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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조라운지

    [법조라운지] 법조계의 신화가 된 동대문시장 점원

    법조계 '立志傳的 인물' 박영립 화우 대표변호사
    오나시스 꿈꾸던 시골 소년, 법조계 '검정고시 신화'로

    장혜진 core@lawtimes.co.kr 입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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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올해 초를 기준으로 국내 20대 로펌 대표변호사들의 46%는 판사 출신, 20%는 검사 출신이다. 81%는 서울대를 나왔다. 이 때문에 지난 2월 1일 법무법인 화우의 대표변호사로 취임한 박영립(60·사법연수원 13기) 변호사는 엘리트들이 주류를 이루는 법조계에서 비주류로 분류된다. 하지만 그는 법조계에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검정고시의 신화'로 불리우는 박 대표는 담양에서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무작정 상경해 시장 점원, 양복 기능공, 여관 심부름꾼, 공사장 인부 등 안 해본 일이 없다. 그러다 스물두살이 되던 해 가까스로 검정고시로 중·고교 과정을 마치고 숭실대 법경대를 수석합격했다. 그의 도전 정신은 주위의 '비아냥'을 무릅쓰고 응시한 사법시험에서 더욱 빛났다.
    박 대표는 변호사가 된 이후 서울지방변호사회 인권위원장과 대한변호사협회 인권이사, 한센병소록도보상청구소송 한국변호단장 등을 맡아 인권문제에 각별한 관심을 쏟았다. 우리 사회가 공생하기 위해서는 비주류에 대한 사회적인 냉대와 무관심을 극복해야 한다는 점을 일찍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동안 엘리트가 주도하던 법조계에도 신 법조시대를 맞아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시골에서 상경해 국내 굴지의 대형 로펌 대표가 된 그를 서울 삼성동 그의 집무실에서 만났다.




    박 대표는 6·25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53년 2월 전라남도 담양에서 태어났다. 연로하신 아버지와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중학교 진학은 일찌감치 포기했다. "당시에는 시골에서 중학교에 가는 사람이 많지도 않았고 굳이 부모님 말씀을 크게 거역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친구들이 교복을 차려입고 학교에 다니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담양은 대바구니로 유명하다. 그는 설 명절이 끝난 어느날 대바구니 장사를 하러 상경하는 사람들 틈에 끼어 광주에서 서울로 가는 비둘기호 열차에 올라탔다. 1967년 2월, 그가 15살이 되던 해였다. "도시에 나가면 왠지 길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머니에는 단돈 1000원밖에 없고 마땅한 연고도 없었지만 믿는 구석은 있었다. 서울에서 성공해 돈을 많이 벌고 있다는 친척 밑에서 심부름이라도 해보려는 요량이었다. 하지만 물어물어 도착한 청량리 시장, 친척 형님은 그 곳에서 시장 배달일을 하고 있었다. "그 분이 나를 보더니 당장 불호령을 내렸죠. '서울이 어떤 덴데, 얼마나 무서운 곳인데. 지금 당장 내려가거라'하고. 정말 막막했죠. 하지만 동네에서 '쟤가 바람이 잔뜩 들었다'는 얘기까지 듣고 올라왔는데, 그대로 쫓겨 돌아갈 수는 없었어요."

    돌아가지 않겠다고 버티는 그에게 친척은 숭남동의 어느 여관에 일자리를 소개시켜줬다. 그곳이 단지 '나그네들의 숙소'만은 아니라는 것과 '밤보다는 낮에 손님이 더 많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일을 시작한지 몇개월이나 지나서였다. "그곳이 당시 '양동'이라 불리우던 유명한 사창가라는 사실은 한참 뒤에서야 알았어요. 거기서 온갖 인간 군상들을 봤죠. 근처 남대문 시장에 새벽장을 보기 위해 지방에서 올라오는 상인들도 있었는데, 매번 저녁 늦게왔다가 새벽에 잠깐 눈을 붙이고 장을 본 뒤 곧바로 기차를 타고 내려가는 치열한 삶을 살고 있었어요."

    예전보다 횟수가 줄긴 했지만 그는 지금도 힘이 들거나 스스로가 나태해졌다고 느낄 때면 새벽시장에 가곤 한다.

    중학진학 포기한 후 15살에 무작정 서울로
    여관·식당·전전했지만 롤 모델은 오나시스
    동대문시장 점원 생활하며 검정고시 눈 떠


    어린시절, 선박왕 오나시스는 그의 롤모델이었다. "어느 잡지에서 오나시스의 일화를 읽었는데 그가 부두노동자였던 젊은 시절, 주급을 받아서는 고급 레스토랑에 가서 한끼 식사에 돈을 다 써버리더래요. '부자가 되려면 부자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보고 배워야 한다'면서. 주위에서는 '미쳤느냐'며 비웃었죠. 하지만 저는 '아, 이 사람도 어려운 과정을 거쳐 부호가 되고 재클린 케네디 같은 세계 최고의 여인을 부인으로 맞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이후부터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이 어떻게 하는지 보고 따라하기로 했죠. 양복점에 다닐때는 양복점 주인을, 동대문 시장에서는 시장 주인을 보면서요."

