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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오곤 회고록] 제3화 : 선거에 당선되다 (2)

    식민지배 및 전란 피해국에서 반인도범죄 단죄 국제재판관 배출

    권오곤 전 재판관 입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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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3화 : 선거에 당선되다 (2)

     


    급박했던 후보자 추천
    외교부(당시 명칭 외교통상부)는 2001년도 ICTY 재판관 선거에 우리나라 후보를 추천할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만약 그와 같은 의도가 있었다면, 적어도 선거 1년 전에는 후보자를 선정하여 선거운동을 시작하였을 것이다. 사실 외교부로서는 실제로 후보자가 나오리라고 예상하지 않았던 것 같다. 1997년도에 있었던 제2기 ICTY 재판관 선거 시에는 대법원에서 후보자를 추천하였었는데, 후보자 본인이 나중에 입후보를 철회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외교부는 2001년 3월 14일로 정해진 선거가 석 달 정도 임박한 2000년 12월경에 유엔 사무총장으로부터 후보를 추천해 달라는 공문을 받은 후, 이를 대법원을 비롯한 각 관계기관에 전달하였다가, 예상 밖으로(?) 대법원으로부터 나를 후보자로 추천하는 공문을 받고 나서 상당한 고민을 하였다고 한다. 처음에는 우리나라가 그 당시 국제기구에서 출마했던 선거가 너무 많아서 지지표 확보가 어렵다는 이유로 후보를 내는 것에 부정적 입장도 있었지만, 결국에는 한국 법관이 국제재판소 진출을 시도하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고 판단하여, 후보를 내기로 의견을 모았다고 한다. 이 점과 관련하여서는, 당시의 외교부 차관으로서 한국 법관의 국제 무대 진출을 위하여 적극적으로 도와주셨던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님께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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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법관의 국제무대 진출에 적극적이었던 당시 외교통상부 차관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님 (2007년 2월 유엔의 산하 기관인 ICTY를 방문했을 당시의 사진. 1907년 이준 열사 일행이 만국평화회의에 입장할 수 없었는데, 그로부터 100년 뒤에 한국인이 유엔의 수장이 되어 헤이그를 방문하게 되니 감회가 깊었다. 뒤편 왼쪽은 Fausto Pocar ICTY 재판소장, 한 사람 건너 가운데는 Nicolas Michel 유엔 법률담당 사무차장, 가장 오른쪽은 반 총장님을 보좌하던 사무차장보 김원수 대사.)


    대법원 추천에 얽힌 뒷이야기
    나보다 연수원 기수 2년 선배로서 서울고등법원에 근무하고 있었던 모 부장판사가 입후보의 기회를 놓쳤던 것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대법원에서는 외교부의 후보추천의뢰 공문을 첨부해서 각급 법원에 입후보를 희망하는 법관이 있는지 물었는데, 서울고등법원에서는 그 회람지를 각 층마다 1부씩만 배부해서 서로 돌려 보도록 했다. 그런데 그보다 먼저 회람지를 읽었던 옆방의 판사가 이를 다른 방에 돌리는 것을 잊어, 그는 이를 늦게서야 보게 되었다. 그는 곧 대법원에 입후보 의사를 알렸지만, 그때에는 이미 나를 외교부에 추천한 이후여서, 너무 늦은 상황이었다. 만약 그가 적기에 의사를 표시하였다면, 대법원에서는 서열 등에 비추어 그를 추천하였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사람의 일에는 묘한 운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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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선거운동 담당자였던 이기철 서기관은 나중에 네덜란드 대사로 부임해 와 헤이그에서 다시 만났다. 2011년 대사관저 만찬 후 사진. 왼쪽부터 오상진 판사(ICTY 연구관), 이자형 참사관, 필자, 이기철 대사, 송상현 ICC 소장, 곽성규 공사


