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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조라운지] 사상 첫 直選에서 '기염' 위철환 대한변협회장

    교사 생활하며 야간法大… 주경야독으로 司試 꿈 이뤄

    박지연 기자 desk@lawtimes.co.kr 입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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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천에서 용이 났다는 말은 위철환(55·사법연수원 18기) 제47대 대한변호사협회장에게 아주 잘 어울린다. 그는 어렵고 힘든 환경 속에서 전형적인 비주류의 삶을 살면서도 언제나 도약을 향한 의지를 놓지 않았다. 남해와 인접한 장흥에 산 시골 소년인 그는 중학교 때까지 바다를 본 적이 없다. 높은 산에 올라 큰 꿈을 품었던 그는 서울에 올라와 신문배달을 하며 냉대를 받고도 넘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시련을 통해 그는 각오를 공고히 해 야간 고교와 서울교대에 진학했고 아이들을 가르치며 주경야독해 법대에 편입, 사법시험에도 합격했다. 그는 와신상담(臥薪嘗膽) 끝에 변호사의 꿈을 이룬 뒤에도 도전을 멈추지 않고 경기중앙지방변호사회장을 거쳐 직선으로 대한변협 협회장에 당선했다. 이제 새롭게 출발선에 선 위 협회장을 그의 집무실에서 만났다.



    그는 전남 장흥에서 나고 자랐다. 옛날 양반마을의 모습을 간직해 지금은 문화재로 지정된 그의 고향 장평면까지 가려면 광주에서 버스를 타고 꼬박 3시간이 걸렸다. 동네 어르신들은 대부분 농사를 지었고 어린 시절 그도 나무를 하러 다니곤 했다. 중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바다를 본 적이 없는 그는 가까이에 있는 산과 친했다.

    "높은 산을 좋아했어요. 거기서 아래로 조그맣게 내려다보이는 마을을 보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어릴 적에는 지리를 좋아했어요." 위인전을 즐겨 읽던 그는 산에 올라 유명한 사람이 되겠노라고 다짐하곤 했다.

    그는 골목대장이었다. 서너살 많은 아이들과 겨뤄도 이겼다. 하루는 외갓집에 놀러갔다가 그 동네를 지나가다 얻어맞는 나그네를 구해주기도 했다. 손자가 싸움을 하고 다닌다며 소문이 나 외할머니를 곤란하게 한 적도 있다. 공부도 잘했다. 중학교 입학시험에서 1등을 한 그는 2학년 때 처음으로 2등으로 밀려나자 오기가 발동해 더 열심히 공부했다.

    그는 호남에서 최고의 명문으로 손꼽히는 광주제일고에 진학하는 것을 인생의 첫 목표로 삼았다. 한 학급에 70명씩 4학급뿐인 시골에서는 광주제일고 합격자가 20년에 한 번 나올까말까했다. 전교 1, 2등 하던 그는 광주제일고에 진학하는 것은 문제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도시 교육과 입시 정보를 접한 적이 없어 쓴 좌절을 맛봤다.

    "제가 풀 수조차 없는 영어, 수학문제들이 나왔더군요. 도시에서 수준 높은 교육을 받은 친구들과 경쟁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시골의 작은 면에서 두각을 나타내던 자신감으로 도전했는데 꿈이 산산조각 나는 듯한 큰 충격이었습니다."

    높은 산을 좋아하던 산골소년
    인생의 첫 목표는 '광주 명문고'
    입시서 낙방 후 혈혈단신 상경
    숙식해결 위해 신문배달 취업
    추위에 凍傷… 그 흔적 아직도


    광주에서는 그 해를 끝으로 고입 학력고사를 없앴다. 이듬해에는 원하지 않는 학교에 임의로 배정될 것이 분명했다. 인생의 첫 목표에서 좌절을 맛본 그는 '광주에서 공부를 했더라면…'하는 생각이 들어 시골이 싫어졌다. 그는 인생의 경험을 쌓겠다며 혈혈단신으로 상경했다. 처음에는 친척집에 머물렀지만 눈치가 보여 계속 있을 수가 없었다. 돈을 벌기 위해 숙식을 제공하는 한 신문사에 일자리를 구했다. 눈치밥은 면했지만 생전 처음 접하는 사회생활은 혹독하기 짝이 없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신문을 배달을 하고 250여 세대를 방문해 수금하고 구독을 권했습니다. 한 번에 돈을 다 받아오기는 어렵기 때문에 여러 차례 방문을 해야 했지요."

    먹는 것은 부실하고 잠자리는 불편했다. 먹을 것이 없어 지붕에 말려놓은 누룽지를 주워먹었다. 판자로 얼기설기 지은 숙소는 신문배달부 20여 명이 겨우 발을 뻗을 수 있을만큼 좁았다. 그저 잠시 눈만 붙이고 나올 뿐이었다. 겨울에는 귀와 손에 동상이 걸리기도 했다. 40여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귀에는 동상의 흔적이 있다.

    빈 손으로 시작한 서울생활은 낙이 없고 외로웠다. 희망이 없어서 일기를 쓰며 향수를 달랬다. 정의감이 남달랐던 그의 일기장에는 정치가 주제로 등장하는 날이 많았다. 당시 야당의 국회의원이었던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은 가택연금된 상태였다. 그는 민주화 운동을 논해 보겠다며 무턱대고 김 전 대통령의 동교동 집을 찾아갔다. 하지만 경비는 삼엄했고 동교동 쪽 사람을 만나기도 전에 마포경찰서에 끌려갔다.

