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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法臺에서

    法臺에서 리스트

    그날

    그날

    "어허~ 그날이 옵니까?" 연수원을 마치고 처음으로 법정에 갔던 날 재판장이 물었습니다. 법무관이오? 네. 언제 제대요? 3년 후입니다. 어허 그날이 옵니까? 당황했지만, 군대에서 흔히 하는 농담이라 웃었습니다. 혼자서 처음 해보는 재판의 긴장감도 살짝 풀어졌습니다. 문제는 한 달 뒤의 다음 기일이었습니다. 기억을 못 하는 건지, 아니면 짓궂은 건지 재판장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종전과 똑같은 물음을 했습니다. 법무관이오? 언제 제대요? 그날이 옵니까? 재판장은 여전히 근엄한 표정으로 그날이 언제 오는지 대답을 재촉했고, 양옆의 배석판사들은 고개를 돌리며 웃음을 참고 있었지만 나는 울지도 웃지도 못하고 쭈뼛쭈뼛할 뿐이었습니다.   그때는 당황했지만 그건 풋내기 법무관의 긴장을 풀고 격려해

    김태균 판사 (서울중앙지법)
    그때 그곳

    그때 그곳

    해가 바뀌고도 어느 새 달포가 지나고 있다. 다섯에서 여섯이 되어 자랑스런 막내와 달리, 나는 몰래 손을 꼽아보고서야 나이를 센다. 그러다, 문득, 내 기억 속 그때의 아버지, 어머니가 겨우 지금의 내 나이였음을 깨닫는다. 가슴이 슬쩍 내려앉는다.   그때는 삶이 마음대로 되지 않았고, 가족들은 저마다 각자의 몫을 견디고 있었다. 그때의 나는 어른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가끔은 야속했으며, 내색하지 못하는 것이 서럽기도 했다. 시간이 흐르고 나이를 먹어, 그때의 아버지, 어머니가 아마 서 계셨을 그곳에 닿았다. 나는 생각만큼 여물지 않았고, 원하는 곳에 손이 잘 닿지 않는다. 지금의 내가 그때 그곳에 있는 상상을 해 본다. 때로는 도망가고 싶었겠다. 내려놓

    황성욱 판사(상주지원)
    범주

    범주

    나는 주린이입니다. 정확히는 배짱도 지식도 없어 여태 주식계좌도 못 만들면서 여기저기 기웃거리기만 합니다. 그런 내게 누군가가 골라 준 소위 '테마주'는 솔깃한 제안입니다. 무수한 종목 중에 괜찮은 것 몇 개만 보면 되니 상쾌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만 보게 되면 정작 그게 왜 테마주인지, 펀더멘탈은 어떻게 보는지를 배울 수 없습니다.   테마주는 아니어도 괜찮은 종목을 놓치게 됩니다. 테마주라는 '범주'는 복잡한 주식시장을 단순한 눈으로 접근하게 해주지만, 정작 시장의 실체에 접근하는 데에는 장애가 될지도 모릅니다. 나는 '범주화의 오류'에 빠진 겁니다.   화학자가 세상을 유기물과 무기물로 나누듯 범주화는 세상을 단순하게 환원합니다. 범주 안의 것들 사이의 유사성과 범주들 사

    김태균 판사 (수원지법)
    비법

    비법

    어릴 때 부모님이 외출한 틈을 타 처음으로 라면을 끓였던 날이다. 라면 봉투에 적힌 대로 물을 맞추고, 면과 스프를 정성껏 털어 넣었다. 보글보글 거품이 끓어오르자 왠지 부담스러워 불을 낮추었다가, 스르륵 거품이 꺼지면 괜히 안쓰러워 불을 높이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완성한 라면은 10살 평생 먹어본 적이 없는 천상의 맛이었다. 봉투에 적힌 대로 끓인 라면에서 이토록 특별한 맛이 나다니. 그렇다면 봉투에 적히지 않은 불 조절이야말로 이 맛을 나게 한 비법이 틀림없었다. 돌아오신 어머니께 내가 찾은 비법을 의기양양하게 전수하였으나, 어머니는 그저 웃으실 뿐이었다.   성공의 원인은 대개 복합적이지만, 아마도 대부분은 "교과서 위주로 꾸준히 공부했다"는 식의 심심한 것들이 차지할 것이다. 하지만

