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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조라운지] 한국 로펌 1세대 설립자 김인섭 '태평양' 명예대표

    촉망받던 천재 판사 80년 신군부 득세에 회의… 홀연히 법원 떠나 로펌 창업
    "나는 참 받은 것이 많은 사람… 이제는 세상에 진 빚 갚을 차례"

    송득범 desk@lawtimes.co.kr 입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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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변호사와 법무법인(로펌)은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이 아니라 의뢰인을 보호하는 사명을 공유하는 집단이라고 설파하는 한국 1세대 로펌 설립자. 전도유망한 부장판사였던 그는 1980년 전두환 신군부가 득세하자 판사의 역할에 회의를 느껴 로펌 설립자로 변신했다. 그는 로펌이라는 말조차 생소했던 시절 태평양을 설립해 국내 로펌의 씨를 뿌리고 길을 닦았다. 태평양은 곧 국내 최고 로펌에 올랐다. 그는 2002년 65세가 되자 약속한 대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요즘에는 법치주의를 확립하기 위한 사회운동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남들이 가지 않은 힘든 길을 앞장서 가면서도 성찰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태평양이 설립 초기부터 공익 활동에 힘쓴 것은 법률가의 사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공익 활동을 체계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2009년 태평양이 설립한 재단법인 동천은 그의 호에서 따온 것이다. 그는 지금도 자신이 우리 사회에 빚을 많이 지고 있는 '빚꾸러기'임을 자처한다. 지난달 20일 늦은 오후 서울 강남구 역삼동 사무실에서 김인섭(76·고시 14회) 태평양 명예 대표변호사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저는 빚꾸러기입니다."

    김인섭 태평양 명예대표는 1977년 부장판사로 승진한 후 관용차를 배정받고 묘한 느낌이 들었다. 세상에 빚을 지고 있다는 기분이었다. 그때 깨달았던 내용은 2008년 법률신문에 기고한 '못난 빚꾸러기와 나쁜 빚꾸러기'에 정리해 놓았다. 사회에서 많은 혜택을 받고도 잘못을 저질렀을 때 사과할 줄 모르는 사회지도층을 '나쁜 빚꾸러기'에 비유해 꼬집는 내용이었다. "사회에 기여한 것과 사회에서 받은 혜택을 대차대조표로 환산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균형 있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고, 받은 것이 많은 사람, 준 것이 많은 사람도 있을 텐데 나는 참 받은 것이 많은 사람이었어요. 이것을 다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제가 법치주의 확립 운동을 하는 것과 근현대사에 관한 책을 쓰고 있는 것도 모두 제가 진 빚을 하나씩 갚기 위해서입니다."

    어린 시절 소문 난 수재… 초등 5학년 때 중학으로
    고교 2년에 대학 진학 도전… 학교장이 한때 반대
    가정교사하며 高試 준비… 2차시험 한차례 고배도


    김 대표는 어린 시절 수재로 소문났다. 6살 때 서당에서 천자문을 두 달 만에 독파했고 초등학교 5학년 때 명문 대전중학교에 응시해 합격했다. 6·25 후 추풍령중학교에 편입해 졸업한 뒤 영동고에 진학해 2학년 때 그를 눈여겨본 선생님들의 권유로 고려대에 합격했다. 그러나 정작 교장 선생님은 3학년을 마치지 않아 졸업증명서를 내줄 수 없다고 했다. 그는 비를 맞으며 교장 선생님을 집 앞에서 기다린 끝에 졸업증명서를 받았다. "그때 교장선생님께서는 제가 재기가 넘쳐 망가질 것을 염려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 전까지 남한테 지는 법 없이 달려만 왔던 제가 멈췄던 계기였습니다. 다행히 등록 마지막 날 졸업증명서를 내주셨지요."

    그는 대학에 입학해 곧바로 군에 들어가 복무를 마친 뒤 가정교사를 하며 사법시험을 준비했다. 민복기 대법원장 딸의 가정교사로 민 원장과는 친아버지 같은 인연을 맺었다. 4학년이던 61년 7월 13회 고등고시 사법과 2차 시험에서 과락으로 고배를 마셨다. 재학 중 합격을 목표로 했던 계획에 차질이 생기나 했는데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서 법무장교를 많이 필요로 하면서 그해 12월 제14회 고등고시 사법과가 갑작스럽게 치러졌다. 김 대표는 고려대에서 민법을 가르쳤던 당시 주재황 서울지방법원 수석부장판사가 졸업을 미루고 한학기 더 공부하라며 등록금까지 내줘 시험을 치르고 합격할 수 있었다.

    판사 시절 그는 직언을 하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법원행정처장직을 대법관 중 한 명이 겸임하도록 하는 데 일조했다. 당시에는 행정부처 출신이 법원행정처장을 맡고 있었는데, 공사 수주에 개입했다는 얘기와 재판부에 압력성 청탁을 넣는다는 소문이 돌아 판사들의 원성이 높았다. 고법 판사였던 그는 민 대법원장을 찾아가 행정처장의 교체를 건의했다. "법원행정처장은 재판하는 사람이 아니고 법원 살림을 하는 사람이니 행정을 아는 사람이 맡아야 한다는 대답이 돌아왔죠. 그렇다면 지금부터라도 행정을 잘 아는 판사들을 길러 내면 된다고 말씀드렸어요. 행정 경험을 하게 해서 자질이 증명된 사람이 하면 된다고 건의했죠" 김 대표의 직언 이후 당시 법원행정처장은 명예퇴직을 하게 됐고, 대신 당시 서일교 변호사가 임용됐다. 1981년 김용철 대법관 이후로는 대법관이 법원행정처장직을 겸임하고 있다.

