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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문] 밤나무 검사의 자화상 (17)

    4부 낙관(落款) ⑰ 장관이란 호칭을 남겨준 마지막 공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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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삼 대통령 문민정부 마지막 국무회의 소묘

    오랜 세월, 29년간의 공직이 남긴 유물


    법제처장

    (1996. 12. 20. - 1998. 3. 3.)


     

    내가 법제처장에 임명된 경위를 간략히 적어 둔다.

      

    임명 2일 전쯤이었던 것 같다. 이 시절은 말 그대로 대자유인으로 살던 때였으므로 이곳저곳 돌아다니기도 하면서 주로 논산의 양촌에 내려와 지낼 때였다. 그날 면사무소 직원이 밤나무 산으로 황급히 나를 찾아와 청와대에서 급히 연락해 달라는 전화가 있어서 검사님이 계실 것 같은 양촌리의 영농조합법인으로 갔다가 이 산에 계실 것이라 해서 찾아왔으니 속히 청와대로 전화하시라고 말하며 그 전화번호를 일러 주었다. 이 직원이 얼마나 다급했던지 산꼭대기 부근에까지 달려와서 숨도 제대로 돌리지 못하고 전한 말이 그랬다.

     

    내가 공직을 그만둔 것이 1년도 넘는 때였으므로 나는 입각 통보라는 낌새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던 터여서 도대체 나를 찾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 것이 사실이었다. 당시 핸드폰이 없었는지, 있었다고 해도 전파장애가 있어서 내게 연락이 안 된 것인지 확실치는 않으나 당시의 주소였던 서울 등지로 청와대에서 연락하다가 연락이 되지 않자 산간벽지인 양촌면 사무소에까지 전화해서 나를 찾은 것만은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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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길로 면사무소에 도착하여 직원이 적어 준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직원이 대통령 각하를 직접 바꾸어 드릴 테니 기다리시라고 했다. 즉시 김영삼 대통령께서 그 전화에 대고 하는 말의 요지는 다음과 같았다.

     

    정부의 내각을 개편하기 위해 입각 당사자들에게 모두 통보했다. 오직 당신만이 연락이 되지 않아 내각의 명단을 지금껏 발표하지 못하고 있다. 도대체 무슨 일을 하면서 어디에 다니기에 집에도 없고, 연락도 되지 않는가? 내가 당신을 법제처장으로 임명하려 하니 그런 줄 알라. 김 대통령께서는 불과 30초도 걸리지 않은 이런 말을 일방적으로 통고한 다음 전화를 끊었다.

     

    사실 나는 대검찰청 차장검사직을 그만둔 이후 공직에 대한 미련이 전혀 없었던 게 사실이다. 법제처장이란 벼슬에 관해 관심도 없었음은 물론, 그 직에 나아가리라고 상상해 본 적도 없는 사람이었다. 대통령의 일방적인 통고 이후 잠시 머뭇거릴 틈도 없이 그 직을 수락한 꼴이 되고 말았다.

     

    대통령의 말투로 보아 당시 매우 급한 상황임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으므로 시급히 차를 몰아 상경했다. 다시 전화를 걸어 중언부언해서 될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서울 집에 도착해 보니 집에서는 영문도 모른 채 왜 청와대에서 당신을 찾는 전화가 그렇게 많았느냐며 입각 사실을 짐작하기는커녕 매우 불안해하는 눈치였다.

     

    그다음 날, 법제처 총무과장으로부터 찾아뵙겠다는 연락이 왔다. 그는 의례적인 인사 후에 취임사를 준비해 왔다고 보고하면서 정성껏 작성한 취임사를 건네주었다. 아마 역대로 그리하였기 때문에 그도 관례대로 취임사를 정성껏 준비해 왔을 것이다.

     

    내가 검찰에 봉직하는 동안 상사의 취임사를 몇 번 써 본 적이 있다. 그것을 쓰며 생각했던 것은 ‘도대체 내가 그 직에 취임하는 것이 아닌데 그 취임사를 왜 내가 써야 하는가?’라는 것이었다. 이제야말로 중앙행정기관의 장으로서 내가 할 말을 내가 직접 써야 할 때가 되었음을 뜻깊게 여기며 나는 즉시 그가 써 온 취임사를 한번 훑어보고 돌려준 다음 법제처장의 취임사를 스스로 쓰기 시작했다.

     

    나의 공직 생활이란 것이 검사 경력이 전부였는지라 내가 법제처에 대해 아는 것이 없음은 안타깝지만 사실이었다. 나는 숨김없이 그 사실을 그대로 토로하며 내가 법제처장으로서 지녀야 할 정신 자세와 직원들의 도움을 요청하는 것을 주된 내용으로 취임사를 작성했다. 취임하는 날 아침, 청와대에서 임명장을 받고 법제처로 돌아와 취임식을 치렀다.

