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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문] 밤나무 검사의 자화상 (15)

    3부 채색(彩色) ⑮ 짧고도 길었던 6개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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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국 검찰의 1/3 규모였던 공룡 같은 지방검찰청

    지검을 떠났으나 대검에 못 간 검사장의 사표


    서울지방검찰청 검사장

    (1993. 3. 17. ~ 1993. 9. 20.)


     

    1993년 2월 김영삼 대통령이 대한민국의 제14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文民政府)가 내건 대한민국의 국정지표는 4개였다. 깨끗한 정부, 튼튼한 경제, 건강한 사회, 통일된 조국, 이것이다.


    ‘깨끗한 정부’ 이 다섯 글자는 많은 뜻을 함축하고 있음을 알았다. 대통령으로 취임하자마자 전격적으로 금융실명제가 단행되었다. 곧이어 공직자 재산등록제의 내용이 공표되었다. 가히 혁명적이라 할 만한 조치였다.


    검사장급 이상의 검찰 간부를 포함한 정부의 차관급 이상을 대상으로 실시된 이 공직자 재산등록제는 이미 그 자체로서 수많은 고위공직자의 퇴진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내가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직에 있을 때 이미 재산등록제가 시행되어 등록을 마친 수많은 공직자의 재산에 관한 숱한 내용의 기사가 각종 매체에 홍수처럼 쏟아지기에 이르렀다. 걷잡을 수 없는 질풍과 노도가 이미 몰아닥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본인의 재산이 아니라 부인이 친정집으로부터 물려받은 재산도 그 등록 내용이었으므로 고위공직자가 이유 여하간에 오직 재산이 너무 많다는 이유만으로도 사표를 내기에 충분한 국민정서였던 것이다. 특히 검찰에 피해가 커서 많은 검사장급의 인사가 이런 공직자 재산공개의 문턱에 걸려 넘어져 옷을 벗고 야인이 되었다.

     

    1993년 3월 8일 문민정부 출범 후 두 번째의 법무부 장관으로 현직 검찰총장인 김두희(金斗喜) 씨가 발탁되었다. 문민정부가 출범하면서 2월 26일 초대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던 김영삼 대통령의 경남고등학교 후배인 박희태(朴熺太) 씨가 자녀의 외국 유학에 관련된 불미스러운 내용의 보도로 인해 임명된 지 10일 만에 사퇴함으로써 벌어진 일이다. 한마디로 ‘참사(慘事)’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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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서울중앙지방검찰청 <사진=대검찰청 박현철 대변인>

     

    이 일을 두고 내가 ‘참사’라고 쓴 이유가 있다.


    대통령이 한촌에서 밭 가는 촌부나 나물 캐는 아낙네를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하더라도 이를 위법한 것이라 할 수 없다. 그러나 검찰총장으로 임명되려면 법률의 엄격한 규정에 따라 그 직을 수행할 만한 자격과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또, 검사들이 모두 우러러 존경할 만한 인품을 갖춘 검사여야 한다.


    그뿐인가? 법무부 장관이 대통령에게 검찰총장의 임명을 제청하려면 국무회의에 그 임명제청안을 상정하여 의결을 거쳐야 한다. 대통령이 임명하는 공직 중 이런 절차를 거쳐야 하는 보직은 검사인 검찰총장과 군인인 합참의장, 3군의 참모총장뿐이다. 이 5개의 보직은 국가의 존립과 명운을 좌우하는 직책이기 때문이다. 같은 장관급인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을 어떻게 하나의 저울로 달 수 있겠는가?


    말이 발탁일 뿐, 이런 참사의 결과로 세 번째 임기제 검찰총장으로 임명되어 겨우 3개월을 지냈던 김두희 씨가 법무부 장관에 기용되었다. 이것이 좋지 않은 선례가 되어 반드시 지켜져야 할 검찰총장의 임기제가 인사권자의 자의에 따라 번번이 농락당하는 검찰의 불행한 역사가 기록으로 남게 된 것이다.


