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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法臺에서

    法臺에서 리스트

    중독

    중독

    어릴 적에는 커피 맛을 몰랐습니다. 대학에 와서야 겨우 자판기 커피를 즐겼는데, 커피 맛보다는 설탕과 프림이 들어간 부드럽고 달달한 맛을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아메리카노에 입문하게 된 것은 커피를 좋아하는 아내와 데이트를 하면서부터입니다. 그렇게 마시던 것이 언젠가부터 샷을 추가하거나 아예 에스프레소만 마십니다. 하루 3~4잔은 보통이고, 종일 물 대신 커피만 마시는 날도 있습니다.    요즘 들어 부쩍 몸이 건조해졌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두피가 건조해지는 것은 치명적이었습니다. 커피가 이뇨작용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커피 때문인가 싶어 몇 달 전부터 커피를 끊었습니다. 커피를 끊자 두통이 시작됐습니다. 온종일 머리가 지끈거리는 통에 커피 대신 두통약을 찾았습니다. 화

    김태균 판사 (수원지법)
    힙합

    힙합

    대학 때 친구들은 노래방을 좋아했다. 선후는 모르겠으나 다들 노래도 잘 했다. 반면 나는 음치라는 확고한 자아상이 있었다. 당시 노래방의 암묵적인 규칙은 앉은 순서대로 노래책자를 넘기고 한 곡씩 노래를 예약하는 것이었는데, 나에게는 그 순간이 고역이었다. 내가 택한 고육지책은 랩송을 부르는 것이었다. 어차피 노래를 해도 음정이 맞지 않는다고 하니, 처음부터 음정이 없는 노래를 하면 되지 않겠냐는 무지한 생각이었다. 친구들은 나에게 랩을 내레이션처럼 하는 재주가 있다고 넌지시 말하였으나, 나는 그 말이 자제를 요청하는 뜻인 줄 몰랐다. 아무튼 그런 까닭으로, 그 때부터 나의 음악 재생목록에는 항상 힙합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요즘 힙합 음악에 대한 불만이 생겼다.

    황성욱 판사 (상주지원)
    물정

    물정

    성수는 순둥이입니다. 등록금 벌겠다고 몇 달을 밤잠 못 자고 아르바이트했건만 돈을 다 못 받았습니다. 점주에게 떼인 돈이 100만 원입니다. 20년 전 가난한 대학생에게 100만 원은 목숨 다음으로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그 100만 원에 흥분한 나는 노동청이든 경찰서든 하다못해 동사무소에라도 신고해서 받아주겠다고 길길이 날뛰었습니다. 나는 명색이 법대생이었습니다.   왈수형은 기인(奇人)입니다. 공부 빼고는 모르는 것도, 못 하는 것도 없습니다. 축제 때 다들 말리는 데 기어이 불춤을 추다가 학교를 태울 뻔도 했지만, 기죽는 법은 없습니다. 적당히 속물이고, 적당히 현자여서 고민 상담을 하면 늘 사이다 같은 답을 주었지요. 이별에 상심한 후배에겐 "걔는 지금 새 애인이랑 열심히 라면 먹고 있

    김태균 판사 (수원지법)
    익숙한 새로움

    익숙한 새로움

    판사의 일주일은 지난 주와 이번 주가 크게 다르지 않다. 초등학교 때 방학을 맞아 그린 일과표처럼, 매주 같은 요일 같은 시간에 재판, 속행기록 검토, 판결문 작성과 일들이 반복해 채워진다. 주 단위의 재판과 선고를 중심으로 일상이 반복되다보니 시간의 흐름을 놓치기 십상이다. 법원의 시간은 빠르게 간다.    크게 보면 같은 일을 반복하지만, 시간을 구성하는 구체적인 사건은 다르다. 새로 배당된 신건, 새로 결심된 선고 사건이 있고, 속행 사건도 매번 모습을 바꾸고 나타난다. 그렇지만 항상 새롭다는 것에 익숙해지는 것도 금방이다. 식당에 늘 새로운 손님들이 들고 나는 것처럼, 매주 그만큼의 사건이 드나드는 것이 당연해진다. 그 중에는 어렵거나, 완전히 새로운 유형이거나, 당사자가 특