    선거운동의 실제와 비판론
    ICTY 재판관 선거는 후보자 개인에 대한 선거이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국가 자체에 대한 선거와 마찬가지의 양상을 띠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후보자 개인의 면면 여하도 중요하지만, 나라의 국력, 국제 사회에서의 평판, 그리고 외교관들의 노력 여하에 따른 변수 역시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훌륭한 후보가 당선되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유엔에서의 가장 일반적인 선거운동의 모습은 국가 간의 ‘교환지지’ 약속이다. 이러한 약속은 대부분 문서를 교환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2001년도 선거 당시 우리나라 유엔 대표부에서는 각 회원국을 나에 대한 지지 정도에 따라, ‘문서지지’, ‘구두지지’, ‘호의적 고려’, ‘미정’, ‘지지불가’ 등으로 분류했다. 각종 미사여구로 수식되는 외교 용어를 감안할 때 각 국가의 입장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분류하는 데에는 상당한 외교적 경험을 필요로 한다. 우리 대표부에서는 문서지지의 경우에는 10%, 구두지지의 경우에는 40%, 호의적 고려의 경우에는 60% 정도가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으로 계산하면 대체로 실제로 받게 될 표와 비슷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실제로 내 경우, 선거 당일까지 확보한 지지표를 위 분류에 따라 분류해 보면, 문서지지가 97개국, 구두지지가 29개국, 호의적 고려가 10개국이어서, 이를 위 방식대로 계산해보면 약 108표(97×0.9 + 29×0.6 + 10×0.4)가 되는데, 실제로 내가 얻은 표는 109표여서, 우연일지는 몰라도 위 계산 방식의 정확성에 놀라고 말았다. (최근에는 위와 같은 ‘부도율’이 점점 더 올라가고 있다고 한다.)

    한편, 국제재판소 재판관 선거와 관련하여, 선거운동이 교환지지라는 이름 아래 ‘정치적 흥정(horse trading)’을 통하여 이루어지게 지게 되면, 재판관의 독립성과 중립성을 해할 수 있고, 심지어는 재판관 자격이 없는 사람이 당선될 수도 있게 된다는 비판론이 제기되어 왔다. 그래서 최근 ICC 재판관 선거와 관련해서 개선책이 점차 마련되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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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유엔대표부 주최 리셉션에서 선준영 대사와 함께 외교사절들을 맞는 모습


    선거에 강한 한국 외교의 전통
    나의 입후보가 선거에 임박해서 급박하게 결정된 탓으로, 초기에 확보한 표는 많지 않았다. 출국을 앞두고 외교부 담당자가 브리핑을 해 주면서 “현재까지 우리가 확보한 표는 세 표입니다.”라고 해 준 설명은 당선이 어려우리라는 당시의 예상을 단적으로 설명해 주는 장면이었다.

      

    우리나라는, 예전 유엔에서 남북 대결의 역사를 가졌던 덕분인지, 선거에 강하다는 평을 듣고 있다. 2001년도의 재판관 선거에서도 유엔대표부에 있는 거의 모든 참사관급의 외교관들이 각자마다 10여 개국씩을 나누어 담당하면서 열심히 뛰어 주었다. 아무리 전화를 해도 응답 전화가 오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으나, 우리 외교관들은 하루 몇십 번씩, 며칠씩이라도 전화를 해서 통화를 하고야 만다. 심지어는 내 선거 담당자였던 이기철 서기관은 통가, 키리바시 등과 같이 당시 뉴욕에 대표부가 없는 나라에 대한 선거운동을 포기하지 않고 관계 규정을 뒤져서 대리투표(proxy vote) 제도가 있는 것을 찾아낸 다음, 그 인접 국가 대표부 외교관의 대리투표에 의한 지지표를 받아내고 마는 억척스러움까지 보였다. 이러한 차이가 우리 외교의 강점을 만드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참사관급 외교관들 10여 개국씩 맡아

    일일이 지지 호소


    선거 보름 전 뉴욕 출국

     유엔본부에서 선거운동 총력


    후보자 본인의 활동
    후보자의 선거운동은 두 방향에서 진행될 수 있다. 하나는 외국을 방문하여 관계자에게 직접 선거운동을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선거가 치러지는 뉴욕의 유엔본부에서 각국 외교관들을 상대로 하는 선거운동이다. 그렇지만 내 경우에는 전자의 선거운동을 할 여유는 없었다.

     


    하여 선거일 보름 전인 2001년 2월 28일에 유엔본부 현지에서의 선거운동을 위하여 뉴욕으로 출국하였다. 그 무렵 마침 ICC 창설을 위한 준비위원회 제7차 회의가 열리고 있었는데, 여기에 내가 한국 측 대표의 일원으로 참석하면서, 발언을 하기도 하였다.

