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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오곤 회고록] 제5화 : ICTY 재판관 취임

    권오곤 전 재판관 입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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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5화: ICTY 재판관 취임

     

    첫 출근
    임기 개시일인 2001년 11월 17일이 토요일이라 11월 19일에 첫 출근을 했다. ICTY 건물은 헤이그 시내 중심가에서 조금 벗어난 스헤이브닝언(Scheveningen) 바닷가 쪽에 있었다. 동그란 인공 호수 뒤로 보이는 ICTY 건물은 가슴을 설레게 했다.

    재판소 전 구역은 두꺼운 철책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경비가 삼엄했다. 건물의 유리창은 모두 강화유리로 되어 있었고 창문도 열 수 없었는데, 오직 한 사람의 사무실만은 예외였다. 당시 소추관이던 델 폰테(Carla Del Ponte)는 창문을 열 수 있게 해주지 않으면 창문을 망치로 깨 버리겠다고 ‘협박’을 했다. 결국 사무국에서 굴복하고 창문을 조금 열 수 있게 수리를 해줬다(내가 직접 들은 말이다). 재판관들에겐 그런 배짱(gut)까지는 없었다.

    국제형사재판소는 하나의 재판소 내에 ‘세 기관이 정립(鼎立)하고 있는(tripartite)’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재판부(Chambers)와 소추부(Office of the Prosecutor)가 한 재판소에 속해 있고, 사무국(Registry)이 독립된 이 두 기관을 동시에 보조한다. 그래서 ICTY 건물 내에는 재판부 구역, 검찰 구역, 그리고 사무국이 포함된 공동 구역이 구분되어 있다. 검사나 변호인이 재판부 구역 안에 들어오려면 안내를 받아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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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CTY 건물

     

    취임 선서식
    첫 사흘은 오리엔테이션 등으로 지나고 취임 선서식은 11월 22일에 열렸다. 제1법정에 재판관 전원, 소추부 및 사무국 간부, ICTY 변호사회 임원 등이 모두 법복을 입고 참석한 가운데 재판소장의 진행에 따라, 2001년 선거에서 처음으로 당선된 여섯 명의 재판관들이 한 명씩 선서(Solemn Declaration)를 한 다음, 선서문에 재판관 본인과 유엔 사무총장을 대리한 ICTY 사무총장(Registrar)이 서명을 하는 행사였다. ICTY 규정(Statute) 제14조는 재판관은 임무를 개시하기에 앞서 “명예롭고, 성실하며, 공정하고, 양심적으로(honourably, faithfully, impartially and conscientiously)” 재판관 임무를 수행하고 권한을 행사할 것을 엄숙히 선서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외교사절을 포함한 초청 내빈들은 방청석에서 취임 선서식을 관람했다. 나는 아내와 아들, 김용규 주 네덜란드 한국 대사와 이준 열사 기념관 송창주 관장 내외를 초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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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임 재판관 6명의 취임 선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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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취임 선서 장면. 긴장된 탓으로 법복의 칼라밴드(collar bands, 속칭 '턱받이-bib'이라고도 부른다)를 제대로 매지 못한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제3기 재판부(Chambers) 구성
    다음 날인 11월 23일에는 재판관 전원회의(Plenary)가 열렸다. 차기 재판소장과 부소장 선출을 위한 것이었다. 재판소장은 재판관 전원회의에서 호선(다수결)으로 선출한다. 재판소장과 부소장의 임기는 2년으로 1회 연임할 수 있었다. 재판소의 초대 소장은 이탈리아 출신의 카세세(Antonio Cassese) 재판관(1993-1997), 제2대 소장은 미국의 맥도날드(Gabrielle Kirk McDonald) 재판관(1997-1999), 제3대 소장은 1999년부터 2001년 당시까지 2년째 근무하고 있던 프랑스 출신의 죠르다(Claude Jorda) 재판관이었다. 죠르다 소장이 재선을 위해 출마했는데, 유일한 후보였으므로 이의 없이 박수(acclamation)로 선출됐다. 부소장은 러닝메이트 형식으로 선출하는 관례에 따라, 죠르다 소장이 지명한 가이아나 출신의 샤하부딘(Mohamed Shahabuddeen) 재판관이 역시 박수로 선출됐다.