    황성욱 판사 (상주지원)
    구속의 기억

    구속의 기억

    화창한 휴일이었습니다. 느지막이 일어나 어린 아들과 이불 속에서 한참을 뒹굴고 놀았습니다. 주말에만 보는 아내도 함께 있었습니다. 아침 겸 점심을 챙겨 먹고 온 가족이 집 근처 공원으로 나섰습니다. 계절이 계절인지라 꽃은 지천에 만발했습니다. 날씨와 꽃을 만끽하며 놀았습니다. 모처럼 여유롭고 게으른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오후에는 출근해서 사람을 감옥에 가뒀습니다. 그날은 처음 구속영장 당직을 했던 날입니다.   언제나 첫경험은 아찔한 법이지요. 오전 내 가족과 함께 날씨와 꽃을 즐기다가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사람의 죄를 묻고 구속하는 것은 유쾌한 경험은 아닙니다. 벌써 10년이나 지난 일이고, 그사이 숱하게 사람을 구속했지만, 처음 그날의 기억은 여전합니다. 이제는 제법 무디게 일하지만 마

    김태균 판사 (수원지법)
    가정재판

    가정재판

    우리 세 아이는 자주 다툰다. 사적 보복과 자력구제가 금지되어 있으므로, 억울함은 고발과 진정으로 이어진다. 아이들의 마음을 더 잘 이해하는 엄마가 적합한 관할이라는 건 내 생각이다. 아이들은 보다 강한 응징을 할 것처럼 보여서인지, 분쟁 전문가라고 생각해서인지, 아빠를 더 자주 찾는다.   이렇게 시작된 재판을 가정재판이라 하자. 가정재판의 절차는 대체로 형사소송의 그것을 준용하지만, 몇 가지 차이가 있다. 피고인은 불리한 진술을 거부할 권리가 없고, '네 죄를 네가 알렸다' 원칙에 따라 자신의 범죄사실을 자백할 부담을 진다. 자기 잘못을 알아야 행동을 고칠 수 있다는 취지인데, 가끔은 고발되지 않은 부분까지 고해성사를 하기도 한다. 이 때 불고불리의 원칙은 적용되지 않고, 등장한 모든 사

    황성욱 판사 (상주지원)
    오지랖

    오지랖

    10살 아들은 정의감이 투철합니다. 남다른 정의감으로 가족부터 지나가던 사람까지 사사건건 참견입니다. 길에 떨어진 쓰레기 하나에도 분개합니다. 그러니 조카들이 모이는 명절은 늘 극도의 긴장입니다. 형, 동생 구별 없이 사촌들의 작은 잘못 하나, 저와 다른 습관 하나도 용납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모든 분란을 무마하기 위해서 저는 조카들 용돈을 두둑이 준비합니다.   이번 명절도 그렇게 무마하고 나서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남이야 뭘 하든 신경 말고 너나 잘해라. 사람마다 옳다고 생각하는 게 다르다. 그러니 네 생각을 강요하지 마라. 네가 하는 것은 오지랖이다." 그러자 아들이 반격합니다. "그러면 만날 남들 잘했다, 못했다 재판하고 벌주는 아빠가 나보다 더한 오지랖이네. 자기는 오

    김태균 판사 (수원지법)
    기록 속의 이름

    기록 속의 이름

    법정에 선 피고인은 자꾸만 배시시 웃었다. 우유를 먹지 못하게 한다는 이유로 친구를 칼로 찔렀다는 공소사실과, 법정에서 보는 피고인의 해맑음이 형용모순처럼 느껴졌다. 양형조사를 거쳤다. 피고인은 지적장애가 있고, 피고인의 언니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었고, 몇 년 전 어머니마저 돌아가셨다. 남은 가족은 관계가 소원해진 동생 한 명과, 20대 중반의 막내동생이 전부였다.    피고인에 대한 양형을 고민하고 있을 때 합의서가 제출되었다. 막내 동생이 상당한 빚을 내서 피해자와 합의하였다고 했다. 동생은 장애가 있는 언니 둘과 함께 살면서 돌볼 계획이니 피고인을 선처해달라고 했다. 동생은 피고인이 초등학생 같은 글씨로 적어냈던 의견서의 가족사항 란에서 본 이름이었다.

