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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조라운지] 낙향하는 이홍훈 前 대법관

    "그는 고뇌했고 가족은 힘들었지만 국민은 행복했다"

    정수정 기자 suall@lawtimes.co.kr 입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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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판사는 법치주의와 민주주의 확립, 국민의 기본권 보장, 사법정의 실현 등 막중한 역할을 한다. 사명감과 소명의식이 없으면 감당하기 힘들어 성직(聖職)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 때문에 판사의 외길을 걸어 정년을 채우는 일은 쉽지 않다.
    그래서 법률신문 법조라운지 6월호는 지난 31일 정년퇴임한 이홍훈 대법관을 조명했다. 그는 탁월한 재판능력과 인자한 성품으로 후배법관들의 사표(師表)가 돼 왔다. 유달리 개인의 기본권에 관심이 많아 판결은 진보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를 아는 한 인사는 "그는 고뇌했고, 가족들은 힘들었다. 그렇지만 국민들은 행복했다"고 말했다. 수도승처럼 판사를 하다 재야로 떠나는 이 대법관을 만나 그의 인생 이야기를 들었다.

    판사 이홍훈.

    그는 유년 시절 고향 전북 고창에 있는 서당에서 수학(修學)했다. 2년여 동안 서당을 오가며 천자문 등 한학을 배웠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대쪽처럼 곧고 호랑이처럼 엄한 조선시대 선비와도 같았던 훈장님의 가르침은 평생동안 그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철학이나 명상에 관심을 가진 것도 이 때부터였다. 학창시절에는 불교학개론이나 성경책, 파스칼의 명상록 등 종교나 철학 서적을 두루 섭렵했다. 가톨릭 신자지만 어머니의 영향으로 불교적 마인드도 강하다. 하루는 그가 우스갯소리로 부인한테 "당신 안 만났으면 출가했을 것 같다"라고 했더니, 부인이 냉큼 그말에 동의를 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서울에 올라와 경기고를 다닐 때 그는 이과를 선택했다. 우주물리학이나 원자력공학에 관심이 많았고 수학도 꽤나 잘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스티븐 호킹 박사의 책들을 옆에 두고 읽는다. 하지만 그가 정작 대학에 진학하면서 선택한 전공은 법학이었다. "이공계로 진학해 학문적인 욕심을 부리면 외국유학을 가야 하는데, 집안사정이 넉넉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는 꿈을 접는 대신 새로운 꿈을 품었다. "법관이 돼서 법을 통해 사회와 시대에 기여하는 역할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하길 잘했어요. 해보니까 법관이 천직이더라고요." 인생의 가장 중요한 터닝 포인터였던 그때를 회상하며 그는 소리없이 웃었다.

    서울대 법대 시절 그는 고등학교 동기인 손학규 민주당 대표, 김근태 민주당 상임고문, 故 조영래 변호사와 절친하게 지냈다. 5.16 쿠데타로 군사정부가 들어서고 유신헌법 제정을 앞둔 암울한 시기였던 만큼 사회문제를 놓고 토론하고 뜻을 함께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이들이 정치에 입문하거나 인권운동을 한 것과 달리 이 대법관은 현실정치에 뛰어들지 않았다. "친구들이 정치활동으로 민주화를 이루고자 했다면 나는 판결로 민주화를 실현하고자 노력했습니다." 그가 판사의 길을 택한 이유다. 마침내 그는 77년 11월 7일 영등포지원 판사로 임관하면서 소망하던 판사의 꿈을 이뤘다.

    하지만 판사가 되고 나서도 현실은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83년께 서울형사지법 근무 시절엔 절친인 김근태 상임고문을 재판할뻔 한 일도 있었다. 그 무렵은 김 고문이 여러 차례 구속돼 옥고를 치르기 시작한 때였다. "그 때는 주말 즉결심판은 판사들이 돌아가면서 했어요. 제가 즉결심판 당번을 맡은 날 김 고문 사건이 들어왔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도저히 재판을 못하겠더라고요. 그래서 지원장님의 허락을 구해 다른 판사님께 부탁을 했어요. 정말 고통스러웠던 순간이었습니다."