      

    죠르다 소장은 재판관 전원회의가 끝난 후 재판부의 구성을 발표했다. 재판부의 구성과 사건 배정은 재판소장의 권한이었다. 그 당시 ICTY의 상임 재판관(permanent judge)은 모두 16명이었다. 2001년 3월에 있었던 재판관 선거에서는 14명을 선출하였지만, ICTY가 탄자니아 아루샤(Arusha)에 있는 르완다 국제형사재판소(ICTR)의 항소심 사건도 관할하고 있는 관계로 이를 담당하기 위하여 두 명의 ICTR 재판관이 ICTY에 합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16명 중 ICTR에서 파견된 두 명을 포함한 일곱 명의 재판관이 항소부(Appeals Chamber)를 구성하고 나머지 아홉 명이 세 명씩 3개의 1심재판부(Trial Chamber)를 구성한다. ICTY는 2심제여서 항소심이 최종심이다. 신임 재판관 6명 중 미국 출신의 메론(Theodor Meron) 재판관만이 항소부로 배정되고 나를 포함해서 나머지 5명은 모두 1심재판부로 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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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년도 선거에 따라 새로 구성된 재판관들. 재판소장은 Claude Jorda(프랑스)였다. 1열 좌우에 검은 법복을 입고 있는 이들은 사무총장(Registrar)과 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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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이후 재판관 전원의 단체사진은 두 번 더 찍었다. Fausto Pocar 재판소장(이태리) 시절인 2006년 1월에 찍은 사진. 검은 법복을 입고 있는 이들은 Carla Del Ponte 소추관(Prosecutor)과 부소추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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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atrick Robinson 재판소장(자메이카) 시절(그때는 내가 부소장이었다)인 2010년 12월에 찍은 사진. 검은 법복을 입고 있는 이들은 사무총장과 부총장. 위 세 장의 사진에서 내가 뒷줄에서부터, 가운데 줄, 그리고 앞줄 가운데로 차차 이동한 ‘서열 변동’이 눈에 띈다.

     

    베이비 재판관(Baby Judge)
    ICTY 재판관들은 최연소 재판관을 baby judge라는 애칭으로 불렀는데 기존의 상임 재판관 중에서는 1950년생인 중국 외교관 출신의 류다츈(Liu Daqun, 劉大君) 재판관이 baby judge였다. 그는 1953년생인 내가 부임하자 내 덕분에 baby judge를 면하게 되었다고 좋아했다. Baby judge는 그 자체가 약간 부정적인 어감도 있었지만 현실적인 불이익도 받았다. 그 당시 1주일씩 돌아가는 재판관들의 당직(duty judge) 기간은 서열에 따라 희망 순으로 배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열이 낮은 baby judge는 늘 휴가 기간에 당직 근무를 하여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다. 이러한 불합리 때문에 나중에는 첫 당직자를 제비뽑기로 정한 후 그 이후부터는 알파벳 순으로 돌아가도록 변경됐다. 나의 baby judge 타이틀은 2006년 7월에 1958년생인 캐나다 출신의 프로스트(Kimberly Prost) 임시 재판관이 취임함으로써 면하게 되었다.

     

    “명예롭고, 성실하며, 공정하고, 양심적으로”
    2001년 11월 22일 신임 재판관 취임 선서
    신임 재판관 4명과 함께 1심 재판부로 배정
    사라예보 등 방문… 발칸국가 사법제도 이해
    전범 처리 위한 특별재판부 필요성 설명 듣기도

     

    임시 재판관(Ad Litem Judges)
    ICTY 사건의 조속한 마무리를 위한 ‘종료계획(completion strategy)’에 따라 유엔 안보리는 2001년 11월 30일 결의에 의하여 임시 재판관(ad litem Judge)들을 추가로 선출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른 첫 임시 재판관 선거는 2001년 6월에 있었고 여기에서 25명의 임시 재판관을 선출했다. 이들 25명의 풀(pool) 중에서 유엔 사무총장이 재판소장의 추천에 따라 한때에 최다 아홉 명까지 범위 내의 임시 재판관을 임명했다. 임시 재판관들은 한 건의 1심 재판을 끝내면 임기를 마치고 돌아가는 것이 보통이었으나 예외적으로 두 건 이상을 맡게 된 경우도 있다. 임시 재판관은 재판상으로는 상임 재판관과 동일한 권한을 가지지만 ICTY 규정 자체에 의해서도 재판소장 선거권, 피선거권, 규칙 개정 등과 관련한 재판관 전원회의에서 투표권이 없는 등의 차별이 있었다. 그 이외에도 이런저런 면에서 임시 재판관에게 상임 재판관과 대등한 대우를 해주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내가 재판소 부소장으로 근무하던 2008년 12월경에는 사무국에서 새로 부임한 임시 재판관들에게 사무실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창문이 없는 지하층의 사무실을 제공하려고 해서, 내가 나서서 지상층에 있던 사무국 직원들을 지하층으로 내려보내고 임시 재판관들에게 그 사무실을 제공하게 한 적도 있었다.



