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3.28.]
쌍방미이행 쌍무계약에서 회생절차의 개시신청이나 회생절차의 개시결정 자체를 계약의 해제·해지사유로 정하는 특약(이하 ‘도산해제조항’)은 무효라는 서울고등법원의 판결이 나왔습니다[서울고등법원 2023. 1. 13. 선고 2021나2024972(2023. 2. 4. 확정), 이하 ‘대상판결’].
「채무자 회생 및 파산에 관한 법률」(이하 ‘채무자회생법’)에서는 쌍방미이행 쌍무계약의 경우 관리인에게 먼저 계약의 해제·해지 또는 이행을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고 있습니다(제119조 제1항 본문). 2007년 대법원은 이러한 채무자회생법의 취지에 비추어 쌍방미이행 쌍무계약의 도산해제조항이 무효일 가능성을 시사한 바 있는데(대법원 2007. 9. 6 선고 2005다38263 판결), 대상판결은 더 나아가 쌍방미이행 쌍무계약에서 도산해제조항은 원칙적 무효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1. 사안의 개요
원고(보증보험사)는 A사와 보증보험 한도거래약정을 체결하였고, 피고는 해당 약정에 따라 A사가 부담하는 채무를 연대보증하였습니다. A사는 B사와 ‘라이선스 도입계약’(이하 ‘주계약’)을 체결하였는데, 주계약에는 ‘A사의 회생절차가 진행된 경우 B사는 주계약의 전부 또는 일부를 해제, 해지할 수 있고, 이 경우 계약보증금 전액은 B사에게 귀속되며 A사는 계약보증금의 반환을 청구하지 못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었습니다. 한편, 원고는 A사와 한도거래약정에 기초하여 피보험자를 B사로 정한 이행보증계약을 체결하였습니다.
이후 A사가 회생절차 개시신청을 하자 B사는 주계약상 해제사유가 발생하였다고 주장하며 A사에게 주계약 해제를 통지하였습니다. 이어서 B사는 A사의 계약불이행을 이유로 원고에게 보험금(계약이행보증금)을 청구하였고, 보험금을 지급한 원고는 최종적으로 A사의 연대보증인인 피고에게 보험금 상당액의 보증채권을 청구한 것입니다.
2. 대상판결의 요지
서울고등법원은 도산해제조항은 회생절차에서 특정 채권자가 부당하게 우선권을 관철시키는 것이고, 회생채무자가 계약을 이행함으로써 그 수익으로 채권자들에게 변제할 의도로 회생신청을 한 경우에도 회생신청 그 자체를 해제·해지의 사유로 삼는 것이어서 원칙적으로 무효라고 판단하였습니다. 다만, 개별 법령에 도산해제조항의 효력을 인정하는 명문의 규정이 있거나, 계약을 존속시키는 것이 계약상대방 또는 제3자의 이익을 중대하게 침해할 우려가 있거나 회생채무자의 회생을 위하여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경우에는 도산해제조항도 유효하다는 예외를 남겨두었습니다.
서울고등법원은 위 판시에 따라 이 사건 주계약은 쌍방미이행 쌍무계약이므로 (무효인) 도산해제조항에 근거한 B사의 주계약 해제통지도 효력이 없고, 주계약의 해제를 전제로 하는 원고의 연대보증채권 또한 발생하지 않았다고 보아 원고의 청구를 전부 기각하였습니다.
3. 대상판결의 의의
대상판결은 쌍방미이행 쌍무계약에서 도산해제조항이 원칙적으로 무효라고 판단한 최초의 사례입니다. 일회적 급부제공으로 끝나지 않는 대부분의 계약(가령 원자재 공급계약, 공사도급계약)은 회생절차에서 쌍방미이행 쌍무계약일 것이므로, 상대방의 재정악화를 염두에 두고 작성한 도산해제조항이 실효성을 갖기 어려워진 측면이 있습니다.
물론 도산해제조항의 효력을 인정하는 명문의 규정이 있는 경우(가맹사업거래의 공정화에 관한 법률 제14조 제1항 및 동법 시행령 제15조 제1호 또는 채무자회생법 제120조 제3항 본문 등)에는 도산해제조항의 효력이 인정되고, 명문의 규정이 없더라도 회생채무자의 채무불이행을 이유로 한 법정해제권의 행사는 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쌍방미이행 쌍무계약의 상대방이 회생절차에 돌입하려고 한다면 도산해제조항의 유효성 여부를 면밀히 검토하고 상대방의 이행지체 등 법정해제사유는 없는지도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아가 향후 계약을 체결할 때는 도산해제조항의 효력이 부정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정교하게 해제조항을 다듬을 필요도 있습니다.
권순철 변호사 (sckwon@jipyong.com)
이세희 변호사 (shlee1@jipyo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