     

    그 취임사가 암시하는 바와 같이 나는 혁신, 혁파, 척결 등과 같은 용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다. 검찰 재직 시절 상사에 대한 보고서, 특히 대통령 각하의 연두순시에 대비한 업무보고서를 작성하면서 부득이 몇 번 사용한 적은 있으나 이는 사실 적절치 못한 용어이다.

     

    양의 동서와 때의 고금을 막론하고 제도의 선악보다는 그 제도를 운용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이 중요한 것이고, 나 이전의 어떤 결과물이 크게 그릇되었다 해도 이는 대개 어떤 제도나 시책을 주관하는 선임자들이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으나 좋지 못한 결과에 이르게 된 경우가 간간이 크게 부각된 것이기 때문이다.

     

    기존의 질서를 과감히 허물어야 할 경우도 없지 않겠으나 대부분은 수정 또는 보완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고, 반드시 바꾼다고 잘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 사는 세상에 불합리한 것이 없을 수 없으므로 그 잘못된 것을 뿌리째 뽑아 버려 다시는 발생할 수 없도록 한다는 뜻의 척결이란 말도 따지고 보면 잘못된 말이다.

     

    내 생각의 밑바탕이 이러하므로 나는 대부분 전임자의 업무 처리가 크게 잘못되었거나 그 당시의 실정에 전혀 맞지 않는 특별한 사정이 없다면 이미 이루어진 기존 질서 내에서 그 해결책을 찾고자 했다. 내가 법제처장으로 재임하면서 추진한 업무 내용은 대개 이런 바탕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특별한 업적이라고 내세울 것은 전혀 없다.

     

    법제처는 정부조직법에 명시된 바와 같이 국무회의에 상정될 법령안·조약안과 총리령안 및 부령안의 심사와 그 밖에 법제에 관한 사무를 전문적으로 관장하기 위하여 국무총리 소속으로 설치된 중앙행정기관이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사바세계의 야단법석 같은 법무 검찰과는 달리 법제처는 집현전 학사의 고담준론 토론장 같은 직장이었다. 시급하고 중대한 현안이 있더라도 통상적인 업무 영역을 크게 벗어나는 것이 아니었고, 차분하게 대처하면 모두 해결이 가능한 업무였다, 무슨 기발한 착상으로 업무혁신을 꾀할 필요가 없었고, 또 그래서도 안 되는 행정부처였다.

     
    일은 사람이 하는 것이고, 그 일의 성패는 그 사람 됨됨이에 따라 결판나는 것이므로 기관장인 내가 심혈을 기울인 것은 인사였다. 그 이후 일의 성패는 대개 예산이 뒤따라야 하는 것이어서 충분한 예산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만은 게을리하지 않았다고 자부한다.


    면사무소 직원이 밤나무 산으로 찾아와
    청와대로 속히 전화하라며 연락처 전해
    바로 전화했더니 김대통령이 직접 받아
    ‘법제처장으로 임명 통지’ 30초간 통화
    이틀 뒤 청와대에서 임명장 받고 취임

    1998년 2월 YS 정부 마지막 국무회의
    정무직인 법제처장과 국가보훈처장 보수
    ‘장관급과 차관급의 중간으로’ 개정 제안
    수정의견 타당하다는 총리 설명 뒤 가결
    새 내각 구성 늦어 DJ 취임 1주일 뒤 퇴임


    지금 생각해 보면 내 능력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어려운 일이 하나 있었다.


    법제처장은 국무총리 산하에 있는 국무총리 행정심판위원회의 위원장으로서 그 위원회의 운영을 주관할 책임이 있다. 법제처의 행정심판국이 그 운영의 주무 부서이다. 그런데 이 위원회에 상정되는 행정심판사건은 그 숫자도 만만치 않거니와 때로는 여러 차례의 심판 절차를 속행하면서 결론을 내려야 할 중요한 사건도 상당히 많이 있었다.


    민사·상사·형사·행정 각 분야에 대한 전문 지식이 있어야만 그 사건의 처리가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행정심판위원은 위 각 법률 분야의 전문가가 위촉되어 국무총리로부터 임명장을 받게 된다. 법제처장은 내각의 각료로서 중앙행정기관장이므로 이런 심판사건의 장기간 심리에 관여할 충분한 시간을 내기가 매우 어려웠다.


