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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법부 창립 60주년] 사법부의 연혁·발자취

    1948년 7월17일 '사법권 독립' 명문화… 3차례 사법파동 겪어

    류인하 기자 acha@lawtimes.co.kr 입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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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법부가 창립 60주년을 맞았다. 지난 60년은 사법부가 국민의 기본권 수호를 위해 지켜야 하는 사법권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의 과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한민국 사법부의 시작은 1948년 7월17일 사법권의 독립을 명문화한 헌법이 공포되면서 비로소 시작됐다. 그해 8월5일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이 임명되고 11월1일 대법관 5명이 최초로 선출되면서 지금의 대법원 모습이 비로소 갖춰졌다.


    (▲사진설명 :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이 1957년 대법원장으로서의 마지막 임기를 마치고 70세로 정년퇴임을 하면서 대법원 구청사 강당에서 퇴임식을 갖고 여러 참석자들에게 마지막 인사말을 전하고 있다.)

    ◇ 혼란의 시대= 그러나 헌법공포 이후에도 좌우의 이념대립이 끊이지 않아 초창기 우리 법원은 혼란의 시대를 겪어야 했다. 1948년 12월 국가보안법이 공포됐고, 1년 후인 1949년 11월18일, 대구법원청사가 불에 타 건물 안에 있던 재판기록과 수사기록 대부분이 소실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범인은 남로당 소속 당원으로 북측의 지령을 받고 방화를 저지른 것으로 드러났다. 범인은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 해 법원조직법이 공포됐지만 1년도 채 못 돼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법관과 직원들이 납북되고 전쟁으로 인해 전국 법원청사 중 절반에 이르는 건물을 신축, 보수해야 했다. 1945년까지 집계된 건물 신축·보수비용은 약 2억7,000만환에 달했다. 법관피해도 컸다. 1951년도에 서울지방법원 판사 40명 중 19명이 납치된 것을 비롯, 1954년까지 파악된 피해 판사 수는 피살 8명, 피랍 35명에 이르렀다.

    ◇ 군정체제하의 법원= 60~70년대 군사정권시절 사법부는 그야말로 암흑기였다. 1961년 5월16일 쿠데타에 성공한 박정희 전 대통령은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군사혁명위원회를 구성하면서 대법원감독관을 임명했다. 이어 6월5일 헌법의 효력을 제한하는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을 공포해 대법관직이 폐지됐다. 대신 국가재건최고회의가 법원행정의 대강을 지시·통제하게 됐다. 그 결과 대법관들은 퇴임을 해야만 했다. 비상계엄이 경비계엄으로 전환된 후에도 ‘경비계엄하의 군사재판에 관한 특별조치령’에 따라 군법회의가 계속됐고, 일반 국민에 대해 심판권한을 행사했다. 그러나 1963년 12월17일 개정 헌법이 시행되면서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이 드디어 효력을 상실했다. 개정 헌법은 법관추천회의를 신설해 대법원판사 외의 법관은 대법원장이 임명하도록 했다. 또 법률의 위헌여부에 대한 판단도 대법원이 최종적으로 심사하도록 했다. 63년과 70년 두 차례에 걸친 법원조직법 개정으로 오늘날 사법부의 모습이 갖춰지기 시작했다. 대법원장 외에 12인의 대법원판사를 두고 대법원판사 3인 이상으로 구성된 부에서 심판하는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또 대법원에 재판연구원을 두도록 하고 고등법원의 상고사건 재판 및 특별상고제도를 폐지했다. 또 71년 대법원에 처음으로 사법연수원이 만들어져 법조인력 양성제도의 큰 변화를 맞이했다.

