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학교에서 돌아오다 추위에 얼어 죽은 7살의 학생이 있다고 하자. 그의 죽음을 적극적으로 막지 못한 국가는 그의 생명권을 보장하지 못한 책임이 있을까? 암으로 죽어가는 환자에게 특정 항암제를 제공하여 그의 생명을 보호하여야 할 국가의 적극적 작위의무는 존재하는가? 테러리스트에게 잡혀 있는 인질을 구출하기 위한 작전에서 인질의 희생이 발생하였다면, 구출작전 과정에서 효율적인 의료지원을 하지 못하고 희생에 대한 책임을 조사하지 않은 국가는 이들의 생명권을 보장하지 못한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일까? 물론 사실 관계를 지나치게 단순화하긴 했지만 유럽인권재판소는 이들 사건에서 모두 생명권 보호를 위한 국가의 적극적 작위의무를 발견하고 이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 국가에 대하여 배상 판결을 내렸다. 2. 인권보호에 대한 소극적 의무를 넘어 적극적 작위의무로 바로 얼마 전인 2012년 4월 10일 유럽인권재판소는 두 건의 의미 있는, 그러나 기존의 선례에 비추어 예상되었던 판결을 선고한다. 2004년 터키의 이스탄불, 눈보라로 인해 학교가 일찍 끝난 7살의 Atalay는 4 km 떨어진 자신의 집으로 걸어가기 시작하였고 다음 날 근처 강가에서 동사한 채로 발견된다. 학교로부터 수업이 일찍 끝날 것이라는 연락을 받지 못한 스쿨버스가 오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대해 유럽인권재판소는 국가가 그 학생의 생명권의 위험을 피할 수 있었던 수단을 강구하지 못한 것으로 보았다(failed to take measures which might have avoided a risk to the right to life). 또한 생명권 보장에 대한 국가의 적극적 작위의무는 실효적인 사법체계(effective functioning legal system)의 운용을 그 하나의 내용으로 하는데 터키가 7세 학생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묻고 적절한 배상을 제공할 수 있는 사법체계를 운용하지 못한 것을 이에 대한 위반으로 보았다. 여기에는 터키 대법원이 책임자에 대한 형사 상고심에서 4년이 넘게 판결을 내리지 않다가 절차적 흠결을 이유로 본안에 대한 심사 없이 사건을 하급심 법원으로 되돌려 보낸 것이 가장 크게 작용하였다(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국가배상사건에서 청구인들이 신청한 소송경비지원 신청이 구체적 이유 없이 기각된 것). 이에 유럽인권재판소는 터키 사법체계의 심각한 결함(serious deficiencies)을 지적한다. 또 다른 사건에서 국내법상 무상의료를 받을 수 있었던 청구인은 자신의 암치료를 위해 국가에게 특정 약품의 무상 제공을 요구하였으나 보건당국은 이 약품이 무상으로 제공될 수 있는 약품 목록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하였고 청구인은 마침내 사망하였다. 유럽인권재판소는 청구인이 요구한 이 약품이 청구인의 암치료에 효과가 있다는 점을 인정하는 한편, 이 약품을 대체할 수 있는 약품이 정부 당국의 목록에 존재하지 않음도 인정한다. 유럽인권재판소는 유럽인권협약에서의 인권보호는 실질적(practical), 실효적(effective) 보호라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하면서, 국가의 예산 부족이 이러한 보호의 결여에 대한 변명(excuse)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정부 당국이 약품 목록이라는 형식적, 관료적 이유(bureaucratic grounds)로 생명권의 실질적, 실효적 보호를 거부할 수는 없다고 보았다. 인권의 관점에서 국가는 전통적으로 위협이자 견제의 대상이었다. 따라서 초기 인권의 논의는 어떻게 하면 국가의 침해로부터 개인의 인권을 보호할 것인지에 대하여 초점을 맞추어 발전해 왔으며 이를 국가의 소극적 의무(negative obligation)라 한다. 즉, 국가는 제발 개인의 인권을 침해하지만 않아도 고마운 존재였다. 그만큼 인권보호에 있어 국가는 주된 침해자 이자 가장 큰 위협이었다. 그러나 인권의 발전은 국가에게 새로운 역할을 요구하기 시작한다. 국가가 단순히 인권을 존중(respect)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보호(protect)하고 나가가 이를 완수(fulfil)하는 적극적 의무(positive obligation)를 지어야 한다는 것이다. 1979년 선고된 두 건의 사건(Marckx v. Belgium과 Airey v. Ireland)에서 시작되어 1985년 X and Y 사건을 거치면서 확립된 유럽인권재판소의 적극적 작위의무에 대한 판결은 초기에 유럽인권협약 제8조 사생활과 가족생활의 보호에 대한 논의로 시작하였으나 1990년대 들어 제2조 생명권, 제3조 고문(비인도적 처우)의 금지를 중심으로 확장되기 시작하여 현재에는 제10조 표현의 자유, 제11조 집회의 자유 등 모든 조문에 적용되고 있다. 더욱이 이것은 사인(private person) 간의 관계로 까지 확장되고 있다. 