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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오곤 회고록] 제4화 : 가보지 않은 길, 헤이그 향발(向發)

    권오곤 전 재판관 입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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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4화 : 가보지 않은 길, 헤이그 향발(向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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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임원택 교수님
    국제재판관에 지원한 배경: 가보지 않은 길
    어떤 연유로 국제재판관으로 진출할 마음을 가지게 되었느냐는 질문을 가끔 받는다. 사실 미리부터 국제재판관이 되기를 희망하거나 계획, 준비한 적은 전혀 없다. 정말로 우연한 기회에 그 계기가 다가왔고, 가보지 않은 길을 선택하게 된 것일 뿐이다. 실로 사람이 살다 보면 이런저런 계기가 오기 마련이고, 그런 기회에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인생의 줄기가 결정되곤 한다. 선택은 많은 갈래 중에 하나를 택하는 것이었지만, 선택하지 않은 다른 것들을 아예 버리는 것은 아니라고 믿었다. 버리되 버리지 않는 것. 대학 은사였던 고 임원택 교수께서는 '진리는 전체다(Das Wahre ist das Ganze)'라고 했던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인용하며, 이를 사상(捨象)이라고 표현하셨다. 가장 '국내적'인 직종이라고 할 수 있는 대한민국의 법관을 선택하여 그 직에 종사하고 있었어도, 국제 무대를 향한 꿈이 마음속 어딘가에 간직되어 있었고, 어느 날 그 꿈이 실현될 계기가 불현듯 찾아왔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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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게 이준 열사 기념관 기행문을 이메일로 보내준 이동근 판사(사진 왼쪽, 현재 변호사)는 서울지법 민사항소2부 시절 우배석 판사였다. 필자 오른쪽으로 한애라 예비판사(현재 성균관대 교수), 엄상필 판사(현재 서울고법부장판사)

     

     

    외교관의 조언
    초임 판사 시절 청와대로 불려가 정무1 산하의 법률비서관이 이끄는 ‘법제연구반’이라는 조직에서 파견근무를 했었다(당시 법원조직법은 법관의 외부 기관 파견을 허용하고 있었다). 당시 옆방에는 같은 정무1 산하의 외교비서관실이 있어서 그 직원들과 가까이 교류하며 지냈다. 하루는 이장춘 외교비서관(후일 오스트리아 대사 역임)과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같이했는데, 이 비서관이 식사 중에 느닷없이 “권 판사는 장래의 꿈이 뭐요?”라고 물었다. 내가 머뭇거리는 사이에, 이 비서관은 자문자답하는 식으로 “대법관?”이라고 다시 한번 묻더니, 한국의 대법관도 좋지만 세계의 대법관이 될 꿈을 가져보라고 하면서 국제사법재판소(ICJ)의 재판관 이야기를 하였다.

    당시 법조 경력이 2년 남짓한 새까만 초임판사 입장에서 대법관은커녕 지법 부장판사 자리도 감히 상상하기 어려운 처지에서 이 비서관의 코멘트는, 나로서는 현실감이 없는 엉뚱한 소리였다. 그렇지만 나로서는 '그런 세상도 있구나!' 하는 경이로운 인상을 받았고, 그때 품게 된 ICJ에 관한 동경이 내 마음 한구석에 깊이 남아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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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 사진] 이준열사 일행 사진. 아래 왼쪽은 그들과의 인터뷰를 1면에 실은 만국평화회의보. 아래 오른쪽은 이준 열사 일행이 묵었던 드용(De Jong) 호텔(지금의 이준 열사 기념관) 
    [오른쪽 사진] 이동근 판사가 이메일에서 언급한 만국평화회의보 편집장 William Stead. 그는 친구였던 Andrew Carnegie를 설득하여 평화궁을 짓기 위한 150만불을 기증하게 한 공로로, 평화궁 복도에 그 흉상이 들어서 있다.

     


    이준 열사 서사의 감동 - 배석 판사의 헤이그 여행기
    대구고등법원 부장판사로 근무하던 중인 2000년 12월 12일이었다. 내가 서울지방법원에서 부장판사로 근무할 때 우배석 판사였던 이동근 판사(연수원 22기, 현 변호사)가 독일 프라이부르그 대학 유학 중이었는데, 이메일로 장문의 기행문을 보내왔다.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는 이준 열사 기념관에 다녀온 이야기였다.

