 전달됐다. 그가 자기의 취임사에 참고할 만한 내용이 있는지 사전에 알아보기 위해 이런 조치를 취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나의 취임사를 읽고 난 소감을 내게 전해 옴으로써 이 취임사가 서울지검에 보존된 것을 비로소 알게 된 나는 서울지검에 이를 보내 달라고 요청하여 이 취임사 전문이 내게 돌아온 것이다.


    임기제 3대 검찰총장인 김두희 씨
    3개월 만에 법무부 장관으로
    취임 10일 만에 대대적 검찰 인사로
    서울지방검찰청 검사장으로 부임
    생각하지도 못한 인사에 앞이 막막

     

    그가 내게 전해 온 말은 다음과 같다.


    서울지검장으로서 멋진 취임사를 남기고 싶어서 송 검사장의 취임사를 참고로 보내라 했다. 읽고 보니 안 읽은 것만 못했다. 흉내 내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 몇 구절 잘못 인용하다가는 뒷날 무슨 비난을 받을지 알 수 없더라. 내게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한동안 머리만 혼란스러워서 혼났다. 이런 취지의 농담이었다.


    어슴푸레한 기억을 되살려 보니, 취임식 후 내가 볼펜으로 썼던 취임사를 총무부장 아니면 사무국장에게 주면서 이를 보존할 수 있다면 보존하라고 지시했던 것 같다. 착실한 어떤 직원이 이 취임사를 활자로 잘 찍어서 보존하였기 때문에 후임 검사장도 이를 볼 수 있었으니 자료의 보존이 왜 필요한지 잘 알게 해 주는 사례라 할 것이다.


    이 취임식이 끝난 다음 서울지방검찰청 창설 이래 최초이며 최대라 할 만한 거창한 행사가 열렸다. 취임식에 참석했던 서울지방검찰청 본청의 전 직원은 물론, 다섯 개 산하 지청의 지청장과 사무관급 이상의 간부가 검사장에게 개별적으로 그의 관등성명을 말하면서 검사장과 인사를 나누는 일종의 신고식이었다.


    내가 이런 의례를 사무 당국에 지시한 특별한 이유가 있다. 내가 덕수궁 옆 검찰 종합청사에서 서울지검 특수 제1부장으로 근무할 당시 이종남 검사장께서 내 사무실을 찾아오셨다가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한 직원의 실수로 문전박대를 당하고 돌아서야 했던 그런 어처구니없는 사례가 다시 발생될 소지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사전 조치였다.


    그런데 이런 행사를 준비토록 사무국장에게 미리 지시했더니, 그런 전례도 없었거니와 신고 대상 인원이 너무 많아서 물리적으로도 거의 불가능할 것이라 했다. 게다가 오랜 시간 시종 꼿꼿하게 서서 모든 직원을 순차적으로 면접하면서 악수하는 일이 결코 쉬운 게 아니니 다시 잘 생각해서 결정하시라는 것이 그의 조언이었다.


    그 인원의 숫자를 내가 자세히 기억하지 못하고 있으나 아마 수백 명이었을 것이다. 전국 검찰공무원의 3분의 1 이상이 근무하는 기관이 서울지방검찰청이었기 때문이다.


    취임식 후 본·지청 직원 대대적 신고식
    본청 전직원 지청 간부 등 대상자 수백 명
    신고받는 도중 화장실도 못가 죽을 고생
    생각 없는 고집으로 자초한 ‘자업자득’
    “귀중한 시간 허비”… 돌아보면 등골 서늘

     

    취임식 직후부터 시작된 이 행사가 장장 몇 시간 동안 이어져 점심시간을 훨씬 넘어서야 끝났다. 행사 도중 내 방광이 계속 S.O.S를 보내오고 있었으나 이 행사는 그런 이유로 도중에 중단될 수 없는 중대한 행사였으니 딱한 노릇이었다. 직원의 신고를 받는 도중 어떻게 화장실에 갈 수 있었겠는가? 말 그대로 죽을 고생을 하며 이 행사를 끝냈다.


    전무후무한 일이라는 것이 때로는 이런 것이므로 깊은 생각 없이 고집을 부리면 이런 고초를 겪게 되는 것이다. 자업자득이란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이다. 이 많은 직원이 장사진을 이루며 나를 보기 위해 허비한 그 귀중한 시간은 누가 어떻게 보상할 것인가? 등골이 서늘해지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나의 단호한 결의를 보여 주는 취임사를 진지하게 들었던 검사들이 이를 어떻게 느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검사장직에 취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부터 번뜩이는 칼을 찬 장수들이 볼만한 칼춤을 추기 시작했다. 특별수사 각부와 강력부의 칼춤이 있을 것으로는 당연히 예상했으나 공안부의 사정 수사가 이어지는가 하면, 밤낮없이 경찰 송치 사건에 매달려 퇴근을 제대로 못 하던 형사부까지 나서서 기획수사란 이름으로 대학 입시 부정에 관한 대대적인 사정 작업이 벌어지게 됐다.


    이 대학 입시 부정에 관한 수사가 사회적으로 어떤 파장을 일으키는지에 대해서는 이미 나의 서울지검 특별수사부장 시절의 기록으로 대강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날 그 수사 담당 형사 제3부장이 여러 사람에 대한 구속 사유를 종합적으로 설명한 다음, 별말 없이 나의 절친한 친구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의 결재 서류를 내게 내밀었다. 나도 아무 말 없이 그 결재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181467_0.jpg

    잠시 후 그는 "이 사람이 검사장님 친구가 맞습니까?"라고 물었다. 나는 "그렇다.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거냐?"라고 말하며 웃었고, 그도 웃으며 검사장실을 나갔다. 먼 훗날 노무현 대통령의 정부에서 검찰총장직에 임명된 송광수(宋光洙) 부장검사가 그 사람이다.(계속)



    <정리=박솔잎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