즉 유럽인권협약상의 인권 침해가 사인에 의하여 발생하였다 하더라도 국가가 나서서 적극적으로 그러한 침해에 대처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유럽인권재판소의 많은 판례에서는 국가의 소극적 의무와 적극적 의무에 대한 판단이 같이 이루어지며 유럽인권재판소는 반복적으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비록 유럽인권협약이 국가에 의한 자의적인 침해(arbitrary interference)로부터 개인을 보호하는 것을 필수적인 목적(essential object)으로 하지만 이러한 인권에 내재(inherent)하는 국가의 적극적인 의무(positive obligation)도 존재한다. 인권이 실효적으로 보호되기 위해서는 단순히 국가가 이러한 인권을 침해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이의 보호를 위한 적극적인 행위를 요청한다. 3. 유럽인에 대한 보호를 넘어 국가의 적극적 작위의무에 대한 판례를 하나 더 소개하자면, 2011. 12. 20. 선고된 Finogenov 사건이 있다. 국내에도 잘 알려진 2002년 체첸 반군에 의한 러시아 모스코바 극장 인질 사건으로 약 900명 가량이 인질로 잡혀있는 상황에서 러시아 특수부대에 의한 구출작전이 개시되었고 125명의 인질이 구출작전 중, 혹은 그 이후에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러시아 특수부대는 이때 알려지지 않은 특수한 가스를 사용하였으며 구출작전이 대단히 성공적이었다고 자평하였다. 유럽인권재판소는 구출작전에서 사망한 사람들의 가족에 의해 제기된 사건에서 러시아 정부가 구출작전에서 체계적인 의료구조 서비스의 제공 등 인질들의 희생을 최소화 할 수 있는 가능한 모든 수단을 강구하지 않은 것과 희생의 원인 및 책임자에 대한 실질적이고 효율적인 조사(investigation)를 하지 않은 것이 생명권 보호를 위한 국가의 적극적 보호의무를 다하지 않은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유럽인권협약에 의한 국가의 적극적 보호의무는 단순히 자국민만을 향한 것이 아니다. 지난 1년 간 유럽인권재판소는 이러한 보호의 범위를 상당히 확장해 왔다. 물론 판례의 일관성을 유지하면서 말이다. 2011년 7월 7일 선고된 Al-Skeini 사건에서 유럽인권재판소는 2003년 이라크 침공 후 이라크 중남부의 치안을 담당하고 있던 영국이 그곳에서 발생한 영국군에 의한 이라크 민간인들에 대한 의문의 죽음에 대하여 독립적이고 효율적인 조사를 하지 않았다며 유럽인권협약 제2조 생명권 보호를 위한 적극적 보호의무를 위반하였다는 판단과 함께 희생자들에 대한 배상금 지급을 명한다. 또한 2012년 2월 23일 선고된 Hirsi Jamaa 사건에서는 이탈리아가 리비아를 떠나온 난민들을 공해상에서 억류하여 리비아로 돌려보내면서 이들에 대한 국제법상 난민지위에 대한 어떠한 확인도 하지 않고 비인간적인 처우에 처해질 가능성이 높은 리비아로 돌려보낸 것이 유럽인권협약 제3조의 비인간적 처우의 금지를 위반한 것이라고 판단하면서 역시 이탈리아에 대하여 배상을 명하였다. 이러한 유럽인권재판소의 적극적 판단은 유럽인권재판소의 사건수 증가에 따른 처리 기간의 지연 등과 맞물려 일부 회원국들의 반발을 불러오기도 했으나(2012년 2월 16일자 13면 '유럽인을 위한 특별한 보호 - 유럽인권재판소' 기사 참고) 지난 50여 년간 판례를 통해 입증된 유럽의 공통된 가치를 위한 유럽인권재판소의 역할과 개인청구권(individual complaint)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모두 공감하고 있는 상황이다. 4. 맺음말 얼마 전 이곳에서 도움을 많이 받고 있는 한 재판관과 국가의 적극적 작위의무에 대한 유럽인권재판소의 판례에 대하여 얘기를 나누던 중 다음과 같은 얘기를 들었다. 자신이 생각할 때는 유럽인권협약 제2조 생명권과 제3조 비인간적 처우의 금지에서 유래하는 국가의 독립적이고 효율적인 조사에 대한 적극적 작위의무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한다. 이것은 유럽인권재판소가 스스로 사실관계의 확정(fact finding)의 문제까지 나아가지 않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것이다. 즉, 해당 국가가 필요한 효율적인 조사를 하지 않았다는 것 자체만으로 위반을 발견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가깝게 지내는 한 영국 연구관은 자신은 국가의 적극적 작위의무에 대한 판례 중 제8조 사생활 및 가족생활을 존중받을 권리에 대한 판례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자신이 볼 때는 유럽인권재판소가 개인 간의 관계에 지나치게 개입하는 것이 아닌가 하여 우려스럽다고 한다. 이들의 인권보호에 대한 국가의 적극적 작위의무에 대한 논의를 보면서 스스로에게 묻곤 한다.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지금 어디쯤 와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