    행정심판은 재판과 다름없는 것이다. 그것도 어느 한 법률 분야가 아닌 여러 분야의 법률 지식 없이는 그 심판에 관여하여 적절한 결론을 낼 수 없는 것이 그 본질이다. 한두 번 그 심판사건의 심리를 맡아 보니, 법제처장이 어떤 때는 온종일도 모자라 밤늦게까지 이 어려운 송사에 관여할 수밖에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이 행정심판을 법제처장이 직접 주관하여 집중적으로 심리한다 해도 결론은 크게 달라질 것이 없다. 이 심판에 관여하는 행정심판위원들이 풍부한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심판을 거쳐 결론을 도출하는 것이므로 이 심판위원을 제대로 골라 위촉하는 것이 행정심판의 적정성을 담보하는 지름길이다. 정부 측의 당연직 위원을 제외한 심판위원으로 각계의 명망 있는 인사 중 풍부한 재판 경험과 법률 지식을 겸비한 분들을 심판위원으로 모시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실감한 것이다.


    내가 비록 법제처장으로 국무총리 행정심판위원회의 위원장이긴 하나 사법시험에 합격한 후 검사로서 형사법 분야에 관한 제한된 법률 지식만을 가지고 있을 뿐, 민사·상사·행정 등 제반 법률 영역에 관한 지식은 거의 없는 형편이었다. 이리하여 행정심판위원만은 각계의 의견을 들어 삼고초려 끝에 유능한 변호사, 학자 등을 모셔 왔다.


    정부의 당연직 위원인 법무부 법무실장, 내무부 기획관리실장, 경찰청 차장, 공정거래위원회 사무처장을 제외한 민간인 행정심판위원으로 임명된 변호사분들은 노승행, 김학세, 이보환, 이건웅, 서정우, 이진강, 황산성 등 7명이었고, 대학교수는 김철용, 강희갑, 홍정선, 성낙인, 김윤성 등 5명이었다.


    위원장인 나를 대리하여 여러 번 심판을 주재한 김홍대 법제처 차장은 법제처에서 잔뼈가 굵은 법률전문가로서 모든 법률 분야에 해박한 지식을 갖춘 사람이었으므로 심판위원회에서 처리된 사건에 불복하여 행정소송을 거쳐 결론을 달리한 경우는 별로 없었다. 내가 비록 위 행정심판을 직접 주재하지는 않았더라도 위에 열거한 분들께서 충분한 심리를 거쳐 도출된 결론은 오히려 내가 직접 관여한 것보다 더 훌륭한 것임이 틀림없다고 감히 자부하면서 내 책임의 일단을 면해 보려 한다.


    법제처장 재임 시의 업무 일지를 잠시 들추어 보니, 그 기간 중 국무총리가 주재하는 규제개혁심의위원회에 빈번히 참석했던 사실이 곳곳에 기재되어 있다. 오래전부터 행정규제관리법이란 법률이 있어서 행정규제를 관리해 왔었으나 이 행정규제의 폐해가 심각해져서 국무총리와 민간인이 공동위원장으로서 법제처장이 당연직 위원인 이 규제개혁심의위원회가 빈번히 개최되었던 것이다.


    이 위원회에 참석해서 느낀 점은 행정규제의 개혁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수십 차례의 회의를 거쳐 1997년 7월 총무처와의 긴밀한 협조로 행정규제관리법을 폐지하고 새로운 법률인 행정규제기본법이 제정됨으로써 나의 퇴임 직후인 1998년 3월 12일 이 법의 시행을 보게 되었다. 요즈음에 와서는 행정규제개혁심의위원회에서 행정규제를 대폭적으로 손질하기 위하여 이 위원회를 대통령 직속 기구로 변경한 것을 보니, 지금도 옛날과 사정이 별로 다르지 않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 하여튼 공직 사회의 생리를 바꾸는 일이 이렇게도 어려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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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대 법제처장 초청 간담회 기념사진(1997. 12. 5) 
    앞줄 왼쪽부터 이양우, 이선중, 문홍주, 정진우, 김영균. 뒷줄 왼쪽부터 최상엽, 한영석, 송종의, 김종건, 황길수, 김기석 
    < 사진=송종의 장관 제공>
     

    다음 국무회의에 관한 기억 몇 개를 적는다. 나의 법제처장 재임 중 3번의 개각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첫 번째는 1997년 3월 5일로서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을 비롯한 8개 부처 장관과 장관급 기관장 2명 등 도합 10명이 교체되었다. 두 번째는 동년 8월 5일로서 내무부 장관을 비롯한 11개 부처의 장관이 교체되었다. 세 번째는 일자는 확실치 않으나 그해 말쯤 터진 IMF 사태에 따라 강경식 재경원 장관이 임창열 씨로 교체되었다.