    그와 같은 날 검찰총장으로 임명된 사람은 고등고시 고시 15회 출신으로 김두희 검찰총장과 같은 날짜의 인사 발령으로 대검찰청 차장검사직에 있던 박종철(朴鍾喆) 씨였다. 따라서 그의 재직 기간도 검찰총장 김두희 씨와 같은 3개월이었다. 많은 검찰 간부가 이런저런 사유로 검찰을 떠난 뒤였다.


    곧이어 검사장급 이상의 검사를 대상으로 대대적인 검찰 인사가 단행되었다. 김두희 장관이 법무부 장관으로 취임한 지 10일이 지난 1993년 3월 17일이 그날이다.

     

    이 날짜의 인사 발령으로 내가 서울지방검찰청의 제33대 검사장으로 부임했다. 나와 같은 날의 인사 발령으로 김도언(金道彦) 대전고등검찰청 검사장이 박종철 씨의 후임으로 대검 차장검사직에 전보되었다. 그는 내가 대전지방검찰청의 검사장직을 마치고 중앙수사부장으로 올 때 발족된 대전고등검찰청의 초대 검사장으로 부임하여 그 직에 있던 사람이다. 대전고·지검 신축청사는 나의 대전지방검찰청 검사장 재임 중 추진되었고, 고등검찰청 검사장의 관사도 그 무렵 건축되었다. 지방 검사장인 내가 그 관사의 현장 건설본부장 역할을 하며 추진한 내용이 그렇다.


    대한민국 검찰의 핵이라 할 만한 서울지방검찰청의 검사장으로 발령받고 보니 개인적으로는 영광된 일이었으나 그 직을 어떻게 수행할 것인지 스스로 생각해 보아도 책임감만이 어깨를 짓누를 뿐, 앞이 막막해지는 느낌이었다. 서울지방검찰청의 검사장이란 자리가 이렇게 갑자기 내게 오리라고는 사실 크게 기대하지 못하고 지냈기 때문일 것이다.


    인사 발령이 공표된 즉시 중앙수사부장실의 책상에 앉아 취임사를 써 내려갔다.


    당시 나의 사무실은 현재의 대검찰청 청사가 아니라 서울 중구 서소문동에 있던 과거의 검찰 종합청사였다. 서울고등검찰청과 서울지방검찰청이 서초동의 현 검찰청사로 이전한 뒤 그 청사에는 대검찰청과 서울지검 서부지청이 함께 들어 있었다.


    나의 서울지검장 발령 날짜인 그날 9시에 서울고·지검의 서초동 청사 대강당에서 나의 취임식이 열렸다. 그 당시는 대검찰청의 신청사는 준공되지 못하였으나 서울지방검찰청은 서초동의 신청사의 입주해 있던 때였다.


    그날 나의 취임사는 서울지검장으로 부임하기 전에 매듭지어야 할 중앙수사부장으로서의 잔무 처리가 너무 바빠서 활자화하지 못하고 내가 직접 볼펜으로 써서 취임식장에서 그대로 낭독했던 것으로 기억에 남아 있을 뿐이다. 검찰을 떠날 때까지 이 취임사는 어디에 두었는지 찾지 못하여 그 자료가 내게 남아 있지 않았는데, 나는 오랜 세월 뒤에 다시 이를 읽을 수 있었다. 어떤 사연일까?


    내가 검찰을 떠난 뒤 사시 8회 합격자로서 나의 대학 동기생 한 사람이 서울지방검찰청의 검사장으로 취임했다. 내가 법제처장으로 재직할 때였다. 이 사람이 나의 취임사를 감명 깊게 들은 기억이 있었던지, 부임하기 전에 서울지방검찰청에 연락하여 송종의 검사장의 취임사 내용을 알고 싶으니 그 취임사를 복사해 보내 달라고 지시했던 모양이다.


    그 지시에 따라 제대로 활자화된 나의 취임사의 사본이 즉시 그에게 전달되었다. 그가 자기의 취임사에 참고할 만한 내용이 있는지 사전에 알아보기 위해 이런 조치를 취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나의 취임사를 읽고 난 소감을 내게 전해 옴으로써 이 취임사가 서울지검에 보존된 것을 비로소 알게 된 나는 서울지검에 이를 보내 달라고 요청하여 이 취임사 전문이 내게 돌아온 것이다.