    "가방에 지니고 다니던 일기장에는 '민주주의의 화신 YS와 DJ'라고 적혀 있었고, 사상범으로 몰려 정보과에 끌려갔습니다. 간첩은 아닌지 신원조회를 했고 친척들도 소환됐어요. 당시 할아버지가 민주당 위원장을 하셨고 지방 유지여서 신원은 확인됐죠. DJ측에서도 한 명이 나왔고 '아는 사람이냐'고 묻자 '전혀 모르는 사람이다'라고 대답해 훈방됐습니다."

    조사 과정에서 경찰은 그에게 직업이 뭐냐고 물었다. 그는 재수생이라고 대답했다. 어느 대학교를 쳤다가 떨어졌냐고 물어 대학이 아니라 고입 재수생이라고 답했다. 모멸을 담은 차가운 시선이 돌아왔다. 2년 동안 적(籍) 없이 생활한 것은 큰 고통이었다. 그는 야간고등학교에 진학하기로 결심했다. 신문배달을 하면서 따로 입학시험을 준비할 시간은 없었다. 중학교 때까지 공부를 잘했으니 한자로 나온 신문을 읽고 일기를 쓰며 일반사회와 논술 공부를 했다. 중동 야간고는 그해 미달이었다. 어렵게 합격한 것이 아님에도 그는 사법시험에 합격했을 때보다도 행복했다고 회상했다.

    "교복을 입고 모자를 쓰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습니다. 2년동안 사람들은 저를 경계하고 사람 취급을 해주지 않았지만 학생이라는 신분이 생기자 사람들에게 인정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해가 뜨면 신문배달을 하고 해가 지면 학교에 가서 공부를 했다. 집에 돌아가면 12시가 다 되었고 잠이 부족한 탓에 신문배달을 하다가 계단에서 잠이 들기도 했다. 야간고에는 비행청소년들이 많았다. 학생들이 사고만 안 치게 하는 게 교사들의 임무였다. 집안에 문제가 없는 아이들이 폭력 서클에 가입하는 것을 보며 교육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서울교대에 진학했다.

    교대를 졸업한 뒤 6년간 교편을 잡았다. 아이들을 가르치며 법대 편입준비를 했다. 당시 성대에 편입한 조재연 변호사가 22회 사법시험에 수석합격해 성대 야간법대의 편입경쟁률이 무척 셌다. 어렵게 법대에 편입했지만 그는 대학교에서도 '비주류'였다.

    "고시반 사람들은 아침부터 밤까지 공부를 하다가 수업을 듣는데 저는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밤에 학교에 나갔습니다" 앞자리에 앉아서 잠만 자다 가기를 반복하던 어느 날 수업이 다 끝나고 텅빈 교실에서 잠이 깬 그의 앞에는 쪽지가 있었다. 종이에는 '코 고는 소리가 너무 커서 수업 중에 모두 웃었다'고 적혀 있었다. 법대생들 사이에서는 코골이 학생으로 기억됐지만, 그는 졸업하는 해에 1차 시험에 붙고 이듬해에 당당히 2, 3차에도 합격했다.

    연수원 수료 후에는 비교적 순탄한 삶을 살았다. 청년변호사 시절 아무런 연고도 없이 친구를 따라 수원에서 개업해 25년을 보냈다. "예전에 수원에서 법조비리가 터졌을 때 '비리에 이름이 거론되지 않은 변호사는 별 볼일 없는 변호사'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제 이름은 나오지 않더군요. 그렇게 연고 없이 의뢰인이 찾아오면 밤을 새워 연구하고 성실히 재판에 임해 대다수의 변호사들처럼 오늘날까지 사무실을 유지했습니다. 말 그대로 '보통 변호사'로 지내왔습니다."

     2년 고생 끝에 야간고등 입학
     司試 합격한 때 보다 더 행복
     연고없는 수원서 변호사 개업
    '지방 출신'극복하고 首長으로
    "열심히 했다" 평가 받았으면


    평범한 지방변호사였던 그에게 변협회장 직선제는 '변협의 민주화'를 의미했다. "변호사들이 대부분 서울에 있어 지방 변호사들에게도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줘야 한다는 인식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간선제로 실시된 지난 변협선거까지 지방 변호사들은 회비만 내고 선거는 서울변호사들의 잔치가 됐죠. 자연스럽게 지방변호사들은 회무에 무관심해지고 회원들 간의 화합이 이뤄지지 않았어요. 부협회장으로서  변협의 민주화를 위해 열심히 힘썼습니다."

    그는 지난해까지 경기중앙회에서 4년동안 회장직을 맡았고 같은 시기 대한변협의 부협회장도 겸직했다. 그동안 위 협회장이 힘들게 일하는 모습을 지켜본 가족들은 선거 출마를 말렸다. "지방회 출신이라 당선하기 어려울 거라고 보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상처를 받을까봐 걱정했습니다. 하지만 가족들에게 보통변호사인 제가 왜 협회장 선거에 나가야 하는지를 차근차근 설명하자 적극적으로 돕고 응원해줬습니다."

    경기중앙회장으로서는 경기도와 업무협약을 체결하고 경기도청과 수원 역사에 부스를 마련하고 변호사를 파견해 가난한 서민들에게 무료법률상담을 실시하고 법률구조사업을 통해 저렴한 비용으로 소송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무한돌봄사업'을 추진했다.

    그는 지난달 25일 협회장직에 취임하기 전까지 줄곧 대중교통으로 출퇴근을 했다. 협회장에 당선한 뒤 기자와 전철에서 마주쳤던 일화를 떠올리며 "버스(Bus)·전철(Metro)·도보(Walk)로 다니니 BMW로 출퇴근한 셈"이라고 농담을 했다. "첫 직선제로 선출된 자리라 마음이 무겁습니다. 2년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니기도 합니다. 2년 뒤에 '협회장 잘 뽑았다, 열심히 했다'는 평가를 받는 것이 목표입니다."

    <글=박지연 기자·사진=백성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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