     

    이런 사정이었으므로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 말기에 이르러는 1년 이상 장관직을 유지하는 경우가 매우 드물어 내각의 24개 부처 중 통일원, 외무부, 국방부, 공보처, 법제처 등 5개 부처만이 1년 이상 장관직을 유지할 수 있었다.


    나의 임기 중 개최된 100여 회가 넘는 국무회의 중 대통령이 직접 주재하는 국무회의는 몇 번 없었다. 그 이외에는 모두 국무총리가 의장인 국무회의였다. 대통령이 주재하는 청와대의 조찬, 오찬을 겸한 회의는 여러 번 있었으나 헌법상의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국무회의의 개최 상황은 이와 같았다.


    국무회의의 안건 중 80% 정도가 법률 안건이어서 대통령이 직접 주재한다 해도 결론을 달리할 경우가 별로 없었을 뿐만 아니라 나머지 안건도 전문적인 행정 영역이었기 때문에 국무회의의 운영이 이처럼 되었을 것이다. 법제처장은 장관급 기관장이긴 하나 국무위원이 아니고 법률상 국무회의에 참석하여 발언할 권한이 주어져 있으므로 당연히 국무회의에 참석한 것이다.


    요즈음 박근혜 정부가 들어선 이후 박 대통령이 직접 국무회의를 주재하는 많은 경우가 뉴스로 보도되는 것을 보며 요즈음의 세태가 대통령이 자주 국무회의를 주재해야 할 정도로 중요한 사태가 벌어지는 세상이 된듯하여 박 대통령의 성의에 감복하는 때도 있다. 하여튼 대통령이 국무회의를 직접 주재하면서 각종 지시를 내려야만 하는 어지러운 사태가 발생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할 뿐이다.


    IMF 사태로 재경원 장관이 교체된 이후에는 국민과 국가기관의 모든 노력이 이 사태의 해결에 집중되었다. IMF 총재인 깡드쉬의 말 한마디에 국운이 걸린 사태가 되었다. 국무회의가 재경원 장관의 상황 보고를 듣는 자리로 변해 버리고, 법제처의 임무도 이 난제의 해결을 위한 법령의 제·개정에 거의 매달리다시피 하게 되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 하늘의 도움이 있어서였던지, 온 국민이 한마음 한뜻으로 이 난관을 극복하겠다는 굳은 신념으로 뭉쳐 결국 IMF 사태를 극복한 모범적인 국가가 되었으니 천행이라 하겠다.


    문민정부의 마지막 국무회의의 기억을 되살려 본다.

     

    1998년 2월 24일 아침, 청와대에서 김영삼 대통령이 직접 주재하는 문민정부의 마지막 국무회의가 개최되었다. 김대중 씨가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후 그의 국민의 정부가 출범하게 됨에 따라 행정 각부의 조직 개편을 내용으로 하는 정부조직법 개정법률의 공포안건과 행정부 각 기관의 직제 51건을 심의·의결하기 위하여 소집된 국무회의였다. 문민정부의 모든 각료가 참석한 문민정부의 고별 국무회의로서 이 국무회의는 나에게 아주 각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김대중 씨가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정권의 인수 작업에 착수하면서 제일 먼저 정부 조직 개편 심의위원회가 구성되었다. 13명의 위원이 위촉되었고, 김광웅 교수 등 9명을 구성원으로 하는 실행위원회가 활동을 개시하였다. 김대중 정부 출범 전에 이미 작은 정부를 표방하였으므로 정부조직을 개편하되 장관 중 몇 자리는 반드시 줄여야 하는 엄중한 사명이 주어져 있었다. 그들이 공식 활동을 시작하기 전에 이미 국무총리 산하의 총무처, 공보처, 법제처, 국가보훈처 등 4개의 중앙행정부처가 이미 제1차 축소 또는 폐지 대상이었다.


    정부 조직의 개편을 위한 공청회 등 극히 형식적인 절차가 진행되어 가면서 이 인수위에 불려 가 업무 내용을 보고하다 보니, 이는 의례적인 통과 절차의 하나였을 뿐, 합리적인 논리의 전개나 행정조직 원리에 따른 법리적인 설명으로 해결될 일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공보처는 폐지하고, 총무처의 기능을 행정자치부에 흡수시키며, 법제처와 국가보훈처장의 직급을 장관급이 아닌 차관급 정무직으로 개편하는 내용으로 일찌감치 결론을 내리고 이를 위한 번잡스러운 절차만을 진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서 마련한 정부조직법 개정안을 심의할 제187회 임시국회가 1998년 1월 15일 개최되었다. 다음 날 국회에서 정부 조직 개편 시안에 대한 공청회가 열렸다. 이런 가운데 2월 5일에 국회 법사위에서 법제처 개편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었다. 이 자리에서 나는 법제처 기능의 개편과 법제처장의 직급을 하향 조정하는 내용의 정부조직법 개정안에 대한 중요한 문제점 네 가지를 지적하면서 장시간에 걸쳐 시종일관 당당한 자세로 나의 의견을 개진했다.