    '민비연' 관련 학생들 무죄선고 뒤 판사직 물러나
    80년대 급속한 산업화 보며 법률자문 수요 예감
    '로펌'이라는 단어 생소한 시절 국제적 로펌 구상


    그는 김중태, 이종률, 박범진 등 '민족주의 비교연구회(민비연)' 학생들에게 무죄 판결을 내린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1960년대 중반 서울대 문리대 학생동아리 '민비연'의 핵심 회원들이 불온 사상의 영향을 받아 학생 데모를 배후 조종하고 정부 타도를 기도했다며 간첩 혐의를 씌운 사건이다. 당시 중앙정보부 직원들은 그를 경호한다는 명목으로 집 앞까지 찾아와 재판을 앞두고 회유와 협박을 일삼았다. 그는 결국 1980년 전두환 신군부 시절 판사직에 회의를 느껴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판사로서 엘리트 코스를 밟고 있어 대법관이 될 것이라고 점쳐지던 그가 그만두겠다고 하자 모든 사람이 말렸지만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당시 법원행정처장이 국회에 출석해 그의 사직 이유를 국회의원들에게 설명해야 했던 것은 유명한 일화다.



    김 대표는 로펌이라는 단어가 생소한 1980년에 한국의 실정에 맞는 국제 로펌을 구상했다. 산업화가 급속도로 이뤄지고 국제화가 진행되면서 경제 산업 분야 고객들에게 법률자문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했다. 지적재산권 분야에 관한 관심도 컸다. "사회가 변화하는 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지는데 법률가들이 앞서 나가지는 못할망정 뒤처져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죠. 법원에 있으면서도 지적재산권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1976년에 특별소송실무연구회를 조직했어요. 김용철 대법관이 1대 회장을 맡고 그 뒤로 이회창 전 대법관이 이어받고 비교적 큰 규모로 성장했죠."

    법무법인을 설립하면서 사내에서 이름을 공모했다. 당선자는 김 대표였다. "자크 아탈리가 지은 '21세기의 승자'라는 책이 있습니다. 21세기에는 미국과 라틴아메리카가 중심이 될 것이라는 내용이지요. 우리나라와 아메리카 사이에 있는 태평양이 떠올랐고 우리 로펌이 태평양을 향해 뻗어 나가야 한다는 소망으로 이름을 제안했지요. 제가 낸 이름이 당선했지만, 설립자여서 상금은 못 탔습니다."

    '태평양' 성장 비결은 인재 영입… 三顧草廬도 불사
     약속대로 65세에 일선 퇴진… 공인법인 '동천' 설립
    "성숙하고 책임 있는 사회 구현에 기여하고 싶어"


    그는 태평양의 성장 비결을 우수한 인재 영입에서 찾았다. 인재들이 모여들게 된 데는 태평양의 가치관이 스며있다고 했다. 초창기 태평양은 기성 법률가들을 모집해 규모를 키우는 대신 가치관을 공유할 수 있는 연수원 졸업생들을 영입해 내실을 다졌다. 성장기에는 인재들이 스스로 찾아왔다. "저는 인덕이 많은 사람입니다. 태평양이 더 크기 위해 인재가 필요하던 순간에 인재들이 제 발로 태평양을 찾아왔어요. 옛 재경부나 상공부 인재가 필요하다고 생각을 하면 그들이 제 발로 찾아와 일할 수 없겠느냐고 했어요. 검사 출신 변호사를 영입할 때도 마찬가지였죠. 되돌아보면 신기하기도 했고 인덕이 정말 많다고 느끼기도 했어요." 태평양은 인재 채용에서 능력을 최우선으로 삼았다. 지인들에게 야속하다는 소리도 많이 들었다. "황폐한 산야에 나무를 심는 심정이 태평양의 설립 동기다. 자기 당대에 영화나 발복을 위해 50대에 나무를 심는 사람은 없다. 내가 심은 나무를 잘 가꿔 아름답고 울창한 숲을 만드는 것은 여러분이 담당해야 할 과제다. 이런 과업을 수행할 자신 있는 능력자만 오라." 반대로 우수한 인재를 채용하기 위해 삼고초려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설립 당시 65세가 되면 경영에서 물러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2002년 법무법인 태평양 창립 22주년 행사에서 대표 자리에서 물러났다. "저는 처음부터 돈을 벌기 위해 태평양을 설립한 것이 아니었어요. 자식들에게 재산을 물려줘야겠다는 생각도 없었어요. 후세를 위해 나무를 심는다는 심정으로 로펌의 씨를 뿌렸고 로펌이 독자적인 비전과 생명력을 갖고 영원히 존속해 나가며 사회 발전에 이바지하기를 바랐죠. 약속했던 그 때가 온 것이었지요." 그는 경영에서 물러난 뒤 '굿 소사이어티 운동'이라는 법치주의 확립 운동가로 새로운 활동을 펼치고 있다.

    요즘에는 한국 근현대사에 관한 책을 저술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는 책을 통해 반대자를 설득하고 포용할 수 있는 성숙하고 책임 있는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하고 싶다고 했다. "대통령선거가 끝나고 내년 초에 출간할 예정입니다. 윈스턴 처칠은 과거와 현재의 싸움을 방치하면 미래를 잃어버린다고 했습니다. 한국의 장래를 위해 근현대사에 관한 내용을 올바로 알릴 필요가 크다고 생각해요. 근현대사의 격랑에서 어떻게 나라가 망했는지, 어떻게 다시 성공적으로 일어섰는지, 그리고 지금 심각한 사회갈등이 생긴 원인이 무엇인지를 밝혀서 성숙한 사회로 나가는 데 도움을 주고 싶어요."

    <글=송득범 기자, 사진=백성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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