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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조라운지] “여성변호사 수직·수평적 진출 확대에 노력”… 윤석희 한국여성변호사회장

    “2년 간 신나고 즐겁게 활동”

    홍수정 기자 soojung@lawtimes.co.kr 입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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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회원 수가 8000명을 넘는 한국여성변호사회의 제11대 회장에 선임된 윤석희(56·사법연수원 23기) 변호사는 '현장을 누비는 실무가'로 통한다. 그는 책상 앞에 앉아 고민하는 대신 직접 현장으로 달려가 두 눈으로 직접 문제를 파악하고 개선안을 도출한다. 해상분야에 정통한 그는 한 달에 네댓번씩 출장을 떠나는가 하면, 더 깊은 전문성을 추구하기 위해 가족과 떨어져 홀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기도 했다. 윤 회장은 지난 10여년 간 여성변회 국제이사, 부회장, 수석부회장을 차례로 역임하며 '여성변호사 전부에 대한 실태조사'를 주도하는 등 차근차근 회무를 도맡아 왔다. 그는 "나는 이론가가 아니라 실무가"라며 "현장에서 디테일한 문제를 온 몸으로 감지하고 실시간으로 사람들과 소통하는 과정이 즐겁다"고 한다. 2년간 '신나고 즐겁게 활동하는 회장'이 되겠다는 그를 설 직전인 21일 서초동 사무실에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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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남 논산 출신인 윤석희(55·사법연수원 23기·사진) 신임 한국여성변호사회장은 1남 1녀 중 차녀로 태어났다. 드넓은 평야가 펼쳐진 1970년대 논산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집집마다 농사를 짓는 친구들도 많았고, 학교에서는 체험학습의 일환으로 '보리밭 밟기', '모내기' 등을 했다. 중학교 때는 거머리가 다리에 붙는 것을 피하기 위해 스타킹을 신고 논에 들어가 농사일을 거들고는 했다.

     

    중학생 때 꿈은 선생님

     고교시절은 법조인으로


    논산여중 재학 시절 반 친구들을 열정적으로 지도하며 사회비판적 의식도 보여주던 선생님이 멋져 보여 친구들과 함께 선생님이 되길 꿈꿨다. 그러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 법조인이 되겠다고 결심했다.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데 일조하고 싶었고, 성공한 법조인이 되고 싶다는 현실적인 생각도 했죠. 무엇보다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고 싶었어요. 그래서 중학교 시절 친구들은 대부분 공주대 사범대에 가는 가운데, 저는 이화여대 법대로 진학했죠." 

     

    그는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로 단연 '어머니'를 꼽았다. 중학교 3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어머니는 홀로 장사를 하며 자녀들의 뒷바라지를 전담했다. 대학교 때 사법시험 준비를 결심할 때에도 어머니는 변함없이 그의 선택을 지지해주었다. "어머니의 희생과 헌신은 법조인으로서 저의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여성변회라는 큰 조직을 이끌고 가야하는 시점에 가장 먼저 떠올랐던 인물도 바로 어머니였습니다."

     

    어머니의 희생과 헌신으로

    ‘법조인의 길’에 올라

     

    그는 1991년 제33회 사법시험에 합격해 사법연수원을 수료하고 1994년 법무법인 충정에 입사했다. 곧바로 송무업무에 뛰어든 그는 법률상담, 법률의견서, 증인신문 준비 등 눈코뜰새 없는 바쁜 업무에 야근이 일상사였다. 그러다 2년차 변호사가 됐을 때, 해상팀 선배 변호사가 제안한 해상업무가 그의 인생을 바꾸어놓았다. 여성으로서 흔치 않은 2세대 해상법 전문변호사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당시 해상법은 대학 강의나 사법시험에 잘 나오지 않는 과목이라 다소 생소했습니다. 하지만 삼면이 바다이고 수출물동량이 많은 우리 현실에서 상당히 유망한 분야라고 생각했습니다. 운송 기간 동안 화물이 선박에서 유실되거나 컨테이너 터미널에서 손상되는 등 사고가 발생하는 경우의 배상절차 및 책임문제 등을 다루죠. 알면 알수록 흥미로워 즐겁게 업무를 익혀나갔습니다."

     

    연수원 수료 후 로펌으로

     곧바로 송무업무 맡아

     

    1990년대 해상사건 변호사들은 지방출장도 잦았다. 외국국적 선박을 가압류하기 위해 부산, 포항, 순천 등으로 한 달에 4~5번씩 출장을 가며 전국을 누볐다. 그러다 어느새 수만 마일 넘게 쌓여버린 비행기 마일리지에 놀라기도 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사건에 관계된 다른 나라의 준거법도 공부해야 했고, 해상 실무에 관한 지식도 끊임없이 따라잡아야 했다. 변화무쌍한 환경이 힘들 수 있지만, 그는 해상법 분야의 역동성이 적성에 잘 맞다고 느꼈다.