    이는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서 마련한 정부조직법 개정안의 내용을 수정의결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이 나라 정부 조직 개편의 역사에 큰 문제를 남긴 내용을 국회의 기록으로 남겨 두고자 하는 내 집념의 표현이었다. 구체적인 내용은 국회 속기록에 그대로 명시되어 있을 것이므로 여기에 적을 필요는 없다.


    당시 법제처에는 국회의 진행 상황을 보고 들을 수 있는 시설이 갖추어져 있었으므로 법제처장이 국회에서 당당하게 의견을 개진하는 상황을 많은 직원이 실시간으로 보고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우이독경에 불과한 것일 뿐, 정부조직법 개정안이 원안대로 의결되었다. 결국 총무처와 공보처가 폐지되었고, 법제처장과 국가보훈처장의 직급이 장관급 정무직이 아닌 차관급 정무직으로 격하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런 가운데에서도 최선의 길만을 찾아보겠다고 다짐하면서 마지막 국무회의에까지 이르렀다.


    이 국무회의가 개최되기 전에 나는 고건 국무총리님을 찾았다. 행정의 달인이란 별명답게 그는 국민의 정부가 마련한 정부조직법 개정법률안 중 법제처 부분의 문제점을 물론 소상히 알고 있었다. 나는 마지막 국무회의에서 즉석 안건 하나를 상정하겠다고 말씀드리고 상정할 안건의 내용과 의결주문의 요지를 미리 보고하여 국무총리의 양해를 구했다.


    마지막 국무회의에서 나는 법제처장으로서 정부조직법개정법률 공포안건의 제안 설명을 하여 이 안건이 의결되었다. 이에 따라 행정 각부의 직제 51건이 뒤이어 상정되었다. 총무처 장관의 제안 설명이 끝난 다음, 이 안건에 대한 의결 전에 나는 발언의 기회를 얻어 이 안건에 대한 즉석의 수정안건을 상정하겠다고 제의했다. 수정 내용은 행정자치부 및 그 소속기관 직제 중 공무원 보수규정에 정무직인 법제처장과 국가보훈처장의 보수를 장관급 정무직과 차관급 정무직의 중간급 보수를 지급하도록 하는 내용이었다. 공무원의 직급은 이 공무원 보수규정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제안한 수정안건의 제안 취지는 국회 법사위에서 발언한 내용과 같았다.


    어느 국무위원이 이 안건에 대해 이견을 제시하였겠는가? 김영삼 대통령께서 고건 국무총리로부터 미리 보고받으셨는지는 나는 알지 못한다. 나의 제안 설명이 끝나자 대통령께서는 고건 국무총리의 의견을 타진하였다. 그 안건의 수정의결이 타당하다는 고건 총리의 설명이 끝난 뒤 그 수정안건은 만장일치로 가결되었다. 이리하여 국민의 정부 출범 직전 법제처장과 국가보훈처장의 직급이 장관급과 차관급 사이의 정무직으로 확정된 것이다.


    마지막 국무회의가 끝난 다음, 나는 사무실로 돌아와 새 정부 출범에 따라 조치해야 할 사항의 처리를 지시한 후 즉시 퇴임사를 쓰기 시작했다. 내일, 즉 2월 25일 10시에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의 취임식이 예정되어 있어서 예정대로라면 내일 법제처장직을 퇴임하여야 했기 때문이다.


    내가 퇴임사를 급히 쓴 또 다른 이유는 그 내용 중에 고건 국무총리님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하는 내용이 있어서 미리 총리실에 보내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날 김종필 국무총리와 한승헌 감사원장의 임명동의안이 국회 본회의에서 한나라당 의원 전원의 불참으로 무산되었다. 이런 사정으로 대통령은 취임하였으나 국무총리의 제청을 받아 행정 각부 장관을 임명할 수 없게 되는 사태에 이른 것이다.


    위 국무회의를 마친 후 신임 대통령의 취임식에 참석하였던 문민정부의 장관 몇 사람이 그길로 귀가하는 바람에 사실상 장관 공석이 되어 행정부처가 제 기능을 수행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여기저기서 이런 행정 공백 사태가 법률상 어떤 평가를 받아야 하는가에 대한 문의가 쇄도했다. 상부에 보고할 겨를도 없이 나는 즉시 법제처의 유권해석 내용을 기사화할 수 있도록 지시한 후 즉시 정부청사 기자실의 기자들에게 그 내용을 공표하였다.