    음식점 종업원, 양복점 공원 등 안해본 것 없이 여러 군데를 돌아다녔다. 그러다 흘러들어간 곳이 동대문 시장 점원이었다. "시장에서 가게 주인아저씨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사람이 세무서 공무원이더라구요. 그 사람만 오면 다방 같은데 모시고 가서 접대하려고 하고. 그런데 우리 주인아저씨는 그걸 안 했어요. 어린 마음에 걱정이 돼 '옆집 아저씨는 잘 모시는데 아저씨는 왜 그렇게 안하세요?' 물었더니 주인 아저씨가 '나는 장부를 잘 정리하고 세금도 내니까 무서워 할 것 없어' 하더라구요."

    당시 가게 주인은 중국 텐진상고를 나와 아버지의 가게를 물려받은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도 경리공부를 해보기로 하고 신문 광고를 뒤지던 중 '단기 9개월 완성 검정고시' 광고를 우연히 발견했다. "보는 순간 '아, 이거다' 생각하고 집에 얘길했죠. 딱 9개월만 시간을 달라고." 그가 20살때였다. "'이제 공부해서 박사가 될래, 교수가 될래', '동생들이나 잘 시켜라'는 등 주위에서 반대가 많았죠. 그래도 늦기 전에 시작해야겠다 싶어서 주인 아저씨에게 얘길 했어요. 그분도 기가 막히죠. 아무 말씀도 안 하고 듣고 계시더니 1주일 정도 있다가 저한테 말씀하시더라구요. 진짜 공부를 하고 싶냐고." 그는 아침에 학원을 가고 오후부터 저녁까지 가게일을 하며 공부를 했다. 2년만에 중·고교 과정을 통과한 뒤 숭실대 법경대를 수석으로 입학했다.

    사법시험을 보게된 것은 정말 우연한 계기였다. "2학년을 앞두고 전공선택을 하기 위해 학과 소개 책자를 보는데 사법시험이라는게 있더라구요. 판사, 검사, 변호사도 된다는 거에요. 정말 깜짝 놀랐어요. 그런 시험이 있는지도 몰랐거든요. 갑자기 어릴 때 생각이 떠올랐죠. 동네에서 놀고 있는데 스님이 지나가는 거에요. 다짜고짜 쫓아가서 '대사님, 저는 커서 뭐가 되겠어요?' 하고 물었더니 '너 공부 잘하게 생겼다. 고등고시를 한번 봐라' 그러는 거에요. 저는 고등고시가 뭔지 전혀 모를 때이니까 듣고 잊어버렸죠. 그런데 사법시험이 예전에는 고등고시였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늦은 나이에 공부를 하고 이런 과정을 거친 게 모두 어떤 이유가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죠."

    사법시험을 보겠다고 하자 주위의 반대는 엄청났다. "검정고시 시작할 때도 반대가 많았는데 사법고시는 말할 것도 없죠. 어떤 사람들은 '야, 너 나이도 많은데 취업공부해서 취직 해야하는 것 아니냐'라고 말했어요. 그때는 취업 연령제한이 있었는데 졸업하는 다음해가 취업연령에 걸릴 때였어요."

    20살에 학원등록… 2년 만에 중등과정 통과
    숭실대학 법경대 입학하고 사법시험에 도전
    변협 인권이사 시절 한센병 배상소송 맡아


    '검정고시 출신에, 합격생도 거의 없는 비명문대에서 너무 꿈이 야무진 거 아니냐'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들도 많았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저는 사실 사법시험이 그렇게 어려운 시험인지 몰랐어요. 아마 알았으면 엄두를 못냈을 거에요. 하루에 10시간씩 3년하면 된다길래 '그래, 15시간씩 3년해보자'고 작심했죠. 저는 지금도 제가 남보다 같거나 좀 부족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남들보다 1.5배, 적어도 2배 정도는 일을 해주자고 생각하죠. 그러다보니 워커홀릭이랄까 그런 것도 좀 있어요."



