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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조라운지] 준법지원인제도 도입 김현 前 서울변회장

    "준법지원인제 실시 5년 후면 기업 분위기 획기적 변화 확신"

    권용태 기자 kwonyt@lawtimes.co.kr 입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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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3월 11일 오후 의사당로 1번지 국회 본회의장. 이날 본회의에는 준법지원인제도가 포함된 상법 개정안이 상정됐다. 표결 결과는 놀라웠다. 재석의원 216명 중 216명이 찬성했다. 당시 법사위에서도 수많은 쟁점이 뒤섞인 법안인데도 만장일치로 통과된 것은 이례적이라는 말이 나왔다.

    변호사들도 깜짝 놀랐다. 강력한 영향력이 있는 재계가 저토록 반대하는데 가능하겠느냐는 비관론이 주류였기 때문이다.

    내부의 비관론을 무릅쓰고 준법지원인제도를 이끌어 낸 사람이 있다. 김현 전 서울변회장이다
    .  

     좌절

    "… 또 떨어졌다."

    1982년 제24회 사법시험 합격자가 발표되던 날. 김현(55·사법연수원 제17기) 법무법인 세창 대표변호사는 또 한번 낙방의 고배를 마셨다. 벌써 세번째다. 1980년 행정고시부터 시작해 이듬해 행정고시, 그리고 82년 사법시험까지 연이은 낙방이다. 1,2차 필기시험은 문제가 안됐다. 모두 3차 면접시험 탈락이다. 서울대 법대 재학시절 시국시위에 나섰다 정학처분을 받은 경력이 두고두고 발목을 잡았다.

    "절망적이었습니다. 실력이 아닌 과거의 전력이 문제되니 어찌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힘들었지요. 함께 낙방한 친구들 중에는 자살을 선택한 친구들도 있었으니까요. 저 역시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아 멍한 나날만 보냈습니다."

    기회

    "더 이상 도전은 의미없다. 결과는 이미 결정돼 있다." 김현 변호사에게는 절망의 벽이었다. 벽에 부딪쳐 쓰러져 있던 김현 변호사를 일으켜 세운 이는 현재 뉴욕 국제형사재판소 재판관으로 있는 송상현 교수다. 서울대 법대 대학원에서 국제해상법을 강의하던 송 교수는 눈여겨봤던 제자 김현의 실패를 지켜보다 해외유학을 권유했다.

    하지만 시국시위 전력이 또 다시 그의 발목을 잡았다. 유학을 결심하고 국비유학생 선발시험을 치렀지만 어김없이 떨어졌다. 낙담에 빠진 김 대표의 눈에 띈 것은 '한국고등교육재단'의 해외장학생 선발 공고. 마지막 기회였다. "10명 선발하는데 200명 이상 응시했었습니다. 경쟁이 치열했지요. 결국 기회를 잡았습니다. 당시만 해도 해외유학을 지원하는 법대생은 드물었고 꾸준히 키워온 영어실력이 도움이 됐습니다." 송 교수의 추천으로 입학한 미국 코넬대 로스쿨. 김현 대표는 "코넬대 입학은 사법시험 합격과 판사의 평범한 삶을 생각했던 나에게 신선한 충격이자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고 회상했다.

    - 해상법에 매력을 느꼈나 봅니다.

    "전혀 새로운 분야였습니다. 송 교수께서 코넬대의 첫 번째 한국유학생이자 미국 해상법 박사 1호였지요. 제가 두번째입니다. 미개척 분야였던데다 일반적인 민·형사사건을 넘어 세계각국에서 벌어지는 해상 사고를 처리한다는 것이 매력이었습니다."

    - 박사학위는 워싱턴 대학에서 받으셨네요.

    "그때 코넬대에서는 박사과정이 없었어요. 어쩔 수 없이 워싱턴대학으로 가 1년 6개월 동안 박사과정을 수료했습니다. 이후 박사논문 준비에 2년이 걸렸으니 미국으로 간지 5년 만에 박사학위를 받은 거지요"

    - 그럼 1983년 제25회 사법시험 합격은 어떻게 된건가요.

    "포기하고 있었는데 송 교수님께서 '3차 시험을 보라'고 권유하셨습니다. 당신이 직접 쓰신 '제자 김현을 합격시켜 주면 꼭 법학자의 길로 이끌겠다'는 내용의 탄원서를 들고 당시 군부실세인 허화평 등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설득 작업을 벌이신 겁니다. 제 삶의 은인이신 거지요. 저는 3차 면접시험에 합격한 뒤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 송 교수님과 공동집필 하시는 '해상법 원론'도 그런 인연인가요.

    "박사학위 취득하고 1991년 귀국한 뒤 송 교수님께서 같이 책을 내보자 제안하셨습니다. 영광이었지요. 마음의 빚을 갚을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2년간 집필작업을 거쳐 나온것이 해상법 원론입니다. 지금은 4판까지 냈습니다. 스승과 제자들이 세대를 이어가며 학문적 성과를 책으로 엮어내는 것은 국내에서는 드문 일입니다. 이 책을 통해 송 교수님의 해상법 학맥을 후세대에 이어가는 것이 제 평생의 과업입니다."

    변호사 김현

    미국에서 돌아온 김현 변호사는 잠시 법무법인 우방종합에 몸담으면서 해상법 전문 신입 변호사 시절을 지냈다. 그러다 1992년 4월 지금의 법무법인 세창을 설립했다. 국내에선 드문 미국해상법 박사인데다 김 변호사 특유의 적극성에 힘입어 세창은 이후 10년간 놀라운 성공가도를 달렸다.