    황성욱 판사 (상주지원)
    마음씀

    마음씀

    취미는 철학입니다. 게으르고 멍때리는 것을 좋아하는 내게는 퍽 어울리는 일입니다. 홀로 즐기는지라 누구에게 떠벌리지는 않지만, 묻는 사람들에게는 하이데거를 말합니다. 플라톤이나 칸트는 너무 쉬워 보여 밑천을 다 드러낼 것 같아서입니다. 너무 당연한 것을 너무 어렵게 말하는 하이데거는 사람을 침묵하게 합니다. 말하는 나도 듣는 상대도 도통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정작 알지도 못하면서 떠드는 내게 이 철학자는 허언증 같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이데거의 개념 중에 '조르게(Sorge)'라는 게 있습니다. 우리말로는 '근심'이나 '걱정', 영어로는 'anxiety'나 'concern'으로 번역되는데, 하이데거는 좀 다른 의미로 씁니다. 짧은 소견으로는 죽음을 염려해서 이를 극복

    김태균 판사 (수원지법)
    틀

    새로운 것을 접하게 되면 내가 알고 있는 것 중에서 그와 가장 비슷한 것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전기자동차를 처음 보았다면, 알고 있는 내연기관 자동차와 비교해서 무엇이 다른지 이해하는 식이다. 만약 내가 말을 타던 시대에서 넘어온 시간여행자라면 자동차를 이해하려고 마차나 수레를 먼저 떠올렸을 것이다. 그 아득한 차이만큼 이해의 속도나 깊이가 다를 수밖에 없다.    재판을 해야 하는 사건은 내가 가진 경험을 묻지 않고 온다. 작물을 키워본 경험이라고는 초등학교 숙제로 강낭콩을 길러본 것이 전부이지만, 복숭아 농사를 망친 원인이 농약인지, 비료인지, 농부의 잘못인지를 가려내야 한다. 이 사건에서 공부를 마치고 나면, 다음에 올 비슷한 분쟁에서는 이 사건이 이해의 틀이 될

    황성욱 판사 (상주지원)
    녹두

    녹두

    새해 연휴에 집어 든 책은 '전봉준 재판정 참관기'(서해문집, 2017)입니다. 여러 해 책장 한구석에서 먼지만 쌓여가던 게 안타까워 이번에야말로 읽어주겠다는 자비심의 발로였습니다. 150여 쪽에 불과해서 넉넉잡아 반나절이면 볼 수 있다는 얄팍한 계산도 깔려 있었지요. 그러나 연휴 내내 책을 끼고 있으면서도 다 보지 못했고, 책은 150쪽이 아니라 15,000쪽 이상의 무게로 나를 번민(煩悶)하게 했습니다. 녹두장군 전봉준에 대한 6번의 공초(供招, 신문기록)와 판결문이 번역되어 있는 이 책은 내게 묻습니다. 역사적 전환기에 재판하는 사람은 어떤 마음가짐이어야 하는가.   녹두장군의 실패와 죽음은 그 자체로 비장한 서사시입니다. 불의에 항거했던 장군이 만민이 고르고 편하게 사는

    김태균 판사 (수원지법)
    신경치료

    신경치료

    치통으로 치과를 찾아 진료를 받고, 신경치료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다. 신경치료를 받고 돌아온 이들이 펼치는 저마다의 무용담을 익히 들었던 터라, 신경치료라는 말만 들어도 뒷목이 저릿저릿했다. 초록창의 지식인 중 누군가는 신경치료의 고통을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의사선생님의 멱살을 잡고 싶은 충격'이라 표현했는데, 그걸 보니 글쓴이가 평소 난폭한 사람이길 바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서워하는 기색을 들키는 것이 부끄럽다는 생각에, 짐짓 침착한 척 치료를 받았다. 그런데 마취주사 이후에는 몰래 흘린 식은땀이 무색할 만큼 별다른 통증 없이 첫날의 치료가 끝났다. 문제는 신경이 잘 제거되었는지 확인하는 다음날이었다. 마취를 안 하는 것을 보니 아플 일도 없나보다 방심하고