    선거를 1주일여 앞둔 3월 6일에는 유엔대표부 공관에서 각국 유엔대사 등 외교관들과 ICC 창설 준비위원회 대표들을 초청해서 리셉션을 열었다. 며칠 전에 열린 호주대사 주최의 리셉션에 70여 명이나 참석하였다는 보고를 듣고 걱정하던 중에, 우리측 리셉션에는 80여 개국 90여 명이 참석해 주어, 좋은 징조를 보였다.

    그 외에 내가 주로 한 일은 선거담당자가 짜주는 일정에 따라, 각국 대표들을 만나 지지를 부탁하는 일이었다. 그러한 과정에서 나는 로비(lobby)라는 말의 연유를 실감할 수 있었다. 외교관들은 실용적인 이유로, 유엔본부에서 열리는 각종 회의에 참석하는 도중에 짬짬이 로비에 나와서 만나 간단히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선호한다고 하였다. 대부분은 유엔총회장 뒤편에 있는 일명 ‘인도네시아 라운지’에서 이루어졌는데, 그곳은 넓은 로비에 응접세트를 몇 개 설치해 놓은 곳으로서, 우리가 한 응접세트에 앉아서 로비를 하고 있는 동안, 옆의 응접세트에서는 다른 나라 후보들이 다른 나라 외교관들을 만나 로비를 하고 있었고, 각 30분 단위의 약속시간이 지나면 서로 상대방을 교환하여 만나기도 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덕분에 나도 선거운동을 하면서 자주 만나게 되었던 다른 나라의 몇몇 후보자와는 친하게 되기에 이를 정도였다. 때로는 북쪽 라운지 (North Delegate Lounge)도 많이 이용했고,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유엔본부 부근의 식당에서 만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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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거 당일 유엔총회 회의장에서 각국 대표단에게 배부한 영어, 불어, 스페인어, 아랍어로 된 지지호소 전단지. 그런데 일부 후보들은 홍보용 브로셔를 칼라사진까지 곁들어서 멋있게 만들어 배부하는 바람에 기가 죽기도 했다.

      

    당선될 수 있었던 이유
    돌이켜보면, 급박했던 입후보와 짧았던 선거운동에도 불구하고 내가 재판관 선거에서 당선의 영광을 안을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우리나라의 신장된 국력과 국제 사회에서의 좋은 평판, 정부 당국의 적극적인 배려, 그리고 유엔대표부와 세계 각국에 파견되어 있는 우리 외교관들의 헌신적인 노력 덕분이었다. 그 밖에도, 당시 ICTY 재판이 신속하게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현실에 비추어, 실무경험이 있는 판사 출신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도 도움이 되었던 것 같기도 하다.

    한편, 당시 14명의 현직 재판관들 중에 아시아 출신은 두 명(중국, 말레이시아) 뿐이었는데, 아시아 출신 후보로는 세 명이 출마하였다. 내가 새로 출마한 이외에, 중국 후보는 현직 재판관이 다시 출마하였고, 말레이시아 후보는 현직 재판관 대신 그 동생(고등법원장)이 교체 출마하였는데, 내 짐작으로는 후자의 경우 형제간에 배턴터치를 하려고 한 것이 그리 좋은 평판을 받지 못한 것 같았다. 결국 지역 배분을 중요시하는 유엔 무대에서 아시아 출신 후보가 많지 않았던 것이 결정적으로 유리하게 작용해서 운 좋게 당선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당선의 의의
    2001년 3월 15일 외교부는 보도자료를 통해서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


    “……(전략) 권 판사의 당선은 지난 시기 식민 지배와 전란 속에서 반인도적 범죄와 전쟁범죄의 희생자가 되어야 했던 우리나라가 이제는 구유고지역에서 전쟁범죄 및 반인도적 범죄를 범한 자를 기소, 처벌하는 재판소에 진출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가 있다고 본다. 권오곤 판사의 이번 구 유고 국제형사재판소 진출은 현재 설립 준비 중인 ICC에 향후 우리나라 인사가 진출할 수 있도록 촉진하는 좋은 밑거름이 될 것으로 기대되며, 아울러 우리나라 국제법 분야의 발전과 국제사회에서 우리나라의 위상 정립에 크게 이바지할 것으로 전망된다.”


    권오곤 전 재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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