    임기제 3대 검찰총장인 김두희 씨
    3개월 만에 법무부 장관으로
    취임 10일 만에 대대적 검찰 인사로
    서울지방검찰청 검사장으로 부임
    생각하지도 못한 인사에 앞이 막막

     

    그가 내게 전해 온 말은 다음과 같다.


    서울지검장으로서 의미 있는 취임사를 남기고 싶어서 송 검사장의 취임사를 참고로 보내라 했다. 읽고 보니 안 읽은 것만 못했다. 흉내 내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 몇 구절 잘못 인용하다가는 뒷날 무슨 비난을 받을지 알 수 없더라. 내게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한동안 머리만 혼란스러워서 혼났다. 이런 취지의 농담이었다.

     

    어슴푸레한 기억을 되살려 보니, 취임식 후 내가 볼펜으로 썼던 취임사를 총무부장 아니면 사무국장에게 주면서 이를 보존할 수 있다면 보존하라고 지시했던 것 같다. 착실한 어떤 직원이 이 취임사를 활자로 잘 찍어서 보존하였기 때문에 후임 검사장도 이를 볼 수 있었으니 자료의 보존이 왜 필요한지 잘 알게 해 주는 사례라 할 것이다.

     

    이 취임식이 끝난 다음 서울지방검찰청 창설 이래 최초이며 최대라 할 만한 거창한 행사가 열렸다. 취임식에 참석했던 서울지방검찰청 본청의 전 직원은 물론, 다섯 개 산하 지청의 지청장과 간부가 검사장에게 개별적으로 그의 관등성명을 말하면서 검사장과 인사를 나누는 일종의 신고식이었다.


    내가 이런 의례를 사무 당국에 지시한 이유는 이 사람들이 검사장의 용모를 가까이 보아 기억해 달라는 취지였다. 내가 덕수궁 옆 검찰 종합청사에서 서울지검 특수 제1부장으로 근무할 당시 이종남 검사장께서 내 사무실을 찾아오셨다가 그가 누구인지알아보지 못한 직원의 실수로 문전박대를 당하고 돌아서야 했던 그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다시 발생될 소지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사전 조치였다.


    그런데 이런 행사를 준비토록 사무국장에게 미리 지시했더니, 그런 전례도 없었거니와 신고 대상 인원이 너무 많아서 물리적으로도 거의 불가능할 것이라 했다. 게다가 오랜 시간 시종 꼿꼿하게 서서 모든 직원을 순차적으로 면접하면서 악수하는 일이 결코 쉬운 게 아니니 다시 잘 생각해서 결정하시라는 것이 그의 조언이었다. 그러나 나는 들은 체도 않고 내 생각에 따라 신고식을 치르도록 지시함으로써 이런 행사가 있게 된 것이다.


    서울지검 검사장실의 서쪽 부속실로 들어와 내 집무실에 달린 출입문을 열어 입구로 삼고, 집무실 책상 뒤의 북측 비상구를 열어 출구로 만든 다음, 그 많은 직원이 한 사람씩 입구로 들어와서 나와 상견례를 치른 후에 북측 출구로 나가는 행사였다.

    그 인원의 숫자를 내가 자세히 기억하지 못하고 있으나 아마 수백 명이었을 것이다. 전국 검찰공무원의 3분의 1 이상이 근무하는 기관이 서울지방검찰청이었기 때문이다.


    취임식 후 본·지청 직원 대대적 신고식
    본청 전직원 지청 간부 등 대상자 수백 명
    신고받는 도중 화장실도 못가 죽을 고생
    생각 없는 고집으로 자초한 ‘자업자득’
    “귀중한 시간 허비”… 돌아보면 등골 서늘


    취임식 직후부터 시작된 이 행사가 장장 몇 시간 동안 이어져 점심시간을 훨씬 넘어서야 끝났다. 행사 도중 내 방광이 계속 S.O.S를 보내오고 있었으나 이 행사는 그런 이유로 도중에 중단될 수 없는 중대한 행사였으니 딱한 노릇이었다. 직원의 신고를 받는 도중 어떻게 화장실에 갈 수 있었겠는가? 말 그대로 죽을 고생을 하며 이 행사를 끝냈다.


