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Legaledu
  • 법률신문 법률정보

    서평

    《하산 길》(양건 著, 백산서당 펴냄)

    은퇴 후의 아름다운 삶, ‘하산 길’

    김영종 (포스코홀딩스 법무팀장·부사장) 입력 :
    글자크기 : 확대 최소
  • 인쇄
  • 메일보내기
  • 기사스크랩
  • 스크랩 보기
  • 183277.jpg

     

    오천 년 역사에 낙향한 선비가 수없이 많겠지만, 진퇴를 알아 낙향 길이 아름다운 선비는 그리 많지 않다. 최근에 이르러 그런 선비를 찾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정유재란 당시 억울하게 투옥된 이순신을 보고 현직에서 물러나 있던 예천 출신의 72세 정탁 선생이 청사에 빛나는 상소문 ‘논구이순신차’를 올려 이순신을 구한 바 있다. 정탁은 그 후 낙향하여 80 평생을 진충보국에 힘쓴 늙은 신하의 심정을 이렇게 노래했다. 

     

    “많은 책을 읽고 세상을 구제하리라 애를 썼건만 풍진 속에서 돌아다닌 세월이 몇 해이던가. 칠년 대란을 만나 한 가지 계책도 내지 못하고 백발이 된 몸으로 고향을 찾으니 부끄러움만 남네.” 

     

    정탁처럼 진중한 선비의 길을 걷다가 하산길에서 담백하게 자신을 되돌아보는 선비를 찾는다면 그 중 한 분이 양건 전 감사원장일 것이다.

     

    ‘하산길’은 우리나라 헌법학의 거목인 양 전 원장의 문집이자 회고록이며 인문학 책이다. 일반적으로 지루하고 현학적인 법률가의 책과 달리 간결하면서도 감성적인 시인의 문체로 내면의 울림을 주는 이 책은 읽으면 읽을수록 더 빠져들게 만든다.  

     

    양 전 원장은 화려했던 자신의 이력도  ‘38년 간 강단에 섰고, 관직 4년을 거친 후 하산 길에 들어섰다.’고 간단하고 담담하게 기술할 뿐이다. 절제되고 겸손한 저자의 성품을 알 수 있다. 하산 길이라는 단어와 달리 책을 읽는 내내 쓸쓸함보다는 저자에 대한 공감과 존경심과 함께 법사회학자로서의 날카로운 한국사회 분석에 감탄을 하게 된다.

     

    공직 은퇴 후 인생의 ‘하신길’을 겸허하게 뒤돌아보며 쓴 이 책을 읽노라면 이렇게 아름다운 문체를 구사하는 법학자가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유려하면서도 진솔한 생각을 아름답게 이어간다. 

     

    ‘정치는 정의의 이름으로 한 맺힌 사람들의 싸움이 아닌가.’ ‘나는 아직껏 가끔 하루끼 책을 초컬릿 씹듯 기웃거린다.’ ‘노년의 일상 생활, 사랑이 별 게 아니다. 대신 설거지하며 주고받는 것이 사랑이다. 내가 아내보다 먼저 청소도구를 들면 아내는 또 다시 봄처녀처럼 행복스런 얼굴이다. 평소에 못 듣던 찬사를 연발할 때도 있다. 나의 아침 차리기는 가내 관습헌법이 되었다.’ ‘노년의 정서에서 덧없음과 서글픔을 제외하면 무엇이 남겠는가’라는 표현은 그저 나오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저자는 행동하는 지식인답게 한국 교수사회를 ‘갈등에 더해 무리를 짓는 군집성과 퀴퀴한 부식성이라는 토착적 기미를 지닌다.’고 정의하는가 하면, 한국에서의 진보와 보수 구분을 명쾌하게 진단하고 있다. 

     

    또한 ‘거인시대가 가고 왜소한 소인시대에 불과하고, 지식인 또는 지성인은 이제 멸종위기 단어다. 오늘날은 지식인이 아니라 전문가 시대로, 이들도 대중에 의해 포위당하고, 대중이 전문가 연하는 시대다. 오늘날 정치는 저열한 사익정치의 시대다. 사익정치와 적대정치를 결합하면 최악의 정치가 된다.’며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다. 

     

    저자는 글을 잘 쓰는 문사에의 꿈과 현실과 부딪치는 행동가의 삶이라는 꿈 속에서 지나온 궤적을 진솔하게 밝히고 있는데, 음악과 야구, 삶의 근원에 대한 고찰 부분은 미학서이자 인문학서로서 충분한 가치가 있다. 

     

    무엇보다 이 책은 한국전쟁 이후 한 개인의 인생사뿐만 아니라, 군사정권과 민주화 과정에서 행동과 번뇌, 헌법 학자로서의 지난한 길, 4대강 사업에 대한 감사 과정에서 벌어진 공직자로서의 결단 등을 통해 한국사회 질곡의 역사와 희망을 담고 있다. 또 장르를 넘나드는 풍부한 지식과 분석이 독자들에게 많은 여운을 남길 것이다.



    김영종 (포스코홀딩스 법무팀장·부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