    그는 이 무렵 판결에 소신을 담기가 힘들어 천직이던 판사를 그만둘 생각을 했다. "시대상황이 많이 어려워 다들 (사직을) 심각하게 고민했었는데, 주변 선배들이 '길게 보자'는 이야기를 하시더라고요. 역사가 바뀔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판사 노릇을 계속 했습니다."

    "역사가 바뀌었냐?"는 물음에, 그는 "바르고 정의로운 사회로 가고 있다"고 단호하게 답했다. "민주화 과정을 거치고 경제발전도 이뤄지면서 사법부의 독립이 현저하게 좋아져 후배 판사들이 좋은 환경에서 재판을 할 수 있게 됐습니다. 무엇보다 국민들이 제대로 된 재판을 받을 수 있게 돼 마음으로 눈물을 흘릴 만큼 고맙고 감사합니다"라고 소회를 밝혔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공교롭게도 그가 금산지원 근무를 마치고 서울형사지법으로 올라와 사직을 고민했던 그때도 개업지를 제한하는 변호사법이 시행됐다는 점이다. 20여년 가까이 지나 이 대법관 퇴임을 앞둔 지난달 17일 '전관예우금지법'으로 불리는 개정변호사법이 또다시 시행됐다. 이 법은 판·검사출신 등 전관변호사는 퇴직하기 1년 전부터 퇴직한 때까지 자신이 근무한 근무지사건을 수임할 수 없게 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이 대법관이야말로 '전관예우금지법'의 가장 큰 희생양이라는 말이 나왔다.

    "그제나 지금이나 전관예우 금지대상이 된 것은 어떻게 보면 하늘의 뜻이 아닌가 싶습니다. 세상살이야 알 수 없는 거니까 좋게 받아들이면 제가 피해자가 아니라 큰 틀에서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죠. 제가 조금 참아서 법조 주변이나 사법부에 더 큰 힘이 된다면 이익을 얻는 거니까 꼭 경제적 가치로만 이익과 피해를 가릴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는 동년배 판사들과는 달리 유달리 국민의 기본권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이 때문에 그의 판결은 진보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적표현물 제작배포의 처벌과 관련한 국가보안법조항은 국가의 존립과 안전을 위태롭게 하거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위해를 줄 명백한 위험이 있을 경우에만 적용해야 한다며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한 판결, 무급휴직원을 내고 출산을 했더라도 근로기준법상 출산휴가 2개월간의 임금을 지급해야 한다면서 근로자의 기본권을 보호한 판결, 공익을 위해 언론사에 내부비리를 폭로한 공무원을 국가가 해임한 것은 부당하다고 한 판결 등이 대표적이다.