    대통령이 바뀌었으나 국무총리와 감사원장의 임명동의안이 국회에서 처리되지 못하여 국무총리와 행정 각부 장관이 새로 임명되지 못했으므로 현재의 국무총리와 국무위원은 새로운 내각이 구성될 때까지 그 직을 수행하여야 함이 법률상 당연하다는 내용이었다. 이리하여 뒤숭숭하던 사태는 일단 진정되고, 총리실에서 행정 각부에 지시하여 출근하지 않았던 장관들도 다시 돌아와 자리를 지키게 되었다.


    위와 같은 정치적인 이유로 새로운 내각이 구성되지 못한 채 출범한 국민의 정부는 그달을 넘겨 3월 3일에 가서야 비로소 새로운 내각을 구성함으로써 나는 본의 아니게 김대중 대통령 취임 후 1주일 간이나 국민의 정부에서 장관직을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마지막 공직이라고 마음속으로 다짐하면서 법제처장직을 물러나며 남긴 퇴임사의 끝말은 다음과 같다.

     

    “귀거래혜(歸去來兮) 영고무상(榮枯無常) 산수자한(山水自閑) 좌간부운(坐看浮雲).” 

     

    재임 기간 이수성·고건 두 분 총리 모셔
    함께한 각료 모임 명칭 민우회·문경회로
    지금까지 계절 따라 연 3~4회 만남 지속
    유명 달리한 분도 있어 언제까지 갈지…


    법제처장 지낸 인연으로 몇 개 유물 남아
    국무위원재직 기념패와 국무위원 배지
    공직 떠나 5년 뒤 받은 청조근정훈장도
    두 분 총리와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감사

     

    나는 재임 기간 중 두 분의 국무총리를 모셨다. 내가 법제처장으로 임명될 당시의 국무총리는 이수성(李壽成) 씨였으며, 그 몇 개월 뒤에 고건(高建) 씨가 후임 국무총리로 취임하여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가 막을 내려 내가 법제처장을 그만둔 날 당시의 전 각료와 함께 퇴임했다.


    국무총리에 따라 다르기는 하나, 그의 재임 중 각료였던 사람들과는 퇴직 후에도 동료 의식을 고양하는 뜻에서 모임을 이어오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수성 국무총리 휘하의 퇴직 장관들의 모임은 ‘민우회(民友會)’이고, 고건 총리의 경우에는 ‘문경회(文卿會)’라는 이름이다.


    문민정부가 거의 끝날 무렵, 고건 총리께서 내게 이 모임의 적당한 명칭을 지어 주면 좋겠다고 말씀하시기에 내가 ‘문경회(文卿會)’라는 이름을 지어 그 이름자를 고른 이유를 한 장의 문서로 만들어 드린 적이 있었다. 아무 말씀도 없던 터에 김대중 대통령 취임 직전, 청와대에서 김영삼 대통령을 모시고 전 국무위원이 참석한 고별 만찬이 있었다.


    이 자리에서 고건 총리는 퇴직 장관들의 모임을 만들었으며 그 이름을 문경회라 정하였다는 내용을 김 대통령에게 보고하면서 퇴직 후에도 대통령의 뜻을 받들어 국가에 봉사하겠다는 뜻을 피력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야 비로소 총리께서 나의 건의를 수용하셨음을 알게 되었다.


    내가 문경회라는 이름을 지은 이유는 대략 다음과 같다.


    김영삼 대통령의 정부는 ‘문민정부(文民政府)’였다. 여기에서 글 문(文) 자를 택하고, 그 정부의 각료라는 것을 표시하기 위하여 경(卿) 자를 골랐다. 예로부터 국정을 맡고 있던 고위 관료를 공경대부(公卿大夫)라고 부르기도 한 것처럼, 경이란 벼슬을 뜻하는 것으로서 상대방에 대한 존칭으로 귀공(貴公)이라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하는 문자이다. 이 글자의 본뜻이 그렇기도 하거니와 상서롭다는 의미를 지닌 글자이므로 그들의 모임을 표현하기에 적당한 문자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고 총리는 내가 써 드렸던 내용을 그대로 대통령에게 보고하였다. 내가 법제처장직을 물러난 지 17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계절에 따라 1년에 너덧 번씩 이 모임이 이어져 오고 있으나, 그동안 문경회의 모임이 오래 이어져 가면서 유명을 달리하거나 몸이 불편한 사람들이 더러 생겨나고 있으니 얼마나 오래 이 모임이 이어질는지 알 수 없다.


