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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조회고록

    [송종의 회고록][전문] 밤나무 검사의 자화상 (16)

    3부 채색 (彩色) ⑯ 분주했으나 실적 없는 검찰의 제2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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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사분이정(萬事分已定) 부생공자망(浮生空自忙)’


    대검찰청 차장검사

    (1993. 9. 21. ~ 1995. 9. 14.)


     

    내가 공직을 수행하는 동안 지니고 있었던 책과 자료는 사실 만만한 분량이 아니었다. 비좁은 생활공간에 이를 보관하며 지내는 불편이 오죽하였겠는가? 공직을 그만둔 이후 몇 번의 폐기 작업을 거쳐야 했다.


    제일 먼저 폐기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 법률책이다. 나 스스로가 이미 법조인이 아니라고 다짐했던 터이므로 법률에 관련된 책이 폐기대상물 제1호가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귀중한 책의 경우가 이러하였으므로 정리되지 못한 너저분한 자료는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규격도 일정치 않아 크기가 제각각인 각종 자료가 폐기 대상이 되었음은 당연하고, 직무와 관련된 여러 자료도 사사로이 보관함은 절대 바람직하지 않으므로 주저 없이 폐기처분했던 것이다.


    직무와 관련이 없는 비법률 서적 중 보존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책만을 골라서 검찰 도서관에라도 기증할까 생각해서 대검의 사무국장께 의사를 타진하였더니, 기증해 주면 대검 도서관에 남겨 두겠다는 언질을 받은 바 있었다.

     

    마침 그 무렵부터 공익법인인 천고법치문화재단의 설립을 구체적으로 구상해 오던 터였으므로 재단이 창립되면 어차피 재단 사무실이 있어야 할 것이고, 썰렁한 공간에 제법 쓸 만한 책이 진열된다면 오히려 좋겠다고 생각되어 보류하던 중 2014년 5월 30일 위 재단이 설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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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검찰청 건물 <사진=대검찰청 박현철 대변인 제공>

     

    곧이어 내가 설립한 양촌영농조합법인의 건물 일부를 재단 사무실로 꾸리게 되어 그 사무실에 7개의 책장을 비치하고 폐기 과정 중 살아남은 책들을 진열함으로써 대검찰청 도서실의 귀중한 서가를 빌리지 않게 되었다.


    이 글을 써 가다 보니 구체적인 일자와 사실관계를 확인해야 할 일이 생겼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나의 집인 천고재와 사무실인 천목헌 및 천고법치문화재단 사무실의 책장을 살펴보았더니 30년 가까운 세월, 틈틈이 하루하루의 중요한 일과를 기록하였던 업무 일지의 대부분이 사라져 버리고, 서울지방검찰청 특수제1부장 때부터 법제처장으로 공직을 마칠 때까지의 업무 일지 13권만 남아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러나 1994년의 업무 일지 한 권은 보이지 않는다. 이 기간은 내가 대검 차장검사로 재직할 당시였다.


    하기야 대검찰청의 차장검사라는 자리는 전국 검찰의 모든 검찰행정과 수사사무를 총괄하여 검찰총장을 보좌하여야 하는 직책이므로 그 업무 처리 내용은 전국 검찰의 업무를 총망라해야 하는 것이어서 이는 검찰 전체의 역사와 다름없다. 그 업무 일지를 찾아 내용을 살펴본다 한들, 과연 그 내용이 오늘 내가 쓰는 글에 얼마나 보탬이 될는지 알 수 없고, 오히려 머리만 번잡스럽게 만들 소지도 없지 않다.


    나의 서울지검장의 재직 기간이 거의 끝날 무렵, 당시 대검 차장검사였던 김도언 씨가 임기 2년의 검찰총장에 임명되었다. 그의 취임 후 뒤이어 단행된 고검장과 검사장급 인사 발령으로 나는 1993년 9월 21일 그의 후임으로 제26대 대검찰청 차장검사직으로 전보되었다.


    이 대검찰청 차장검사라는 직책은 중앙행정부처와는 다른 특색이 있는 자리이다. 이 직위는 외형상으로만 본다면 법무부 산하기관인 대검찰청의 검찰총장을 보좌하는 부책임자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정부조직법의 서열상으로는 법무부 차관보다도 앞설 수 없는 직책이다.