     

    해상법 전문가로 활동하며 기른 소통 능력과 협상력은 여성변회 회무를 이끄는 원동력도 됐다. "해상법은 협상이 필요한 영역입니다. 재판을 통해 종결되는 사건만큼이나 합의종결로 마무리되는 사건이 많습니다. 이 과정에서 상대방의 주장과 증거들을 미리 파악해, 공방을 통해 합의점을 모색하는 경험을 무수히 하게 되죠. 이 과정을 통해 변호사로서의 협상력을 강화하게 됐습니다."

     

    여성법조인 늘었지만

    의사결정에는 여전히 ‘뒷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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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2002년 해상법 분야 전문성을 높이기 위해 미국 튤레인 대학교 로스쿨 석사과정(Tulane Law School LL.M in Admiralty)을 밟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어렵게 결심한 유학 과정은 좌충우돌의 연속이었다. 당시 그의 딸은 생후 24개월이 채 안됐다. 아이를 키워주겠다는 시댁 덕분에 유학을 떠날 수 있었다. 그런데 출국 한 달 전 둘째 딸을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미 유학 떠날 준비 절차를 모두 마치고 가족들과 상의도 마친 마당에 유학을 단념할 수는 없었다. 결국 그는 둘째 아이를 가진 상태로 출국해 미국에서 홀로 출산을 했다. 여기에 한국에서 몸 담았던 법률사무소 진리가 해산 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돌아보면 결코 쉽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꿋꿋이 버텨 유학생활을 마칠 수 있었죠. 그런데 당시 아이를 키우며 회사를 다닌 여성변호사에게 물어보면, 이런 극적인 스토리 하나쯤은 누구나 갖고 있을 겁니다."

     

    한국에 돌아온 윤 변호사는 2005년 학교여성폭력피해자 원스톱(ONE-STOP) 지원센터(경찰청) 무료법률지원단 위원을, 2006년에는 '한국 여성의 전화'에서 '가정폭력사건처리 및 관련법해설' 교육 등을 진행하며 여성문제에 관한 활동을 해나갔다. 

     

    가장 중요한 현안은

    ‘육아 등 따른 고용불안’ 해소

     

    여성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이태영(고시 2회) 변호사를 만난 198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학교 4학년 2학기에 '법률실습' 과목을 수강하며 이 변호사의 한국가정법률상담소에서 법률실습을 하게 된 것이다. "당시 이 박사님은 한복을 입고 매우 인자하고 카리스마 있는 모습으로 상담소를 이끌고 계셨습니다. 당신도 4남매를 힘겹게 기르시면서, 여성들의 아픔을 어루만지기 위해 상담소를 운영하는 모습이 고귀하게 느껴졌습니다. 이때 저는 아픔 있는 여성을 돌보는 것이 여성법조인의 사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윤 회장은 이때의 결심을 잊지 않고 사법연수원 2년차 때 '한국 여성의 전화'에 자원해 6년간 200여건의 법률상담을 진행하며 공익활동을 해나가기 시작했다. 

     

    여성변호사 중에서

    법조계 이끌 리더 배출에 최선

     

    그가 본격적으로 한국여성변호사회 회무를 시작한 것은 2011년의 일이다. 사무실에서 일을 보던 어느 날 제6대 한국여성변호사회 회장인 박보영(59·사법연수원 16기) 전 대법관이 찾아온 것이다. 깜짝 놀란 윤 회장에게 박 전 대법관은 "여성변회의 국제이사를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그 모습에 선뜻 따라나선 윤 회장은 본격적으로 여성변회 회무를 담당하기 시작했다. 2014년 부회장, 2018년 수석부회장을 역임하며 차근차근 여성변회 실무를 익히고 정책을 추진했다.

     

    "2012년 7월 9일부터 지금까지 매년 7월 초 대한변호사협회와 한국여성변호사회는 공동으로 여성변호사대회를 개최했습니다. 또 2014년과 2015년에는 여성법조인 릴레이 멘토링 강연회를 개최해, 어려움을 극복하고 살아온 선배 여성변호사들이 후배들과 교류하는 장을 마련하기도 했죠. 국회 여성가족위원회와 함께 2014~2015년 총 8회에 걸쳐 법제도를 바꾸기 위한 입법지원활동을 전개한 기억도 생생합니다. 청소년 및 가족 분야의 입법 사각지대를 발견하고, 관련 법조항의 문제점을 지적해 다양한 법개정안을 도출해냈죠."