    황성욱 판사 (상주지원)
    '삥'

    '삥'

    초등학교 6학년의 어느 날, 학교 끝나고 집에 오는데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너 이리 와봐. 처음 본 중학생 정도 돼 보이는 형이 골목 으슥한 곳으로 불렀습니다. "가진 돈 다 내놔." 나는 그때 칼이 과일 깎는 데만 쓰는 게 아니라는 것을 온몸으로 깨달았습니다. 공교롭게도 나는 진짜로 돈이 없었습니다. "뒤져서 나오면 10원에 한 대다." 그 상투적인 일갈에 갑자기 생각이 났습니다. 필통에 10원짜리 하나가 있다는 것을. 걸리면 한 대 맞아야 한다는 생각에 고백했습니다. "10원짜리 동전 하나밖에 없는데요." 순간의 정적, 그 형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냥 가라고 했습니다.    찌질하지만 처음으로 범죄의 피해자가 되었던 경험입니다. 수십 년이 지나 판사가 된 지금까지도

    김태균 판사 (수원지법)
    공놀이

    공놀이

    나는 평화주의자다. 내 자신과도 좀처럼 싸우지 않는다. 고로 하는 운동은 주로 공을 쫓아다니는 일이다. 박민규는 소설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에서 초기 삼미팀의 야구를 두고 '치기 힘든 공은 치지 않고 잡기 힘든 공은 잡지 않는다'고 했다. 나의 공놀이도 같은 누명을 쓰기 십상이다. 그래서 선생님을 찾아 치기 힘든 공도 칠 수 있는 비결을 배우려고 한다.   선생님들로부터 가장 많이 듣는 말이 "공을 끝까지 보라"는 것이다. 구기 종목의 첫 번째 덕목이기도 하지만, 내가 유독 잘 못하는 일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내가 공을 끝까지 보지 않는다는 것 자체를 잘 인식하지 못했다. '공을 안 보면 뭘 보고 쳤겠냐'는 식이었다. 그러다 공이 맞아나가는 순간을 목격한 기억이 잘 없다는 것을 알

    황성욱 판사 (상주지원)
    그럴 수도 있지

    그럴 수도 있지

    작은 돈으로 소소한 기쁨을 사는 곳에 들렀다가, 큰 아이가 갖고 싶다던 미니어처 만들기 세트를 사줬다. 조각들을 떼어 침대며 화장대며 소꿉장난 같은 가재도구를 조립하고, 나름의 계획으로 색칠해갔다. 잠시 딸이 자리를 비운 사이, 누나의 작업에 참가하고 싶었던 5살 막내가 야심차게 의자 하나에 전위적인 채색을 해버렸다. 셋째의 만행을 발견한 딸이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동생이 그럴 수도 있지. 칠한 것도 별로 큰 게 아니구만." 나의 말에 첫째는 절규한다. 속상한 건 자기인데 왜 동생 편을 드냐고. 아내가 "우리 딸이 많이 속상했겠구나"하고 등을 토닥이자, 그제서야 딸이 울음을 그친다.   사실 재판을 하다 보면, 마음 속으로 '그럴 수도 있지, 이런 일로 이렇게까지…'라는 생각이 들 때가

    황성욱 판사 (상주지원)
    중독

    중독

    어릴 적에는 커피 맛을 몰랐습니다. 대학에 와서야 겨우 자판기 커피를 즐겼는데, 커피 맛보다는 설탕과 프림이 들어간 부드럽고 달달한 맛을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아메리카노에 입문하게 된 것은 커피를 좋아하는 아내와 데이트를 하면서부터입니다. 그렇게 마시던 것이 언젠가부터 샷을 추가하거나 아예 에스프레소만 마십니다. 하루 3~4잔은 보통이고, 종일 물 대신 커피만 마시는 날도 있습니다.    요즘 들어 부쩍 몸이 건조해졌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두피가 건조해지는 것은 치명적이었습니다. 커피가 이뇨작용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커피 때문인가 싶어 몇 달 전부터 커피를 끊었습니다. 커피를 끊자 두통이 시작됐습니다. 온종일 머리가 지끈거리는 통에 커피 대신 두통약을 찾았습니다. 화

    김태균 판사 (수원지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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