    일본 출신의 임시 재판관
    내가 도착한 2001년 11월에는 죠르다 재판소장이 2001년 9월에 이미 임시 재판관 6명을 불러들여서 이들이 재판소에 근무 중이었다. 그들 중에 일본 출신의 타야 (Chikako Taya, 多谷 千香子) 재판관이 있었다.

    그녀에 의하면 일본은 원래 ICTY 재판관 후보를 내는 것에 전혀 관심이 없었는데, 한국에서 후보를 내서 내가2001년 3월의 선거에서 당선이 되는 것을 보고 크게 놀랐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 이후에 있었던 임시 재판관 선거에 후보를 내기로 결정하고 그 입후보 마감일의 연장 신청까지 하면서 부랴부랴 후보를 찾았다고 한다. 결국 당시 일본 대검찰청 총무부장으로 근무하고 있던 자신에게 출마를 권유하는 바람에 자신이 ICTY에 오게 되었다고 하면서 반농담조로 나에게 고맙다고 했다. 그러고 보면 나의 국제재판관 당선이 일본 법조인의 국제재판관 진출에도 기여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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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간 비행기가 악천후로 사라예보에서 착륙하지 못하고 자그레브로 회항한 후, 간신히 얻어 탄 유엔 수송기. 러시아 파일럿이 조종하는 비행기는 낡고 털털거렸다. 캄캄한 밤에 타게 된 흰 비행기가 영화 카사블랑카의 마지막 장면을 연상시킨다고 농담을 했다. 사진 오른쪽부터 Guney, 필자, May, Orie 재판관. 그 왼쪽으로는 수행 연구관 (Jérȏme de Hemptinne)과 통역(Marijana Nikolić). 사진의 월 표시(09)는 11월의 오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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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리엔테이션 여행
    재판관 전원회의 바로 다음 날인 11월 24일부터 28일까지 4박 5일간 크로아티아의 자그레브(Zagreb)와 보스니아의 사라예보(Sarajevo)를 방문했다. 밀로셰비치 사건의 재판장을 맡고 있던 메이(Richard May) 재판관(영국)이 단장이 되었고, 오리(Alphons Orie) 재판관(네덜란드), ICTR 소속인 귀네(Mehmet Guney) 재판관(터키)과 내가 참여했다. 오리 재판관은 그가 네덜란드 대법관으로 임명되기 전에 ICTY의 첫 사건이었던 타디치(Duško Tadić) 사건의 변호인으로 보스니아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재판관으로 방문하게 되니 감회가 깊다고 했다.

    재판소에서 마련한 이 여행의 목적은 신임 재판관들에게 발칸 국가들의 상황과 사법제도를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한편 ICTY의 아웃리치(outreach) 프로그램에 대한 현지의 협조를 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양국에서 모두 정부 고위 관계자와 법조인들, 국제기구 관계자들을 만났다. 사라예보에서는 데이턴 협정(Dayton Accords)의 이행을 책임진 최고대표 사무실(Office of the High Representative) 관계자를 만나 현지에서의 전범 처리를 위한 특별 재판부의 필요성에 관해서 설명을 듣기도 했다(이러한 특별재판부는 나중에 실제로 설치되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당시 보스니아 상황이 아직 불안한 상태여서 엄청난 경호를 받은 것이었다. 우리 일행의 차량이 열 대를 넘고 고속도로에서는 역주행까지 했으며, 우리가 숙박하는 호텔을 추운 겨울날에 유엔군 부대가 밤새 호위했다. 그리고 자그레브에서 사라예보로 이동할 때 민간 비행기가 사라예보 공항까지 갔는데 일기 악화로 착륙하지 못하고 자그레브 공항으로 회항해서 그날 밤 유엔 수송기를 간신히 얻어 타고 사라예보에 갔던 것도 기억에 남는다.


    권오곤 전 재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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