    ◇ 잇따른 사법파동= 1971년 7월28일 새벽 당시 서울지검 공안부 검사가 서울형사지법 이범열 부장판사, 최공웅 판사, 이남영 서기 등 3명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이 부장판사, 최 판사가 반공법위반 항소사건을 심리하면서 피고인의 변호인으로부터 제주도 항공료, 숙박비, 술값 등 9만7,000원 상당의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였다. 서울형사지방 법관들은 그날 오후 비상대책회의를 갖고 이 사건은 법원 개인에 대한 비위수사가 아닌 최근 검찰이 기소한 사건에 대해 법원이 무죄판결을 한 것에 대한 보복이자 공정한 재판에 대한 침해라는데 공감하고 서울형사지법 판사 37명이 사표를 제출한 것을 비롯 전국에서 판사 150여명이 사표를 냈다. 이후 정부의 사법부 탄압을 비난하는 여론이 거세지자 박정희 대통령은 신직수 법무부장관을 불러 판사들에 대한 수사중지 지시를 내리고 검찰관계자를 인사조치했다. 파동은 한 달 동안 진정되지 않다가 8월27일 민복기 대법원장이 판사들과 대화를 갖고 ‘급변하는 국내외 정세를 감안하여 지금까지 사법부를 지지하고 신뢰해 준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는 의미에서 사표를 철회해 달라’고 호소하자 비로소 법관들이 사표를 철회해 사태가 겨우 마무리됐다.

    1988년 2월에는 소장판사 335명의 서명이 담긴 ‘새로운 대법원 구성에 즈음한 우리들의 견해’라는 성명서가 발표됐다. 일명 ‘사법부쇄신 요구사건’으로 불리는 2차 사법파동이다. 이 사건의 주된 이유는 노태우 정부가 5공화국 당시 활동했던 사법부 수뇌부를 재임명했기 때문이었다. 전국 200여명의 판사들은 ‘새로운 대법원 구성에 즈음한 우리의 견해’라는 성명서에 서명하고 김용철 대법원장의 사퇴를 요구하며 정보부 기관원의 법원상주 폐지, 법관의 청와대 파견중지, 유신헌법철폐 등을 요구했다. 결국 김용철 대법원장이 퇴진하며 2차 사법파동이 마무리됐다. 이어 정기승 대법원판사에 대한 대법원장 임명동의안이 국회에서 부결되는 헌정사상 초유의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제3차 사법파동은 그로부터 5년 뒤인 1993년 6월 발생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단독 판사 28명은 ‘법원장회의에서 논의된 제도개혁안은 사법부 개혁의 일부이고 시작일 뿐이며, 사법부의 자기반성 없이는 진정한 개혁이 이뤄질 수 없다’는 내용의 ‘사법부 개혁에 관한 건의문’을 발표했다. 3차 사법파동은 변호사단체, 사법연수생까지 합류하면서 더욱 확산되다가 재산문제로 여론으로부터 사퇴압력을 받아오던 김덕주 대법원장이 퇴진하면서 일단락 됐다.



    ◇ 서초동시대 열려= 1989년 6월30일 서초동 서울법원 종합청사가 완공됐다. 그로부터 7년 뒤인 1995년 10월21일 대법원도 서소문의 구청사에서 지금의 서초동 신청사로 이전했다. 서초동 법조타운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후 사법부는 국민에게 가까이 가는 법원을 만들기 위한 노력에 앞장섰다. 법원행정처는 98년 10월부터 대법원 인터넷 홈페이지에 ‘종합법률정보’ 검색 시스템을 만들어 누구나 쉽게 인터넷을 통해 판례·법령·문헌자료 등을 검색할 수 있도록 했다. 또 2002년부터 전국 부동산등기를 전산화해 법원을 직접 찾지 않더라도 발급기를 통해 손쉽게 등기부등본을 출력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변호하기 위한 국선전담변호사 제도가 2005년 3월부터 전면 시행에 들어갔다.

    또한 서울가정법원에서는 협의이혼 숙려제도 및 이혼전 상담제도를 실시해 이혼율을 낮추기 위한 노력에 앞장섰고 2007년 5월2일 대법원은 국민이 신뢰할 수 있는 공정하고 객관적인 양형을 만들기 위해 양형위원회를 출범시켰다. 이어 대법원은 올해부터 국민참여재판제도와 가족관계등록제도를 도입·시행하기 시작했다. 우선 비교적 중형이 예상되는 살인·성폭력 등의 범죄사건 재판에 배심원들이 직접 참여해 유·무죄를 판단하고 법관에게 형량을 권고하도록 함으로써 사법부의 투명성을 높이고 국민의 신뢰를 받는 법원을 만들어 나갈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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