    그런데 업무의 중요성으로 인하여 검찰에서는 법무부 차관의 상 서열자가 대개 이 자리를 차지하며 수십 년 검찰의 전통을 이어 왔다. 행정부처 공무원들이 도저히 이해 못하는 인사 관행이었다. 이런 역사적인 전통과 관행에 따라 검사가 아닌 정무직인 법무부 차관은 인사에 관해서는 일절 관여하지 않고 지내는 자리로 남아 있는 것이다.


    공무원보수규정에 따라 고등검사장인 대검 차장검사에게는 검사장급의 보수를 받는 법무부 차관보다 더 높은 보수가 지급됨은 당연할 것이다. 직위의 명칭도 정부의 산하기관인 청의 부책임자 명칭과는 다르다. 정부조직법상의 기관인 청의 부책임자는 ‘차장’이나 대검찰청이란 기관이 법률상 법무부 소속 청이기는 하나 부책임자의 명칭은 대검찰청의 차장이 아니라 ‘대검찰청 차장검사’이다. 따라서 통칭인 ‘대검 차장’이란 용어는 잘못된 것이다.


    나의 검사 경력을 자세히 살펴보니, 대검 차장검사직에서 바로 법무부 장관으로 기용된 분은 네 분이었고, 검찰총장으로 승진한 사람은 다섯 사람이며, 다른 장관급 자리로 영전한 분은 두 분이었다. 내 직전의 대검 차장검사 세 분은 연이어 검찰총장으로 승진 기용되었다.


    이 인사 발령이 나를 곤혹스럽게 한 것은 나의 손위 둘째 처남인 문상우(文相羽) 씨 때문이다. 그 이전에 그는 이미 1급 공무원인 대검찰청 사무국장 보직을 맡고 있었으므로 내가 대검찰청의 차장검사가 된다면 처남 매부 두 사람이 같은 청인 대검찰청에서 상하 관계로 복무하여야 하는 딱한 처지가 된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검찰청 차장검사는 검찰사무직 직원에 대한 인사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면서 검찰총장을 보좌하여야 하는 직책이므로 검찰일반직의 총수인 대검사무국장의 인사에 관한 보고를 청취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으니 이게 과연 옳은 것인지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대검찰청 차장검사는 특색있는 자리
    통상 법무부차관 상 서열자가 자리 지켜
    전국 모든 사건 내용 파악해야 하는 직책
    총장에게 보고하는 분량도 만만치 않아


    재임 2년간 여러 번 검찰 인사 있었지만
    한 번도 대상에 못 오르고 한자리만 지켜
    1995년 8월 대검 신청사로 사무실 옮겨
    한 달도 못 되는 기간 근무 후 검찰 떠나


    인사라는 것이 아무리 공평무사하게 처리된다고 하더라도 인사를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다소간의 불만이 없을 수 없으므로 항시 뒷말이 따라다니는 것이 인사의 통례임을 공직 생활을 통해 잘 알고 있는 나로서는 이 문제가 가장 곤혹스러운 것이었다.


    법무부 장관이나 검찰총장이 나와 문상우 공과의 관계를 물론 모를 리 없지만 결과적으로는 이렇게 된 것이었다. 대검 차장 부임 후, 물론 이 사정을 상사에게 언급하였으나, 그 사정을 모르고 한 인사 발령이 아니니 슬기롭게 대처하면 된다는 것이 돌아온 말의 전부였다.


    부임 즉시 대검사무국장인 문상우 공에게 당부하였다. 다른 행정사무는 통례적으로 내게 보고하되, 검찰사무직의 인사에 관련된 내용은 검찰총장에게 직접 보고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나의 부임 후 문상우 공은 1년 남짓 대검찰청의 사무국장으로 재직하다가 퇴임하였는데, 그 기간 중 나는 검찰의 일반직 인사에 관해서는 일절 관여한 바가 없었다.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은 물론 나의 결심과 처신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요즈음에 와서도 별로 달라지지 않을 것 같은 당시의 검찰관행 한 가지를 적어 둔다.