    이 판사는 위 기행문에서, 대한제국에서 평리원(고등검찰청) 검사로 근무하던 이준 열사가 1907년 고종의 밀명을 받고, 만주 용정에 있었던 이상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었던 이위종을 만나 두 달여 만에 네덜란드에 도착한 사실, 이준 열사 일행이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호소하기 위하여 만국평화회의(World Peace Conference)에 참석하려 하였으나, 바로 그 을사늑약을 근거로 한 일본의 방해로 참석하지 못했는데, 만국평화회의보의 편집인이던 영국 출신의 기자협회장이 이준 열사 일행을 인터뷰한 기사를 1면 머리기사로 발간한 사실, 만국평화회의에서는 평화적 분쟁해결을 위하여 상설중재재판소(Permanent Court of Arbitration)를 설립하기로 했는데, 위 편집인이 친구인 카네기(Andrew Carnegie)를 설득, 150만 불을 기증하게 해서, 그 자금으로 평화궁(Peace Palace)을 건축한 사실 등을 자세히 적었다.

    이 판사는 이준 열사 기념관 관장인 ‘할머니’의 마지막 코멘트도 전했다. 옛날에 만국평화회의에 한국인이 들어가지 못했던 것처럼, 오늘날 평화궁에도 한국인이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인데, 그 말인즉슨 평화궁에 들어가 있는 국제사법재판소(ICJ)에는 중국 재판관과 일본 재판관이 늘 참여하고 있으나, 한국 재판관은 아직 없다는 것이었다.

    이동근 판사의 기행문을 통해서 전해 들은 이준 열사 일행의 서사는 내게 큰 감동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이준 열사가 법조인이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특히 마지막에 평화궁에 있는 ICJ에 아직 한국 판사가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내 마음속에 숨어 있던 국제재판소에 대한 꿈을 흔들어 깨웠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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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CJ가 있는 평화궁(Peace Palace) 전경

     


    기묘한 타이밍
    바로 그 이틀 뒤인 2000년 12월 14일이었다. 석 달 후인 2001년 3월에 있을 ICTY 재판관 선거에 입후보하는 데 관심이 있는 법관이 있는지 묻는 대법원의 회람지를 받았다. 안내문 마지막에는 'ICTY 재판관에 대한 대우는 ICJ 재판관에 대한 대우와 동일하게 한다'는 ICTY 규정(Statute)을 인용하고 있었다.

    'ICJ 재판관과 동일한 대우? 한번 해 볼 만한 것 아닌가?'

    그런 마음이 솟았다. 이동근 판사의 기행문이 준 감동이 일종의 애국심과 함께 남아 있던 중이었다. ‘국제사회’를 대표해서 인류에 대한 범죄를 재판한다는 것이 의미 있어 보였고, 한국 법조인이 아직 열지 못했던 국제재판소의 문을 두드려 본다는 것은 해 볼 만한 도전 같았다. 1주일 여 고민하다가 지원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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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CJ에 아직 한국 재판관이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평화궁 1층 로비에는 한국 정부가 기증한 해치상(작가 최진호)이 들어섰다. 2014년 12월에 있었던 기증식 후 헤이그에서 근무하는 한국인 법률가들과 함께 찍은 사진. 가장 오른쪽은 이동근 판사가 ‘할머니’라고 부른 이준 기념관의 송창주 관장.

     


    변호사 개업의 회피?
    판사로 22년간 근무했었다. 그 당시 경제적인 이유로 변호사 개업을 생각했었다. 2000년 7월 고법부장 승진 발령을 받고 난 후에 선배 한 분, 후배 두 분과 함께 네 명이 ‘도원결의’를 맺으면서, 내가 대구에서 고법부장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올 무렵에 개업하자는 구체적 ‘거사’ 계획까지 세웠다.

    그런 중에 위 회람지를 받은 것이었다. 지원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서, 세 분과의 약속이 마음에 걸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자꾸 국제재판관에 도전해 보고 싶은 쪽으로 마음이 쏠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나도 모르게 마음 한구석에서 변호사 개업을 회피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현실적으로는, 당시 내가 국제재판관 선거에 나가 당선되리라고는 전혀 예상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일단 출마했다가 낙선하게 되면, 나 스스로도 변호사 개업의 명분이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 ‘거사’가 성사되었더라면 상당한 파괴력을 가질 조합이었다. 나중에 그 ‘선배 한 분’은 대법관까지 역임했고, ‘후배 두 분’은 핵심적인 법원 경력을 거친 후 변호사로서 혁혁한 활동을 하고 있다. 그렇게 모두들 잘 지내고 계시지만, 세 분께는 내가 약속을 깬 것에 대해 평생 죄송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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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무가 울창한 바세나(Wassenaar) 출퇴근 길. 가장 오른쪽부터 인도, 자전거 도로, 자동차 길, 말(馬) 길

     


    부임(赴任) 준비와 네덜란드 헤이그 향발
    선거 후 뉴욕에서 돌아와 대구고등법원에 복귀해서 재판을 계속했다. 다행히 2001년 6월 1일 자로 사법연수원 연구법관으로 발령을 받았다. 서초동 사무실에서 관련 자료를 읽으며 부임 준비를 했다.