    내가 법제처장을 지낸 인연으로 몇 개의 유물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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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무위원 재직기념패 
    <사진 = 송종의 장관 제공>

     

    첫 번째는 국무위원 재직기념패이다.

     

    나는 헌법상의 국무위원이 아닌 법제처장이었으므로 이 용어는 적절치 않다. 그러나 국무회의에 당연히 참석하여 발언할 권한이 있는 장관급 공직자인 내게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이런 표현을 썼다. 다른 마땅한 용어도 없다.

     

    이 재직기념패는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 마지막 국무총리였던 고건 씨와 그의 휘하 국무위원 및 장관급 중앙행정기관장들의 연명으로 제작된 것이다. 정부조직법이 대통령의 취임과 동시에 여러 번 개정되면서 오늘에 이르렀으니 행정 각부와 국무총리 산하 중앙행정기관의 명칭이 대부분 바뀌게 되었으므로 내가 지금 보아도 좀 생소한 직명이 들어 있다.

     

    위 패는 나의 재직기념패이므로 나의 직명과 성명 및 재직 기간이 나의 사진과 함께 패의 상단에 표시되어 있어서 문민정부 당시의 장관급 이상 행정부처의 공직자 24명이 각기 서명하여 제작되었다. 이 재직기념패 상단 정중앙에 적색 테두리로 된 국무위원의 배지 도형이 크게 부착되어 있고, 상단의 좌우에 용의 문양이 새겨져 있다.

     

    그 재직기념패에 새겨진 직책과 서명된 명단은 다음과 같다.


    국무총리 고건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 임창열
    부총리 겸 통일원 장관 권오기
    외무부 장관 유종하
    내무부 장관 조해녕
    법무부 장관 김종구
    교육부 장관 이명현
    문화체육부 장관 송태호
    농림부 장관 이효계
    통상산업부 장관 정해수
    정보통신부 장관 강봉균
    환경부 장관 윤여준
    보건복지부 장관 최광
    노동부 장관 이기호
    건설교통부 장관 이환균
    해양수산부 장관 조정제
    총무처 장관 심우영
    과학기술처 장관 권숙일
    공보처 장관 오인환
    정무 장관(제1) 홍사덕
    정무 장관(제2) 이연숙
    국가보훈처장 박상범
    국가안전보장회의 상근위원, 비상기획위원회 위원장 장성
    공정거래위원장 전윤철


    두 번째는 국무위원 배지(badge)이다.


    문자로 표시된 신분증은 아니나 신분증의 역할을 하는 물건이 있기에 여기에서 설명한다. 행정부처 차관급 이상의 정무직 공무원에 임명되면 그 신분을 상징하는 배지가 수여된다. 직경 약 1.5센티미터 정도의 원형 배지인데, 양복상의 왼쪽 깃에 꽂도록 제작된 것이다. 장관급과 차관급의 두 종류로 구분되어 있다.


    노린 원형 가운데 같은 색 양각(陽刻)의 무궁화꽃이 들어 있고, 그 사이의 색이 빨간색인가 혹은 검은색인가에 따라 직급을 달리한다. 적색(赤色)이 장관급 공직자용이고, 흑색(黑色)이 장관급이 아닌 차관급 이상의 공직자용이다. 영상매체인 TV 등에 나오는 정무직 공직자의 상의 좌측 옷깃에 꽂힌 이런 배지를 흔히 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법제처장으로 임명될 때 적색 금배지 2개를 받은 바 있고, 지금 누구인지 기억에 없으나 어떤 사람으로부터 다른 1개의 배지를 선물로 받아 모두 3개가 보관되어 있다. 국무회의의 참석자 대부분은 특별한 사정이 없다면 이 배지를 달고 회의장에 들어간다. 이것은 회의장 준비 요원에게 그 신분을 알리는 의미에 덧붙여 국무회의 구성원 서로 간의 예의이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법제처장으로 재직하면서 공무를 수행하는 동안 이를 옷깃에 착용하였을 것이며, 다른 국무위원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내가 선물로 받았던 배지 1개는 순금이 틀림없고, 법제처장으로 임명될 때 정부에서 만들어 준 2개의 재질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3개의 배지 무게가 거의 같은 것으로 미루어 보면 이 2개 역시 금배지로 짐작된다. 요즈음의 법제처장이 검은색 배지를 꽂고 다니는 것을 보니 좀 섭섭한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세 번째는 내가 공직을 그만두고 물러나 5년이 흐른 뒤에 2003년 2월 3일 받은 청조근정훈장(靑條勤政勳章)이다.