    황성욱 판사 (상주지원)
    악인(惡人)

    악인(惡人)

    김지운 감독의 2010년작 '악마를 보았다'는 정확히 불교 영화입니다. 석가는 불법을 전하겠다는 제자에게 묻습니다. "사람들이 너의 말을 듣지 않고, 모욕하고, 죽이려 한다면 어찌할 것이냐?" 제자는 사람들이 자신을 죽이더라도 슬퍼하지도 분노하지도 않겠다고 합니다. "그들의 마음이 곧 제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제야 석가는 제자의 청을 허락합니다. 영화의 주인공은 약혼녀를 살해한 연쇄살인마에게 복수하지만 결국 살인범보다 더 잔혹한 악마가 되어갑니다. 변해가는 자신의 모습을 알면서도 복수를 멈추지 못한 주인공은 끝내 오열하며 영화는 끝이 납니다. 제자와 주인공 모두 내 마음도 언제든지 악(惡)해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람들은 악(惡)이 어딘가에 고정된 모습으로 존재하

    김태균 판사 (수원지법)
    거짓말의 기술

    거짓말의 기술

    재판을 하다 보면, 완전히 반대의 사실을 말하는 두 사람의 모습이 모두 한없이 진실되어 당혹스럽게 느껴질 때가 있다. 누구의 표정이 거짓을 말하는 것이라 해도 믿기 어려워, 자연스러운 거짓말의 비결이 무엇인지 궁리해본다. 거짓말이라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고 지나친 수많은 말들이 있었겠지만, 다른 증거로 인해 나중에 거짓임이 판명되어 미수에 그친 거짓말들이 있다. 그 거짓말의 순간들을 되짚어보며 이런 기술이 사용되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먼저 사실을 바탕으로 하지만, 중요한 한 두 가지만을 바꾸는 방법이다. 예컨대 자기 전 막내에게 "양치했니?"라고 물어보면, 막내는 자신 있게 "구석구석 깨끗이 했지!"하고 손가락으로 브이를 그린다. 하지만 구석구석 깨끗이 한 양치는 아침의 일이고(물론 '

    황성욱 판사 (상주지원)
    공간

    공간

    관리인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회사가 어려워지면 채무를 조정하고 회사를 살리는 절차를 '회생'이라고 하는데, 이때 회사를 운영하는 사람을 관리인이라고 합니다. 보통 대표이사가 관리인이 됩니다. 법원에 있으면서 많은 관리인을 봤습니다. 그런데 법원에서 본 관리인들 대부분은 쭈뼛쭈뼛하고, 조리있게 말하지도 못했습니다. 질문을 이해 못 해 답답한 적도 많았습니다. 사업계획은 경영에 무지한 제가 보기에도 판타지 소설 같았던 적도 있습니다. 그럴 때면 '지금은 사정이 어렵다고 해도 한 회사의 대표이고, 수십 명에서 수백 명의 직원을 책임지는 사람인데…'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그런데 회사 현장에서 관리인을 만나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사람의 눈빛부터 다릅니다. 눈빛은 반짝거리고 목소리에

    김태균 판사 (수원지법)
    인공지능 스피커

    인공지능 스피커

    인공지능 스피커 하나를 들여왔다. 말로 지시를 내리면 스스로 인터넷에 연결해 원하는 답을 준다고 했다. 동봉된 설명서에는 스피커에게 물어보면 대답을 잘 할 거라는 질문의 목록이 있지만, 아이들이 거기에 관심이 있을 리 없다. 아이들이 묻고 싶은 걸 물어보니, 스피커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했다. 날씨를 묻는데 노래를 재생하고, 낱말을 물어보는데 배달주문 메뉴를 읊어대자, 아이들은 "알아듣지도 못한다"는 판정을 내리고는 이내 다른 장난감을 찾아 자리를 떴다.   스피커와 씨름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법정에서 당사자들과 나누는 대화를 떠올린다. 직접 소송을 하는 당사자들 중에는 '법이 없어도 사는 내가 악독한 상대방 때문에 얼마나 고초를 겪어왔는지' 호소하고 싶어 하는 분들이 많다. 그

    황성욱 판사 (상주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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