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새로 나온 대법원판결을 읽다가 다음과 같은 구절에 접하였다. “부담부 증여에서 … 수증자가 증여자의 증여 의사를 신뢰하여 계약 본지에 따른 부담 이행을 완료한 상태임에도 증여자가 민법 제555조에 따른 특수한 철회를 통해 손쉽게 계약의 구속력에서 벗어나게 할 경우 법적 안정성을 해치게 된다.”(대법원 2022. 9. 29. 선고 2021다299976 판결, 판례공보 제646호, 2195면)
그 판결은, 서면에 의하지 아니하고 이루어진 부담부 증여(원고가 토지의 일정 부분을 피고에게 증여하되 피고는 원고의 숙모에게 3백만 원을 지급하기로 약정하였다)에서 수증자가 그 부담 전부를 이행한 후에는 증여자가 위 증여가 서면에 의하지 아니하였음을 들어 민법 제555조에 기하여 계약을 해제할 수는 없다고 판단하고 있다. 우리 학설은 이 법문제에 대하여 별다른 언급이 없으나, 위와 같은 판례 취지는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바이다.
그런데 나는 그 판시에서 ‘계약 본지’라고 하는 말에 주의가 기울여졌다. 여기서 본지는 本旨를 가리키는 것이리라. 그런데 적어도 민법전에서 그 말은 채권법, 나아가 계약법 총칙에서는 사라졌다. 의용민법에서 채무불이행에 관한 기본규정은 제415조인데, 동조는 “채무자가 그 채무의 본지에 따른 이행을 하지 아니한 때” 운운이라고 정하였다. 뿐만 아니라 변제 제공에 관한 제493조에서도 ‘채무의 본지에 좇아 현실로’라고 하였다. 그 외에도 계약법 각칙에서 사용대차에서 대주의 책임에 관하여 제600조에서 ‘계약의 본지에 반하는 사용 또는 수익으로 인하여 생긴 손해’라고 정하고, 나아가 위임에서 수임자의 주의의무에 관한 제644조에서 ‘위임의 본지에 좇아 선량한 관리자의 주의로써’ 위임사무를 처리하여야 한다고 하였다(이상은 2017년 대개정에서도 변화가 없다. 다만 새로이 여기저기 ‘계약의 내용에 적합하지 아니한’이라는 용어가 우리에게는 의미 깊게도 등장하였다. 무엇보다도 매도인의 담보책임에 관한 제562조 제1항 이하, 제570조, 제577조 등 참조).
그러나 우리 민법은 채무불이행 일반에 관한 제390조에서 “채무자가 채무의 내용에 좇은 이행을 하지 아니한 때에는”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변제 제공에 대하여도 제460조는 ‘채무 내용에 좇은 현실제공으로’라고 한다. 따라서 우리 민법에서 채무의 적법한 이행 또는 채무불이행과 관련하여 채무의 ‘본지’라는 표현은 의도적으로 회피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계약법 각론에서도 사용차주의 책임에 관한 제617조는 ‘계약 또는 목적물의 성질에 위반한 사용, 수익으로 인하여 생긴 손해배상’이라고만 정하고 ‘계약의 본지’라는 표현을 쓰지 아니한다. 다만 위임에서 수임자의 주의의무에 관한 제681조는 여전히 ‘위임의 본지에 따라’라고 하여 의용민법과 같이 정하고 있다(이는 상법에서 위임에 관한 제49조에서도 그대로 이어져서 “상행위의 위임을 받은 자는 위임의 본지에 반하지 아니한 범위 내에서 위임을 받지 아니한 행위를 할 수 있다”고 한다. 이는 일본 상법 제505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니 우리 민법에서 ‘본지’는 기껏해야 위임과 관련하여서만 등장할 여지가 있는 것이고, 채권이나 계약 일반에서는 이를 꺼내들 일이 아니다.
대법원판결이
굳이 ‘계약본지’를 말하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그것 없이 ‘계약에 따른 부담’이라고만 하여도
족하지 않은가?
아니면
이것은 그저 단어 하나를 넣고 빼고의 문제에
그치는 것인가?
나는 우리 민법이 채무불이행 등에 관하여 ‘채무의 본지’를 버리고 ‘채무의 내용’이라는 훨씬 정확하면서도 포용력이 있는 문언을 택한 것을 내심으로 자랑스럽게 생각하여 왔다. 그리하여 “어떠한 경우에 채무불이행이 있다고 할 것인가, 또는 채무불이행에는 어떠한 종류가 있는가 등의 문제는 … 민법 제390조에서 말하는 ‘채무의 내용’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와 관련된다”고 과감하게 주장하였던 것이다(곽윤직 편집대표, 민법주해[IX], 1995, 184면(양창수 집필부분)).
그런데 우리 재판례 중에는 특히 부인권에 관한 종전의 파산법 제64조(현재는 「채무자 회생 및 파산에 관한 법률」 제391조, 제584조)와 관련하여 ‘본지 변제’라는 말을 즐겨 써 왔다. 예를 하나 들면, 대법원ㅤ2002. 8. 23.ㅤ선고 2001다78898ㅤ판결(대법원판례집 제50권 2집, 50면; 판례공보 2002년, 2199면)은 “파산법 제64조 제2호 소정의 위기부인의 대상이 되는 ‘파산채권자를 해하는 행위’에는 파산자의 일반재산을 절대적으로 감소시키는 사해행위 외에 채권자 간의 평등을 저해하는 편파행위도 포함된다고 할 것이고, 변제기가 도래한 채권을 변제하는 이른바 본지(本旨)변제 행위가 형식적인 위기시기에 이루어진 경우에는 불평등 변제로서 위기부인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판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와 같은 우리 입법의 경위를 굳이 들 것도 없이, 우리말 사전은 ‘본지’의 뜻을 첫째, 근본이 되는 취지, 둘째, 본디의 취지라고 풀고 있다(무엇보다도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 그러므로 이 말은, 다시 예를 하나 든다면, 설명의무·안전배려의무 등 이른바 부수의무를 광범위하게 포용하면서 나아가 그 발전적 전개를 도모하고 있는 우리 채무불이행법의 전개와는 오히려 어울리지 않는다고 할 것이다. 위 대법원 2002년 판결이 본지의 한자말을 번거롭게 괄호 안에 넣어 밝혔다는 사실 자체가 이 말이 이미 우리에게 어색한 것임을 웅변으로 말하여 준다고 하겠다. 그럼에도 근자의 위 대법원판결이 굳이 ‘본지’를 말하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그것 없이 ‘계약에 따른 부담’이라고만 하여도 족하지 않은가? 아니면 이것은 그저 단어 하나를 넣고 빼고의 문제에 그치는 것인가?
양창수 석좌교수(한양대 로스쿨·전 대법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