    그는 대법관이 되고 나서도 종종 진보적인 판결을 내놓았다. 이 대법관은 자신의 판결 가운데 기억에 남는 사건으로 지난 3월 근로자들의 파업을 당연히 업무방해죄로 봐 처벌해서는 안 된다는 대법원 전원합의체판결을 꼽았다. 이 판결은 근로자들의 파업이 언제나 업무방해죄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사용자의 자유의사가 제압될 수 있다고 보여지는 경우에 한해 업무방해죄가 성립된다는 취지로 단순파업도 당연히 업무방해죄에 해당한다고 봐오던 기존의 대법원판례를 변경한 것이다. 또 배심원단이 일치된 의견으로 무죄평결을 한 경우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배심원단의 의견을 존중해야 한다는 판결도 그의 기억속에 남아있다. 이 판결은 국민참여재판의 정착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런 판결성향을 두고 세간에서는 진보라고 평가하지만, 정작 그는 자신의 판결성향을 중도라고 말했다. "진보와 보수는 상대적인 개념이죠. 1 더하기 1은 2라고 하지만 찰흙 두개를 합치면 하나가 되듯 경우에 따라서는 1 더하기 1은 1이 될 수도 있어요. 저를 보고 진보라고 하는 얘기는 소수,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판결이 더러 나가서 그런것 같아요. 진보, 보수를 나누는 게 옳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점에서 진보적이라고 하는 것은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특히 환경법 분야에 정통한 이 대법관은 올해 '4대강사건'에서 그의 35년여 판사생활을 관통하는 철학을 반대의견에 담았다. "헌법이 법치주의를 국가의 질서 내지 구조적 원리로서 헌법상 기본원리로 삼고 있는 만큼, 국민의 자유·정의·평등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법의 지배 내지 법우선의 원칙에 따라 모든 국가작용은 법에 따라야 함은 물론이고, 국가가 그 법을 집행함에 있어서는 합법성, 법적 안정성과 함께 정당성 및 합목적성을 갖추어야만 비로소 실질적인 법치주의를 실현할 수 있다고 할 것이다.(중략) 환경문제가 포함된 이 사건을 처리함에 있어서는 현재의 잘못된 정책으로 인하여 이 사건 사업지역 인근에 거주하거나 한강을 상수원으로 삼는 재항고인들뿐만이 아닌 미래의 세대인 우리들 자손의 중요한 삶의 터전이 될 환경이 오염되거나 훼손되지 아니하도록 각별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 대법관은 퇴임을 앞둔 지난달 20일 광주고법에서 근무하는 후배법관들에게 강연하면서도 "다수의 이익에 부합하더라도 개인에게 인내하기 어려운 고통을 강요하고 그 고통이 소수의 개인을 비참한 존재로 전락시킨다면 그러한 행위는 허용될 수 없다"고 말했다. 또 "법관은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인과 사회에 대한 관심과 배려와 사랑을 가지고 인간의 본성과 삶의 가치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과 통찰을 함으로써 인권침해행위를 분별해내고 막아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이 대법관은 원래 퇴임하면 3개월 가량 쉰 다음 일흔이 될 때까지 4~5년 가량 변호사로 활동할 계획이었다. 변호사개업을 염두에 뒀던 건 가족들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다. 그의 살림살이가 나아진 고등부장판사 시절 이전에는 부인이 친청에 손을 벌리는 일도 종종 있었다고 했다. "아내에게서 '당신이 집안일에 신경을 못써줘 아이들(4남매) 인생이 잘 풀리지 않는다'는 얘기를 들으면 반성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이 대법관은 퇴임을 앞두고 여러 대형로펌에서 러브콜을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전관예우금지법 시행으로 계획이 수정됐다.

    그는 퇴임하면 우선 어머니 봉양을 하겠노라고 했다. 이 대법관의 모친은 척추를 다쳐 거동을 거의 못하고 병석에 누워 계시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어머니께 밥숟갈도 떠드리면서 그동안 병 수발을 도맡아 해온 아내의 수고를 좀 덜어주고 싶습니다." 그런 다음 고향인 고창으로 내려가 5~6개월 쉬면서 오랫동안 경작하지 않고 버려뒀던 밭도 개간해 농사도 짓고 기회가 되면 여기저기 강연도 다닐 예정이라고 했다.

    변호사생활도 마치고 완전히 은퇴하면 명상록을 집필하고 싶다고 했다. 철학과 명상에 대한 책을 읽으면서 명상을 시작한 지 벌써 20년을 훌쩍 넘겼다. "명상을 시작했는데 처음 10년 동안은 잡념만 생기고 진전이 없었어요. 그런데 20년이 지나니까 명상을 하면 마음에 와 닿는 게 있어요. 마음의 평정을 찾을 수 있다고 할까요. 욕심을 부린다면 20년 뒤에는 명상록을 내보고 싶은 마음도 있어요. 사람이 진정으로 가식없이 깨달은 것을 글로 정리해보고 싶습니다." 이제 후반기 인생을 막 시작하는 자연인 이홍훈의 또다른 목표다.

    글=정성윤·정수정 기자 / 사진=임정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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