    그는 대한변호사협회 인권이사 시절 맡은 소록도 한센병 보상청구소송으로도 유명하다. "일본 변호사들이 소록도에 가서 일을 하는데 법률이나 문화적, 언어적 차이로 힘들다며 변협에 도움을 요청해왔어요. 우리 국민에 대한 문제를 일본 변호사들이 얘기한다는 것이 상당히 부끄러웠어요. 그동안 제대로 활동을 해온 건지 자괴감도 들었죠. 당시 한센병에 대해 접촉만 하면 감염되는 것처럼 잘못 알려진 얘기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당시 저희 집사람도 찜찜해했고 주변에서도 꼭 가야하느냐, 굳이 해야하느냐는 얘기들이 많았죠. 사실 저도 겁이 났어요. 그런데 그게 다 몰라서 그랬던거더라구요. 그래서 전문 의사를 모셔다가 변호사들과 함께 한센병에 대해 공부도 하고 그랬어요. 그분들은 대부분 가족과 이웃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사람들인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순수할 수가 없어요. 너무 많은걸 배웠습니다."

    8년째 계속 진행되고 있는 이 소송에서 561명이 보상판결을 받았고 현재 34명이 남아있다. "그분들이 일제 치하에서 소록도에 강제격리된 분들이었는데 최초로 소송을 제기할 때 124명 신청자의 평균 나이가 81세 정도였어요. 통상적으로 그정도 나이면 1년에 40명씩 돌아가실 가능성이 높고 3년이면 거의 다 돌아가실 것이라고 생각을 했죠. 그래서 소송할 때 최대한 빨리 진행해서 그분들이 살아계신 1년 내에 끝내자고 다짐을 했어요. 1년만에 결과가 나왔지만 1심에서 패소를 하게 됐죠."

    그 후 여러 운동을 통해 2006년 3월, 드디어 첫번째 보상판결이 나왔다. "그때까지 돌아가신 분이 몇분이나 되었을 것 같나요? 20명이 돌아가셨어요. 3년동안. 다 돌아가실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저는 이 소송을 하면서 사람이 무언가 희망의 끈을 갖고 간절하게 소망을 하면 생명도 연장된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재조출신 위주의 소수 엘리트 시대는 지나
    로스쿨시대 맞아 법조계도 제2변혁기 올 것
    10년 후면 국내에도 2000명 규모 대형로펌이…


    여행을 좋아하는 박 대표는 3년전 실크로드에 다녀왔다. "우루무치를 통해 투루판을 거쳐 카스까지 내려갔다왔어요. 투루판은 정말 환경이 열악해 사람이 살 수 없는 극한지역이에요. 1년 온도차가 60~70도 정도 되죠. 더울 때는 섭씨 50도까지 올라가고 추울 땐 영하 20도까지 내려가요. 세계에서 두번째로 고도가 낮은 지역이에요. 연 강우량이 20mm 정도인데 증발량이 3000mm에요. 그 극한 환경을 극복해내기 위해 지하수 통로를 팠는데 그 길이가 무려 5000km에 달해요. 몇년을 걸려 지하수 통로를 파 그 척박한 땅을 전 세계 포도생산의 3분의 1에 달하는 풍요로운 땅으로 만든거죠."

    그는 여행길에서 읽었다는 정수일의 '실크로드 문명기행'이란 책 얘길 했다. "책에서 투루판 얘길 예로 들면서 '순화력은 문명 탄생 및 성장의 중요한 요인이다'라고 끝을 맺어요. 아주 극한 자연환경 속에서 순화되고 응전해서 살아가는 게 문명탄생이나 성장의 중요한 요인이 된다는 얘기죠."

    최근 법률시장은 급격하게 변하고 있다. 박 대표는 엘리트가 주도하는 시대가 지나가고 있다고 평가했다.

    "우리 법조시장이 1980년 이전에는 소수 엘리트 재조 출신 위주의 시장이었죠. 1981년 사법시험 합격자 300명 시대가 되면서 로펌이 태동하고 성장하는 전환점이 됐죠. 사법연수원생이 타의에 의해 법원과 검찰에 가지 못하고 변호사시장에 바로 나오는 첫 기수였어요. 그러자 변호사시장으로 바로 나온 사람들도 뭔가 자기들이 자구책을 마련해 시장을 개척할 수밖에 없었고 공동사무실이나 로펌이라는 형태가 생겨나기 시작했어요. 로스쿨제도가 도입되고 변호사 대량 배출시대가 되면서 또다른 제2의 변혁기가 올 거에요. 앞으로 10~20년이면 변화의 속도가 더 빠르겠죠. 국내에 기반을 둔 2000~3000명의 대형 글로벌 로펌이 2~3개 이상 나타날 거에요. 새로운 시장이 열리고 거기에 맞는 사람이 나와야겠죠. 시대 변화나 흐름을 좀더 앞서 주도하기 위해서는 서열 파괴는 하나의 신호탄이라고 생각해요."

    <글=장혜진 기자, 사진=백성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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