    전무후무한 일이라는 것이 때로는 이런 것이므로 깊은 생각 없이 고집을 부리면 이런 고초를 겪게 되는 것이다. 자업자득이란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이다. 이 많은 직원이 장사진을 이루며 나를 보기 위해 허비한 그 귀중한 시간은 누가 어떻게 보상할 것인가? 등골이 서늘해지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나의 단호한 결의를 보여 주는 취임사를 진지하게 들었던 검사들이 이를 어떻게 느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검사장직에 취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부터 번뜩이는 칼을 찬 장수들이 볼만한 칼춤을 추기 시작했다.


    특별수사 각부와 강력부의 칼춤이 있을 것으로는 당연히 예상했으나 공안부의 사정 수사가 이어지는가 하면, 밤낮없이 경찰 송치 사건에 매달려 퇴근을 제대로 못 하던 형사부까지 나서서 기획수사란 이름으로 대학 입시 부정에 관한 대대적인 사정 작업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 대학 입시 부정에 관한 수사가 사회적으로 어떤 파장을 불러일으키는지에 대해서는 이미 나의 서울지검 특수부장 시절의 기록으로 대강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날 그 수사 담당 형사 제3부장이 여러 사람에 대한 구속 사유를 종합적으로 설명한 다음, 별말 없이 나의 절친한 친구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의 결재 서류를 내게 내밀었다. 나도 아무 말 없이 그 결재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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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시 후 그는 “이 사람이 검사장님 친구가 맞습니까?”라고 물었다. 나는 “그렇다.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거냐?”라고 말하며 웃었고, 그도 웃으며 검사장실을 나갔다. 먼 훗날 노무현 대통령의 정부에서 검찰총장직에 임명된 송광수(宋光洙) 부장검사가 그 사람이다.

     

     

     




    사건 보고를 받는 것만이 검사장의 직무가 아니다. 청의 운영 전반에 걸친 지휘와 감독이 검사장 본연의 임무였으나 검사장은 거의 사건 보고의 청취에 매달려야만 할 형편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 시점에서 내린 검사장의 직무 명령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송치된 구속 사건의 피의자를 구속 취소하여 석방하는 것은 소관 차장검사의 전권 사항으로 한다. 검사장에게는 보고할 필요 없다. 검사가 직접 사건을 인지하여 수사하는 때의 수사 착수 사실과 검사가 피의자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서를 작성하여 직접 구속하는 경우에만 검사장의 결재를 받는다. 그 경우에도 부장검사가 아닌 주임 검사가 검사장에게 와서 보고하여 결재받도록 한다.


    내가 부장검사 아닌 주임 검사로 하여금 직접 검사장의 결재를 받도록 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검사가 스스로 사건을 인지하여 수사하는 때에는 반드시 지켜야 할 불문율이 있다. 정실에 치우쳐 사건을 만들거나, 공명심에 사로잡혀 사건을 수사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이 그것이다.


    주임 검사로부터 사건 보고를 받아 보면, 검사가 그 사건을 수사하는 이유를 대강 알 수 있다. 검사가 들고 온 그 두툼한 사건 기록을 검사장이 살펴볼 도리는 없다. 그러나 그의 말을 들으며 검사의 관상과 표정을 자세히 살펴본다면 거의 틀림없이 가려낼 수 있다.


    따라서 나는 검사장의 직을 수행하는 동안 옛날에 읽었던 여러 관상과 심상에 관한 책의 내용을 다시 상기하면서 검사의 보고 내용과 그의 태도를 세심이 살펴보았을 것이다. 독심술과 병행하여 관상쟁이의 역할을 했다는 말이 과언이 아닐 정도로 관상학을 현장 실습하며 지냈다.


    이미 소속 검사 모두를 일일이 접견하며 상견례를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내 기억에 남아 있는 평검사가 많지 않은 것은 바로 이런 사정 때문이었다.


    나의 검사장 재임 중 처리된 수많은 사건에 관하여 중언부언할 필요는 없다. 그럴 생각도 전혀 없다. 중요한 사건이라고 할 만한 것은 대부분 검찰의 역사로 기록되었을 것이며, 그에 관한 자료도 제대로 보관되어 있을 것이다. 다만, 어떤 사건에 관한 몇 가지 내용은 여기에 써서 남긴다. 나의 검찰 후배들이 참고할 만한 교훈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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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하나는 세칭 ‘슬롯머신 사건’이다.


