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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조인 총 20,766명 배출… 사법시험 역사 속으로

    서영상 기자 ysseo@lawtimes.co.kr 입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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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법시험이 7일 55명의 마지막 합격자를 배출하며 54년간 법조인 등용문으로서의 역할을 마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가난했던 시절 출신이나 학력, 성별 등에 관계없이 오직 실력만으로 높은 성취를 거둘 수 있어 '개천에서 용이 난다'는 속담을 실현해주기도 했던 사시는 2명의 대통령까지 배출하며 대한민국 발전의 역사와 함께 했다. 하지만 턱없이 낮은 합격률 탓에 '고시낭인'이 양산되면서 고급인력을 낭비하는 제도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사시가 올해를 끝으로 폐지되면서 법조인 배출은 시험을 통한 선발 체제에서 교육을 통한 육성 체제인 로스쿨 제도로 일원화되게 됐다. 


    ◇1947년 조선변호사시험이 효시= 사법시험으로 대표되는 시험을 통한 법조인 선발 방식의 효시는 해방 이후 1947년 시작된 '조선변호사시험'이다. 이후 1950년 '사법관시보의 임명수습 및 고시규정'에 따라 '고등고시 사법과'로 정비돼 16회에 걸쳐 시험이 실시됐다. 그러다 1963년 '사법시험령'이 공포되면서 지금의 사시로 전환됐다.

    사시가 시작된 1963년에는 상·하반기로 한해 두차례에 걸쳐 시험이 치러졌다. 그해 상반기에 실시된 제1회 시험에서 41명, 하반기에 실시된 제2회 시험에서 45명을 선발했다. 이듬해인 1964년 상반기에 치러진 제3회 시험에서는 10명, 하반기에 실시된 제4회 시험에서는 22명을 뽑았다. 지금처럼 매년 1차례 시행된 것은 1965년 제5회 시험때부터다.

     

    초기의 사시는 평균 60점 이상을 얻으면 합격하는 절대평가 방식이었다. 합격인원을 따로 정해두지 않았지만 시험이 어려워 합격자가 많지 않았다. 1970년까지 합격자 규모는 매년 33~83명 수준에 그쳤다. 1978년 제20회 시험에서 100명을 선발해 처음으로 100명 선을 돌파했다. 1981년 제23회 시험부터 300명 선으로 합격인원을 늘렸고, 1996년 제38회부터는 500명까지 늘었다. 이후 1997년부터 매년 100명씩 증원해 2004년 제46회부터 1000명선으로 합격자 정원이 대폭 늘어났다.

     

    사시에 합격한 예비 법조인을 위한 실무교육의 요람 사법연수원 역시 사법시험의 역사와 함께 했다. 1971년 법원조직법 개정을 통해 대법원 산하에 신설된 사법연수원은 사시 합격자를 대상으로 2년간 도제식 실무교육을 실시해 새내기 법조인으로서의 자질과 실력을 갖추도록 하는 모체가 됐다. 사법연수원이 생기기 전에는 사법관시보제가 있었으나, 1962년 4월 서울대에 사법대학원이 설치되면서 폐지됐다. 사법대학원을 마치면 판·검사의 임용자격과 함께 석사학위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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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사시는 2007년 7월 사법개혁의 일환으로 법학전문대학원 설치·운영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면서 변곡점을 맞았다. 국회는 변호사시험법을 제정하면서 2017년 사시를 폐지하기로 결정했다. 2009년 전국 25개 로스쿨이 문을 연 뒤에는 법률시장 수급 사정 등을 고려해 사시 선발 인원을 점차 줄여 지난해에는 109명까지 감소했다. 올해 마지막 시험에서는 55명만 선발됐다. 올해까지 모두 59차례의 사시가 치러지는 동안 70만8000여명이 응시해 2.9%인 2만766명이 법조인의 꿈을 이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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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엇갈린 '명암(明暗)'= 반세기 넘게 사시는 사람들에게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줬다. 고(故) 노무현(사법연수원 7기) 전 대통령이 고졸 학력으로 사시를 통과해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다가 국가 최고 지도자의 자리까지 오른 것이 대표적이다. 대학에서 민주화 시위를 하다 감옥에서 합격 소식을 들었던 문재인(64·12기) 대통령의 일화 또한 유명하다. 조재연(61·12기) 대법관의 수석합격기는 '인간승리'의 결정판이다. 강원도 어촌에서 피난민의 아들로 태어난 조 대법관은 덕수상고를 졸업하고 곧바로 한국은행에 입사했다. 가족들의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형편 탓이었다. 하지만 그는 법조인의 꿈을 접지 않고 성균관대 법대 야간학부에서 주경야독 끝에 1980년 제22회 사시에서 수석합격의 영예를 안았다. 그는 대형로펌 대표를 거쳐 지난 7월 대법관에 올랐다.


    권오곤(64·9기) 전 유고전범 국제형사재판소(ICTY) 재판관은 '수석 3관왕'으로 유명하다. 1976년 서울대 법대를 수석으로 졸업한 그는 이듬해인 1977년 제19회 사시에 수석 합격한데 이어 1979년 사법연수원까지 수석으로 수료했다. 

     

    하지만 이 같은 '성공 신화' 뒤에 가려진 그늘도 많았다. 좁은 합격문을 뚫지 못해 고시촌을 전전하며 청춘을 보내는 '고시낭인'도 많이 양산됐기 때문이다. 또 '기수 문화', '연수원 동기' 등으로 대표되는 서열화와 이너써클화로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어 법조계의 폐쇄성과 보수성을 조장한다는 비판도 받았다.

     

    ◇"이제는 로스쿨 시대"= 헌법재판소가 지난해 9월 사시 폐지를 규정한 변호사시험법이 합헌이라는 결정을 내리면서 국회가 별도의 사시 존치 법안을 만들지 않는 한 사시의 역사는 올해로 막을 내리게 된다. 법조인 배출이 로스쿨로 단일화되는 것이다. 


    법조계는 헌재 결정까지 나온 이상 사시 존폐 여부를 둘러싼 소모적인 논쟁은 이제 그만 접고 로스쿨이 법조인 육성의 요람으로 제대로 기능할 수 있도록 굳건히 뿌리내리는데 힘을 모아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대형로펌의 한 대표변호사는 "사시는 지난 세월 소시민들도 공부를 통해 성공의 가능성을 꿈꿀 수 있게 했다는 점에서 긍정적 역할도 많이 했지만, 보수적인 '기수문화' 등으로 급속도로 진행되는 한국사회의 발전에 발 맞추지 못한 부분도 있었다"며 "다양한 전공을 가진 학생들을 질 높은 교육을 통해 법조인으로 육성함으로써 국제적 기준에 걸맞는 다양한 법률전문가를 양성할 수 있도록 머리를 맞대야 할 때"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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