     

    선배 제안으로 해상업무와 인연

     ‘전문변호사’로

     

    그는 여성변회 회무를 맡으며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으로 '여성변호사를 위한 실태조사'를 주도했던 순간을 꼽았다. "2012년 한국여성정책연구원과 함께 출산, 육아와 관련한 고용변호사의 근무조건에 관한 실태조사를 실시했습니다. 결과는 충격적이었습니다. 전체 여성변호사 1560여명 중 360명이 응답한 조사 결과에서, 출산한 여성변호사 중 34%가 '출산휴가를 사용해본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출산휴가를 사용한 변호사들 중에도 법정 휴가 기간인 3개월을 채우지 못한 응답자가 25%에 달했죠. 출산을 하고서 대체인력 고용이 힘들다는 등의 이유로 무언의 퇴직 압력을 받으며, 사실상 해고되는 일도 비일비재했습니다." 

     

    이 조사와 뒤이은 여성변회의 연구 및 건의는 2013년 대한변협 여성변호사특별위원회가 '청년여성변호사들을 위한 표준근로계약서', '대한변협 취업정보센터 내 육아휴직자 대체직 채용코너'를 마련하는 초석이 됐다. 

     

    “해상법은 합의가 필요한 영역”

     협상력도 키워

     

    올 1월 14일 열린 한국여성변회사회 제30차 정기총회에서 윤 회장은 제11대 회장으로 선임됐다. 2022년 1월까지 2년 간 여성변회를 이끈다. 대한변협 통계에 의하면 2012년 1560여명에 불과하던 여성변호사 수는 2020년 1월을 기준으로 8000명을 넘어섰다. 로스쿨 도입과 함께 여성변호사 증가 폭도 컸던 만큼 청년변호사가 다수를 차지할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윤 회장은 2020년 현재를 살아가는 여성변호사들에게 가장 중요한 현안으로 '육아 및 출산에 따른 고용불안 및 실질적 취업제한'을 꼽았다. "청년변호사의 비율이 높은 만큼 출산 및 육아를 해야하는 회원들이 많습니다. 이들에게 법조계의 불황과 고용불안은 이중고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꿈을 이뤄 변호사가 된 여성들이 적극적으로 일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일이 시급하다고 봅니다."

     

    윤 회장은 여성변회를 이끌며 '여성변호사들의 수직·수평적 진출 확대'에 힘쓰겠다고 밝혔다. 법조계를 이끌 여성 리더를 배출하고, 타 직역에 대한 여성변호사들의 진출도 늘리겠다는 다부진 포부다. "여성법조인의 수는 급증했지만 고위직이나 의사결정기구에 참여하는 수는 여전히 많지 않습니다. 여성변호사 중에서 법조계를 이끌 리더들이 배출될 수 있도록 여성변회가 지원하겠습니다. 기존의 △미래여성지도자 아카데미 △비즈니스 리더십 아카데미 △여성변호사 멘토링 프로그램을 지속적으로 실시할 예정입니다. 또 한국여성경제인협회와 '여성경제인법률지원단'을 최초로 발족해 여성경제인에 대한 법률지원을 실시할 계획입니다. 우리나라에는 147만 명의 여성경제인이 있지만 이들 중 상당수는 법률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법률적 고충 해결에 앞장서겠습니다. 이를 통해 여성변호사의 직역확대에 일조하고 여성들간의 연대도 이룰 수 있겠죠."


    지난 10여 년간

    여성변회의 다양한 회무 맡기도

     

    그는 여성변호사로서의 성공이 반드시 경제적 성공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강조했다. 여성이 가진 섬세함과 공감능력을 발휘해 소수자의 인권 증진에 기여하는 것 또한 법률전문가로서의 성공이라는 취지다. "2017년부터 여성변회에서는 친모의 동거남에 의해 학대 받아 두개골이 파열되고 눈이 실명된 5살 아이에 대한 법률지원을 했습니다. 결국 광주고법에서 동거남에게 아이에 대한 '살인미수죄'를 인정했죠. 아동학대 피해자에 대한 법률전문가의 지원 필요성을 절감한 사건이었습니다. 여성변회는 지금가지 지속해온 공익소송 사업을 강화해 나갈 계획입니다. 본회 산하에 설립된 아동청소년특별위원회, 이주여성피해자법률지원특별위원회의 활동도 강화하고 정부부처 및 지방자치단체와 협업해 현행 법제의 문제를 개선해 나가겠습니다."


    그에게 마지막으로 하고싶은 말을 물었더니 여성변회 활동에 대한 동참과 연대를 당부했다. "90세의 노인 '우공'이 산을 옮기기 위해 흙을 삼태기와 광주리로 나르자 옥황상제께서 그를 가엽게 여겨 산을 옮겨주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저도 재임기간 동안 '우공이산(愚公移山)'의 마음으로 과업들을 하나하나 실천하려고 합니다. 그러려면 여러분의 동참과 연대가 필요합니다. 공익사업, 멘토링 프로그램은 물론 가벼운 수다모임도 좋습니다. 격 없이 편한 마음으로 여성변회 활동에 함께 해주세요. 여성변회는 여성변호사 여러분 모두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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