    이 사건은 강력부(부장-유창종, 주임검사-홍준표)가 주관부서였으나 수사가 확대되면서 특별수사 3개부(부장-조용국, 김대웅, 정홍원)까지 참여하여 3차장(신승남) 휘하의 전 부서가 함께 벌인 수사였다.


    전임 검사장 시절에 주임 검사가 수사에 착수하기 위해 검사장에게 보고하였으나 수사해서는 안 된다는 결정이 내려져 검사실의 캐비닛 속에 잠자고 있었던 내사사건이었다. 이런 사정을 그가 내게 구체적으로 보고하지 않아서 자세히 알지 못한 때였다. 그의 보고를 받고 보니 상당한 파장이 예상되었으나 나는 흔쾌히 그 사건의 수사 착수를 허락했다.


    내가 취임식에서 무엇이라 했던가? 검사의 직무 수행 중에 발견되는 비리와 부정이 있다면 이에 대하여는 가차 없이 수사해 응징하라는 결연한 의지가 포함되어 있지 않았던가? 검사로서 마땅히 지녀야 할 신념이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명망 있는 인사들의 비위 사실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국가정보기관과 사정기관의 거물이라 할 만한 사람들이 하나둘씩 걸려들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불똥이 검찰조직의 상층부에까지 번지는 사태로 발전되어 실로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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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통령의 서울검사장 임명장 수령사진(김두희 장관 전수) <사진=송종의 장관 제공>

     

    기호지세(騎虎之勢)라는 말이 있다. 이미 호랑이 등에 올라탔다. 갈 데까지 갈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게 되어 버린 것이었다.


    우리 검찰 내부의 고위직 인사 여러 명의 비위 사실이 점차 드러나면서 나는 결국 사표를 써서 대검찰청에 보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내 소신대로 밀어붙인 이 수사의 최종 책임자는 오로지 서울지방검찰청 검사장인 송종의였기 때문이다.


    검찰총장에게 구두로 사의를 표명한 다음 행정 절차를 밟기 시작했다. 나의 사표가 서울고등검찰청의 검사장에게 올라갔다. 행정적으로는 서울지방검찰청의 상급 기관인 서울고검의 검사장이 나의 사표를 대검찰청의 검찰총장에게 진달하여 법무부를 거쳐 임명권자인 대통령에게까지 올라가는 것이 사무 처리의 올바른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표는 검찰총장에게도 올라가지 못했다. 아니, 어떤 사람이 이를 잡아 두고 대검에 올려보내지 않았다. 서울고등검찰청 김유후(金有厚) 검사장이 나의 사표를 받았으나 대검으로 보내지 않고, 그의 책상 서랍에 넣어 둔 채 그 직을 마칠 때까지 미동도 없이 지냈기 때문이다.


    내가 사후에 그에게 자세한 이유를 물어본 바 없으므로 그가 따로 내게 대답해 준 바도 없다. 다만 그 사표는 그가 서울고등검찰청의 검사장직을 떠날 때 아무 말도 없이 웃으면서 내게 다시 돌려주었다는 사실만을 적어 둔다. 그는 나의 서울법대 동기생이었으나 대학 재학 중 제15회 고등고시에 합격하여 검사 임관이 나보다 한참 빨랐던 검찰 선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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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캐비닛 속에서 잠자던 ‘슬롯머신 사건’
    파장 예상됐으나 흔쾌히 수사 착수 허락
    거물급 인사 걸려들면서 검찰까지 불똥
    결국 고검장급 선배 세 사람이 검찰 떠나
    검찰 역사상 가장 치욕스러운 결과 빚어


    이 슬롯머신 사건 수사의 불똥이 검찰에 옮겨붙어 발화됨으로써 고등검사장급 검찰 선배 세 사람이 법무부·검찰을 떠났다. 한 사람은 나의 전·전임 서울 검사장이었으며, 또 한 사람은 나의 중앙수사부장 전임인 고시 선배였다. 결국 구속된 사람도 있다. 나와의 대학, 사법시험 동기생인 나의 전임 서울지방검찰청 검사장이 바로 그 사람이다. 대한민국의 검찰 역사상 가장 치욕스러운 결과를 빚어낸 검찰의 비극이었다.