    대검 차장검사의 직책이 전국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모든 사건의 내용을 파악해 두어야 하는 직책이므로 전국 지방검찰청과 고등검찰청에서 보고된 사항 중 대검의 소관 부서를 거쳐 검찰총장에게 보고되는 내용의 분량이 만만치 않다.


    이 보고 이외에 대검찰청 공안부와 중앙수사부에서 자체 생산해 보고하는 내용까지 덧붙여 놓고 본다면 하루에 수십 건, 때로는 수백 건의 보고서를 읽어야 하고, 그중 검찰총장이나 법무부 장관에게 보낼 보고내용을 가려내야 한다.


    보고서를 읽고 나서 보면 사실 별것 아닌 것이 대부분이다. 아무리 산하 부서에 지시해 보아도 이 보고서의 분량은 좀처럼 줄지 않았다. 그러므로 대검 차장검사란 자리는 근무 시간의 대부분을 이 보고서 읽는 데 소비할 수밖에 없었다.

     

    궁리 끝에 보고서는 가급적 한자를 섞어서 작성하도록 지시하였다. 나는 어려서부터 한자에 비교적 익숙하여 한자가 섞여 있는 글은 빨리 읽을 수 있으나 한글로만 되어 있는 문장은 읽는 데는 오히려 시간이 더 필요했다.


    한자가 표의문자이므로 눈에 띄면 금방 뜻이 들어오지만, 한글은 표음문자이므로 이를 그대로 읽어야 한다는 특성 때문에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지시도 잘 이행되지 않았다. 한문에 익숙지 못한 세대들에게 이런 지시를 하는 상사가 한심하다는 생각에서였는지, 아니면 한자를 제대로 찾아 타자해서 보고서를 만드는 것이 불편해서였는지 둘 중 하나가 그 이유였을 것이다.


    하여튼 이 많은 분량의 보고서를 읽느라고 귀중한 시간을 많이 허비하였을 뿐만 아니라 어려서부터 고도 근시로서 가뜩이나 나쁜 눈의 시력이 많이 감퇴된 것이 사실이다. 이 보고서뿐만이 아니다. 매주 2회 이상 정례적으로 이어져 오고 있는 서울지검장의 정례 보고를 받아야 하는 것도 큰 임무였다.


    당시의 서울지방검찰청은 서울지검 본청과 5개 지청 즉 동부, 서부, 남부, 북부 및 의정부지청 등 5개의 산하지청으로 구성되어 단일검찰청인 서울지방검찰청과 산하 지청에 근무하는 검사의 수가 전국 검사의 3분의 1 이상을 차지할 정도였다.


    근간에 서울지방검찰청의 본청이 서울중앙지방검찰청으로 명칭을 바꾸고 검사장의 직급을 고등검사장으로 격상시키면서 5개 지청이 5개의 지방검찰청으로 개편되었다. 따라서 수도검찰인 서울지방검찰청의 중요성을 요즈음의 체제와는 비교할 처지가 못 된다.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는 대부분의 사건이 서울지방검찰청에서 처리되는 것이 당시의 실정이었으므로 서울지방검찰청 검사장이 보고하는 사건의 중요성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서울 검사장의 정기 또는 수시 보고를 받아야 하고, 각종 회의를 주재하거나 참여하여야 할 뿐만 아니라 대검 각부의 모든 업무를 총괄하여 살펴야 하는 당시 대검 차장검사의 노고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같은 고등검사장의 직급이긴 하지만 오늘까지도 서울중앙지방검찰청의 검사장도 대검 차장검사에게 보고하고 그의 지시에 따라 업무를 처리할 것이다. 하여튼 이런 식으로 업무를 처리하면서 2년의 세월을 보냈다.

     

    내가 그 직에 재임하는 2년의 기간 중 여러 번의 검찰 인사가 있어서 많은 검사장과 고등검사장의 보직이 변경되었다. 그러나 나는 한 번도 그 대상이 되지 못한 채 만 2년간 대검 차장검사 한자리만을 지키고 있었을 뿐이다.