    - 법무법인을 설립하기엔 너무 젊지 않았나요.

    "욕심이 있었습니다. 유학시절 시애틀의 로펌 보글앤게이츠(Bogle&Gates)에 몇 달간 인턴생활을 했는데 그때 로펌의 운영과 업무에 완전히 매료됐습니다. 의뢰인을 위한 혼신의 노력, 전문가들의 열띤 토론, 그리고 멋있는 휴식. 이런 문화를 직접 한번 만들고 싶은 욕심이 생긴 겁니다."

    - 실제로 법무법인을 운영해보니 어땠습니까.

    "설립을 위해 1억원을 대출하고 달마다 100만원씩 이자를 냈습니다. 힘들었어요. 하지만 재미도 있었습니다. 해상법의 특성상 아침에 부산으로 비행기 타고 날아가 일을 보고 저녁에 서울로 올라와 서류작업을 하는 일이 반복됐습니다."

    - 시장진입도 쉽지 않았을 텐데요.

    "당시 김앤장법률사무소가 국내 해상법 분야 강자였습니다. 하지만 시장을 분석해보니 국내회사들을 대리해 소송을 거는 원고시장이 비어 있더군요. 틈새를 발견한거죠. 원고시장을 타깃으로 잡고 정성을 다했습니다. 서서히 세창의 이름이 알려지고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사태로 의뢰인들이 하나 둘 도산하기 전까지 매년 1명씩 변호사를 늘리는 지속적인 발전을 계속했습니다. IMF 이후엔 반대로 세창의 소문을 들은 외국의뢰인들이 꾸준히 늘었습니다. 이제는 저를 포함해 변호사 19명으로 구성된 대표적인 부띠끄(작지만 강하고 전문성이 있다는 뜻)로펌이 된 거지요"

    서울변회장 김현

    변호사의 삶에 주력하던 김 변호사는 2005년 대한변협 북한인권소위원회 위원장을 맡으면서 또 한번 전환점을 맞는다. 당시 이국제 대한변협 이사의 권유로 변협회무에 발을 디딘 것이 2007년 대한변협 사무총장을 거쳐 2009년 서울변회장으로까지 이어졌다. 특히 서울변회장 시절은 김 변호사에게 준법지원인 제도 도입이라는 커다란 업적을 안겨준 시기이기도 했다.

    - 법안추진에 어려움이 많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준법지원인은 가장 중요한 공약이었습니다. 2월 임기 시작 후 그해 8월에 법안을 발의했으니 정말 바쁘게 움직였습니다. 경제계의 반대가 가장 힘들었습니다. 문전박대는 아니더라도 면전에서 '밥그릇 이기주의'라는 비아냥까지 들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열쇠는 국회가 쥐고 있지요. 취임하자마자 국회의원 299명을 모두 만나 제도를 설명했습니다. 설득이 안 되면 두 번 세 번 찾아다녔습니다. 그렇게 이끌어 낸 국회의원들의 공감이 제도 도입에 큰 힘이 됐습니다."

    - 준법지원인의 가치를 평가절하하는 분들이 아직도 있나요.

    "점점 그 가치를 인정받을 것입니다.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5년만 지나 보세요. 준법지원인 덕분에 기업의 분위기가 획기적으로 변화 할 것입니다. 상법이 요구하는 최소한의 기준만 갖추는 소극적 준법경영에서 기업의 발전을 위해 연구하는 적극적 준법경영으로 패러다임이 변화하는 겁니다. 법조계와 재계가 경제발전에 협력하는 최선의 모델이 나오는 겁니다. 기회만 된다면 제가 직접 준법지원인으로 나서 그 모델을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 반면 대한변협과의 갈등은 피할 수 없었습니까.

    "제가 부덕한 탓이지요.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후회는 않습니다. 변협은 인권과 공익, 직역수호를 생각하고 지방변회는 회원들에 밀착해 그들의 업무와 복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상징적으로 협회가 상위기관이지만 그렇다고 지방회에 군림하려 하면 안됩니다. 서울변회와 대한변협의 이사들을 합치면 무려 40여명의 인력풀이 만들어 집니다. 서울변회와 대한변협이 더욱 협력해 법조계의 과제들을 해결해 나가기를 기대합니다."

    인터뷰 말미에 던진 '지금의 김현 변호사를 만든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는 망설임 없이 "실패"라고 대답했다. 고등고시 낙방과 중학교와 대학진학에 실패한 것 까지 포함하면 모두 그는 모두 6차례나 쓴 실패를 경험했다. "그런 실패가 없었다면 법조인이 되지 못했거나 됐더라도 평범한 판사가 됐겠지요. 해상법 전문변호사나 변호사 사회의 오피니언 리더 역할을 다하는 기회는 없었을 겁니다"

    김 변호사는 변호사 사회를 위해 아직은 할 일이 있을 것 같다고 했다. "과거의 변호사들은 1907년 한성변회가 만들어지면서 애국투사들을 무료변론하고 독재시대에는 변협회장을 중심으로 소금의 목소리를 내왔기에 존경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8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변호사들이 생업에만 매달리다 보니 그 소금의 역할을 잊어 버렸지요. 그 짠맛을 되찾아 제3의 존경받는 변호사 시대를 여는데 일조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글=권용태 기자, 사진=좌영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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