    이 사건의 주임 검사가 이런 엄청난 파장이 있을 것임을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이 사건의 수사에 착수하겠다고 내게 보고한 것 같지는 않다. 수사 착수 전에 구체적인 정보 입수에 따라 상당히 많은 자료를 축적한 다음이라야 비로소 범죄인지서를 작성하여 사건 수사가 개시되기 때문이다.


    나의 독심술이 형편없었던지, 나는 그 검사의 수사 착수 보고 당시에 이 점을 간파하지 못했다. 그가 공명심이 대단한 사람임을 짐작하기에는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전임 검사장에게 이 사건의 수사를 개시하겠다고 보고하였으나 검사장이 혹시 자신의 비위가 드러날까 두려워 상사로서의 품위를 지키지 못하고 일방적인 부당한 지시로 이를 가로막았다고 느끼는 잠재적 원한이 있었던 것인지의 여부는 제대로 가려내지 못했다.


    옛말에 사람의 말을 들을 때에는 첫째 그 말을 살피고[察其言], 둘째 그 낯빛을 관찰하며[觀其色], 셋째 그 마음을 헤아려 본다[究其心] 했으나, 나의 관상학 실습과 독심술의 활용이 말 그대로 엉터리였음을 만천하에 여실히 드러낸 대형 범죄 사건의 수사였다.


    이 사건의 수사 과정에서 겪은 나의 마음고생은 여기에 글로 옮기기 어렵다. 이 사건의 공과(功過)는 내가 언급할 수 없는 것이며, 오로지 역사적 평가의 대상일 뿐이다. 그러나 후회는 없다. 할 수밖에 없는, 또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을 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이 사건과 함께 내가 대전지방검찰청의 검사장 시절 수사 처리된 속칭 오대양 사건이란 두 개의 사건은 먼 훗날인 2008년에 검찰이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수사하여 처리한 ‘20대 중요 사건’이라고 스스로 평가한 형사 사건이다.


    이렇게 불타는 화택(火宅) 속에서도 서울지방검찰청 검사장은 관하 검찰 지청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사건의 전모를 소상히 파악하여 지휘해야 했다. 법무 검찰의 수뇌부가 그 사건관할 지청의 지청장에게 전화하는 것이 아니라 지청의 지휘 책임이 있는 본청의 검사장에게 수시로 문의하거나 지시하기 때문이다.


    드디어 진퇴를 결정할 수밖에 없는 지경
    사표를 써서 대검에 보내고 마음도 정리
    그러나 사표는 총장에게 올라가지 않고
    서울고검장이 받아 보관하고 있다가 반려
    새 총장 부임 5일 뒤 대검 차장검사로 전보


    나의 법무부 기획관리실장 시절, 이 공룡같이 거대한 서울지방검찰청이란 검찰기구는 반드시 분화하여 다섯 개의 검찰 지청을 지방검찰청으로 격상시켜야 한다는 결론을 내고 이미 그 계획을 마련해 두었었다. 법무·검찰 발전 5개년 계획의 실현이 절실하게 느껴지는 검사장으로서의 직무 수행이었다.


    그 계획이 5개년 계획이란 제목이 붙어 있었으나, 내가 기획관리실장직을 떠난 지 5년이 다 된 1993년까지도 이 계획은 말 그대로 계획이었을 뿐, 실행되지 못하고 있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6개월 남짓 서울지방검찰청 검사장 노릇을 하였으나 마치 하루가 1년 같았던 세월이었다. 서울검사장직을 떠나면서 33명의 역대 검사장의 명단과 재직 기간을 자세히 살펴보았더니, 나보다 더 짧게 검사장직을 수행한 검찰 선배는 단 3명뿐이었다.