     

    나의 후임 기수가 검찰총장으로 발탁되던 날, 김도언 검찰총장은 나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내가 송 차장을 적당한 때 서울고검장으로 자리를 옮겨 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이 미안하다는 취지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후임 검찰총장으로 지명된 사람은 나의 대검 차장검사 임기 중 서너 번이나 승진과 영전을 거듭하면서 검사장에서 서울고등검찰청의 검사장직에까지 와 있었던 사람이었다.


    같은 고등검사장의 직급인 서울고검 검사장과 대검 차장검사는 서로 자리를 바꾸기도 하고, 선·후임의 구분 없이 인사 여건에 따라 임명되어 오던 터였으므로 나의 보직을 바꾸어 서울고검으로 보낼 기회가 있었으나 나의 보직은 바뀌지 않은 채 검찰총장의 임기가 만료됨과 동시에 나 역시 검찰을 떠나게 되었던 것이다.


    내가 서울고등검찰청의 검사장직에 있었다 하더라도 검찰총장이 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은 잘못된 것이다. 나의 대검 재임 중 서울고검의 검사장으로 K 씨가 임명되었을 때, 나는 이미 차기 검찰총장은 내가 아니라는 사실을 직감하였으며 그 예측은 옳았다. 김 대통령, 법무부 장관 A씨, 위 K씨 등 3인은 모두 경남 태생으로 경남고등학교 출신의 동문이었기 때문이다.


    통치자와 아무런 학연이나 지연이 없었던 내가 검찰총수가 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였던 것이 엄연한 사실이고 보면, 그 결론은 극히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나는 퇴임 오래전부터 마음의 준비를 해왔으며, 내가 통치자라고 생각해 보아도 별로 실현 가능성이 없는 일을 기대하는 것은 무모하다 못해 어리석은 것이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는 참 잘된 일이었다.


    만약 내가 검찰총수가 되었다면 그 당시의 시대 상황이나 나의 성품에 미루어 보아 불명예스럽게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떠나는 검찰총장이 되었을 것이 거의 틀림없다. 그러므로 나는 ‘만사분이정(萬事分已定) 부생공자망(浮生空自忙)’이란 말을 인용하면서 안분지족(安分知足)의 마음으로 검찰을 떠난다는 말을 남길 수 있었다.


    ‘만사분이정 부생공자망’이란 말은 『명심보감』 「순명편(順命編)」의 글이다. 몇 번 읽어 보았으나 그 정확한 출전(出典)을 알 수 없어서 그런 줄로만 여기고 있었다. 언젠가 정민(鄭珉) 교수가 쓴 글을 읽고 난 다음에야 그 말은 청나라 때의 왕지부(王之?)가 엮은 『언행휘찬(言行彙纂)』이란 책에 실린 5언 절구 시의 두 구절임을 알았다.


    책의 편자도 그 원작자를 밝히지 못하였으며, 중국 호남 지방 산중 농가의 벽 위에 적혀 있는 네 수의 시를 그 책에 실어 놓았는데, 이 시는 그 두 번째 시라고 함에 그쳤다. 주희(朱熹)의 시라고 하는 설이 있으나 확실치 않고, 원작자는 지금껏 정확히 알 길이 없다.

    그 시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경우무숙초(耕牛無宿草) - 밭 가는 소 저 먹을 풀이 없는데
    창서유여량(倉鼠有餘糧) - 창고 쥐는 남아도는 양식이 있네
    만사분이정(萬事分已定) - 온갖 일 분수가 정해져 있건만
    부생공자망(浮生空自忙) - 뜬 인생이 홀로 바쁘다

    이 시의 전문을 읽고 보니, 원작자가 나의 처지를 소에 비유해서 이미 수천 년 전에 20자의 글로 표현한 것 같아 웃음이 절로 나오면서도 섬뜩한 느낌이 없지 않다. 내가 인용하였던 위 시의 두 구절을 많은 법조기자가 기사로 적어 그 내용이 도하 각 신문에 보도되었다. 그때 내가 만일 이 시의 전문을 자세히 알고 있었더라면 이런 말을 함부로 지껄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알려면 제대로 알아야 한다.