    받아 놓은 날짜는 빨리 오기 마련이다. 대법원장님을 비롯한 여러 어른, 선배, 지인 등에게 두루 인사를 드렸다. 그중 한 선배에게 출국 인사를 하던 때였다. 선배가 ICTY에서는 재판을 어떻게 하느냐, 재판관은 얼마나 바쁘냐 등의 질문을 했다. 그래서 나는 재판을 거의 매일 제법 바쁘게 하는 것 같다는 취지로 답변했다. 그랬더니 그는 "그래도 외교관 같은 걸 거야"라고 덧붙이는 것이었다. 그가 말하는 '외교관 같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국제형사재판은 우리나라에서 그만큼 먼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었다.

    출국에 앞서 판사 신분을 어떻게 하여야 할지 법원행정처 인사실과 상의를 했다. ICTY 재판관 임기가 4년이어서, 그 임기를 마친 후에는 귀국하게 될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에, 나는 판사직을 휴직하고 다녀오기를 희망했다.

    ICTY의 재판관들 중에는 대법관 또는 헌법재판소 재판관직을 휴직하고 오는 경우가 있었다. 하지만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그와 같은 휴직을 허용하는 명문 규정이 없어서, 결국 '일신상의 사정'으로 사임하고자 한다는 사직서를 제출하고, 2001년 11월 9일 네덜란드 헤이그를 향해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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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네에 있는 De Pauw(공작)라는 이름의 공원. 바세나 시청이 이 공원 안에 있다. 호수 안의 조각은 렘브란트의 '목욕하는 여인'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이러한 초록의 공원이 나와 가족에게 많은 위안을 주었다

     


    네덜란드 정착
    집은 헤이그 근교의 바세나(Wassenaar)에 얻었다. 막내가 다닐 학교가 가까웠고, 재판소도 자동차로 15분 정도 걸리는 위치였다. 울창한 나무들이 많아서, 출퇴근할 때나 산보할 때, 맑은 공기와 푸른 공원에 생기가 돋는 느낌을 받았다.

    외국에 살아본 경험은 1984년부터 1985년까지 1년간 미국 하버드 법대에 유학했던 시절이 유일했다. 내 경험으로는, 유럽 사회가 전통이 강하고, 안정되었으며, 변화가 더디기 때문인지, 미국에 비해서 유럽에 새로 들어가 정착하는 것이 더 어려운 것 같았다.

    인터넷은 신청 후 한 달 반 만에야 연결됐는데, 주위에서 빨리 연결됐다고 축하해 줬다. 주문했던 TV 배달이 늦어 2002년 2월 2일 오후 2시(당시 네덜란드에서는 이를 '02.02.02.02'라고 표현했다)에 있었던 현 국왕인 알렉산더(Willem-Alexander) 왕세자와 막시마(Maxima)의 결혼식 중계방송은 가족들을 데리고 동네 식당에 가서 봐야 했다.

    네덜란드에서 매수한 차량의 인도에는 석 달이 걸려서, 한국에서 부친 현대차가 도착할 때까지 두 달간은 차량 없이 지내야 했다. 그런데 그동안에는 네덜란드 경찰에서 밀로셰비치 사건 담당 재판관들에게 경호와 차량을 제공해주어서 내 출퇴근에는 문제가 없었다(두 달이 지난 후 보안상 문제가 없다는 결론에 따라 경호와 차량 제공이 그쳤다). 그 두 달 동안 아내는, 몸집이 어마어마하게 큰 경호원 둘이 아침저녁마다 나를 양옆에서 데리고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보고 무서웠다고 한다. 여하튼 차량이 없던 아내는 12살짜리 아들을 데리고 매일 아침마다 어둡고 비 오는 화란의 겨울 날씨 속에 배낭을 메고 30분 정도 걸리는 동네 마트까지 걸어서 하루치 양식의 쇼핑을 다녀야 했다. 그 당시만 해도 시내 중심가를 빼고는, 가게는 주말에는 열지 않고, 주중에는 저녁 6시에 문을 닫으며, 월요일엔 오후 1시부터 열었다. 신용카드를 받지 않는 가게가 많았고, 수기(手記) 영수증을 써주는 데가 거의 전부였다. 주위에 도와줄 한국 사람이 많지 않은 상황에서, 네덜란드에 정착하기는 아내의 표현을 빌자면 "맨땅에 헤딩하기" 같았다.


    권오곤 전 재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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