    나는 드디어 이 검찰청을 떠났다. 슬롯머신 사건으로 상처를 입은 박종철(朴鍾喆) 검찰총장이 지휘 책임을 지고 임기 중 결국 사퇴하고, 1993년 9월 16일 대검 차장검사인 김도언(金道彦) 씨가 후임 검찰총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날부터 5일 후인 9월 21일자 인사 발령으로 나는 고등검사장으로 승진하여 대검찰청 차장검사로 전보되었다.


    서울지방검찰청 검사장실에 철제금고 하나가 놓여 있었다. 범죄 수사에 진력하는 검사들을 수시로 격려하기 위해 범죄수사정보비를 넣어 보관하는 용도였다. 현직 검찰총장의 사퇴로 대대적인 인사 개편이 예견되었으므로 서울지검을 떠나기 전에 이 금고에 다소간의 현금과 함께 편지 한 통을 써서 넣어 두었다. 그 제목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후임 검사장에게」라는 제목으로 된 나의 친필 편지였다.

     

    그 편지에는 후임 검사장이 기관장으로서 집행 가능한 사무국 보관의 수사정보비 총액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함께 검사장으로서 서울지방검찰청 운영에 반드시 알아 두어야 할 몇 가지 내용을 적어 두었다. 후임 검사장이 총무부, 공안부, 형사부, 특별수사부, 조사부, 강력부, 공판부, 송무부 및 사무국의 운영에 유의할 자세한 내용이다.

     

    특히, 특별수사부와 강력부의 운영에 있어서 내가 편성했던 소속 검사의 수를 더 늘려서는 안 된다는 각별한 당부와 함께 검사의 발탁 기준에 관한 참고할 만한 내용이 들어 있었을 것이다. 내가 검사장으로 부임하였을 때 위 금고를 열어 보았으나 검찰청 운영에 도움이 될 어떤 자료도 없었다.


    나의 후임 검사장은 법무부 검찰국장직에서 서울지검장으로 영전한 검사였다. 이 사람은 내가 거쳐 간 검사장 자리를 세 번씩이나 따라다녔다. 법무부 기획관리실장, 대전지방검찰청 검사장, 서울지방검찰청 검사장 등이 그 직명이다. 나의 서울법대 동기생으로서 사법시험은 2기 후배인 사시 3회 출신이었다.


    대검찰청 차장검사는 일주일에 두세 번씩 정례적으로 서울지방검찰청 검사장의 업무 보고를 받는 자리이므로 내 후임 검사장이 그 기회에 내가 금고 속에 넣어 둔 현금과 친필 편지에 대해 각별히 고마운 뜻을 표했음을 나는 지금껏 기억하고 있다.

     

    물정 모르는 순진한 사람들이 한번 해 보려고 탐내는 관직, 특히 요직이란 자리의 생리는 대강 이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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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검사장 재직 기념패 <사진=송종의 장관 제공>

     

    내가 대검찰청 차장검사로 전보된 뒤 서울지방검찰청에서 나와 함께 근무했던 간부들이 나에게 전해 준 1993년 9월 21일자 재직기념패에 새겨진 명단은 다음과 같다. 이는 차장검사 3명, 부장검사 16명, 사무국장과 각 과장 15명, 모두 34명의 이름이었다.

     

    崔炳國, 姜信旭, 愼承男(이상 차장검사)
    金源治, 趙俊雄, 李範觀, 辛光玉, 金東燮, 宋光洙, 金鶴在, 柳濟仁, 金永珍, 趙鏞國, 金大雄,鄭烘原, 申熙求, 柳昌宗, 明魯昇, 朴廣信(이상 부장검사)
    朴成植, 林炳晙, 羅一洙, 李宗桓, 李正圭, 邊子淵, 梁大一, 金永吉, 金宰業, 韓武龍 黃善揚徐光宙 成百營 申成燮 尹甲圭(이상 사무국장 및 과장)


    나의 서울지방검찰청 검사장 재직 시, 산하 다섯 개 지청의 지청장 명단을 참고로 적어 둔다.


    서울지방검찰청 동부지청 신현무(申鉉武)
    서울지방검찰청 남부지청 안강민(安剛民)
    서울지방검찰청 서부지청 박순용(朴舜用)
    서울지방검찰청 북부지청 최경원(崔慶元)
    서울지방검찰청 의정부지청 김수장(金壽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