     
    그 연월일이 암시하는 것과 같이 2003년 2월은 김대중 대통령 국민의 정부가 끝날 무렵이었다. 나는 문민정부의 김영삼 대통령으로부터 훈장을 받지 못한 채 공직을 물러났으나 전혀 예측하지 못한 가운데 김대중 정부의 말기에 이르러 뜻밖에 이 훈장을 받게 되었다.


    역대 정권이 그러하였듯이 대통령은 그 임기 말에 이를 즈음 자신이 임명하였던 장관급 각료들에 대한 고마움으로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임기 중의 국무위원 등 각료에게 청조근정훈장을 수여해 왔다.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 말기인 1998년 하반기에 예기치 못한 IMF 사태가 터져 이 사태의 수습을 위하여 진력하다가 이를 매듭짓지 못하고 떠나는 대통령이 재직 중 임명하였던 각료들에게 훈장을 수여하고 떠날 명분은 찾기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그럴 마음의 여유 또한 없었을 것이다. 어느 각료라도 훈장을 받게 되었다면 국민의 따가운 눈총과 비난을 면치 못하였을 것임이 거의 틀림없다. 그러므로 김대중 대통령도 그 재임 기간 중 자신이 임명한 각료들에게 이런 훈장을 수여하지 못하고 지내다가 임기를 앞두게 되었다. 문민정부의 각료를 제외한 국민의 정부 각료들에게만 훈장을 수여하자니 전임 대통령에 대한 예의가 아닐 것이고, 그 각료들과 함께 이를 수여하자니 이 역시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위 훈장증에 명시된 2003년 2월 초에 대통령실 직원이 우리 집을 찾아와 슬며시 놓고 간 큰 가죽가방을 열어 보았더니 위의 청조근정훈장과 훈장증이 들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므로 그 청조근정훈장은 말 그대로 ‘뜻밖에’ 받게 된 훈장이다. 따질 필요 없이 이 훈장이란 것은 공무원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영예이지만 받고자 욕심을 낸다고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받지 않으려 해도 때로는 받아야 한다. 나는 검사로 재직 중에 홍조근정훈장(紅條勤政勳章)과 황조근정훈장(黃條勤政勳章)을 받았으므로 세상을 살면서 다른 복이 어떠하였는지 스스로 평가할 수 없으나 훈장 받을 복만은 타고난 사람임에 틀림없다.


    내가 훈장 받은 것을 복이라고 표현한 이유가 있다. 대한민국의 검사로 임관되어 오랜 기간 공직에 봉사한 사람치고 국가에 충성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한 사람이나 있겠는가? 확고한 국가관과 투철한 사명감 없이 어떻게 하루인들 검사 노릇을 할 수 있겠는가? 이 점만은 검사라면 모두 공감할 것이다. 그런데 훈장을 받는 사람도 있고, 못 받는 사람도 있다. 훈장을 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어쩌면 부끄러운 것이다. 그러므로 세 번째 훈장이 뜻밖에 받은 훈장인 것처럼 검사 시절에 받은 두 개의 훈장 모두 뜻밖에 어쩌다 받는 훈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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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공문행적에 관한 긴 글을 끝내며 세 분께 감사의 뜻을 표하려 한다.


    이수성 제29대 국무총리의 재임 중에 나는 법제처장으로 기용되었다. 이 총리님께서는 1997년 3월 4일 퇴임했으므로 내가 그를 모신 기간은 3개월도 못 된다. 총리 퇴임 후 민우회의 장관 여러분을 부부 동반으로 모시고 대형버스를 빌려 내가 사는 이 산간벽지인 양촌을 찾아오셔서 나를 격려해 주셨다. 2005년 4월 27일 자로 제작된 민우회 회원 방문 기념패를 주고 가셨다. 이 총리님, 감사합니다.


    고건 전 국무총리님께서는 나의 법제처장 재임 중에 총리로 취임하여 나와 함께 문민정부가 끝날 때까지 재임하셨다. 미묘한 법률적인 문제가 있는 안건이라면 국무회의 안건 심의 도중 법제처장이 의견을 개진토록 한 후, 법제처장이 법률상 그렇다고 하니 그대로 할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는 말로 재치 있게 합의를 이끌어 내던 ‘행정의 달인’ 고건 국무총리님께 경의를 표합니다.

     

    끝으로 나를 검찰총장으로 기용하지 못한 미안함을 늘 간직하고 계시다가 촌부에 불과한 사람을 법제처장으로 등용하여 만년에나마 장관의 호칭으로 불러질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신 김영삼 대통령 각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다시금 경건한 마음으로 합장하며 명복을 기원합니다.


    2016년 1월 천목거사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