    대검 차장검사 재임 중 1년분에 해당하는 없어진 검찰 업무 일지를 찾았다 해도 더 쓸 말은 없을 것이다. 나의 재임 중에 처리되었던 그 많은 사건의 경중(輕重)과 공과(功過)를 따질 것이 아닐뿐더러, 이는 검찰 그 자체의 역사이다. 사사로이 언급할 것이 없고, 또 해서도 안 된다. 더구나 그 많은 사건이 나의 책임하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므로 그 뒤안길에서 이를 지켜본 심정만이 남았을 뿐이다.


    김도언 검찰총장의 후임이 지명되던 날, 김 총장은 사무 당국에 나의 퇴임식을 준비하라고 지시하였다. 대검찰청 차장검사는 그 직책의 명칭과 같이 기관장이 아니고 검찰총장을 보좌하는 직책에 불과하므로 기관장인 검찰총장이나 지검장과 달라서 퇴임식을 거행하는 것이 어쩌면 적절치 않은 것이다.


    사무국에 과거의 선례를 찾아보라고 지시한 결과, 선례도 별로 없어서 퇴임식을 사양하였으나 총장께서 내가 후배들에게 남길 말이 있을 것 같아 퇴임식을 마련하라고 이미 지시하였다 하므로 부득이 퇴임식을 치르게 된 것이다.


    나의 대검 재직 기간 중인 1995년 8월 5일 신축 대검찰청 청사부지 한곳에 검찰의 타임캡슐을 매설했다. 400년 뒤에 개봉하라는 뜻이 대검에 기록으로 남겨져 있다. 후대에 전할 만한 귀중한 기록이나 자료의 현물을 가려내어 원형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는 특별한 조치를 마련해서 땅속에 깊이 묻었다. 많은 예산이 들었다. 당시에는 이 행사를 역사적인 것으로 생각하여 추진했다.


    20여 년 전의 일이었는데, 요즈음에 이런 공사를 벌였다면 그 내용이 많이 달랐을 것 같다. 듣도 보도 못한 디지털 세상이 되어 버렸으니 과연 그런 행사를 벌일 필요가 있을지에 대한 근본적인 논의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의 대검청사는 1995년 8월 28일 준공되어 나도 그때쯤 서소문의 구 검찰종합청사로부터 신청사로 사무실을 옮겼다. 그 사무실과 검찰총장의 사무실이 8층의 남쪽 편에 자리 잡았다. 나는 이 사무실에서 한 달도 못 되는 기간 근무한 후 검찰을 떠났다.

     

    청춘을 불사르며 살아왔던 검사로서의 생활이 어렵기는 하였으나 참으로 보람된 것이었음은 사실이다. 김 총장의 재임 기간인 2년 내내 나를 차장검사로 근무하도록 배려하면서 내가 후임 검찰총장으로 지명되지 못한 것을 마치 자신의 잘못인 것처럼 여기며 미안해하던 김도언 검찰총장님께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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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검찰청 차장검사의 재직기념패 5개가 남아서 나의 논산 양촌 사무실 뒤편 진열장에 들어 있다. 그 기념패를 내게 만들어 준 사람들은 다음과 같다.


    1. 법무부 장관 안우만(安又萬)
    2. 검찰총장 김도언(金道彦)
    3. 대검찰청 간부일동
    4. 전국 고·지검 검사장 일동
    5. 대검찰청 과장 및 연구관 일동

    당시의 대검찰청 간부는 총무부장, 중앙수사부장, 공안부장, 형사부장, 강력부장, 감찰부장, 공판송무부장 및 사무국장 등 8명이다.

    전국 고·지검장의 명단은 17명이며, 그 패에 새겨진 성함은 다음과 같다.


    김기수(金起秀), 최명선(崔明善), 황상구(黃相九), 김택수(金澤秀), 김정길(金正吉), 최영광(崔永光), 주광일(朱光逸), 심상명(沈相明), 박순용(朴舜用), 심재륜(沈在淪), 최경원(崔慶元), 김상수(金相洙), 김태정(金泰政), 신상두(申相斗), 송정호(宋正鎬), 박인수(朴仁秀), 이재신(李載侁).

    대검찰청 과장 및 검찰연구관의 명단은 잘 세어 보니 46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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