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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法臺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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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민소규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민소규

    가끔 "재판 안 하면 뭐하냐?"는 질문을 받는데 대부분 재판을 준비하고, 취미가 성악일 거 같은 다른 필자가 쓰셨듯이 민사에서는 준비서면을 읽습니다. 그런데 전자소송의 부작용으로 재판전날 오후부터 서면이 밀려들다가 오후 6시 전후 큰 파도가 치는데, 접수시간(17:58, 18:02 등)과 제출 시기에 비추어 다소 아쉬운 준비서면을 읽다보면 가벼운 마음으로 퇴근하는 변호사님 뒷모습이 아련하게 떠오릅니다. 심지어 재판 날 변호사님은 법정에 계신데 준비서면이 접수되기도 하구요.   제가 민사소송규칙(이하 '민소규') 제69조의3을 들어 늦게 제출되는 서면에 대하여 지적하면 대개 기존 내용을 간단히 정리하였단 답변을 듣는데 '그리 간단하면 더 빨리 내시지…'라는 생각이 들고, 가끔 위 홑 따옴표를

    김창모 부장판사 (수원지방법원)
    주연과 조연

    주연과 조연

    우리 모두 자기 인생의 주연입니다. 동시에 누군가의 조연이고, 사회라는 무대에서는 대부분 무명 엑스트라입니다. 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움직인다고 생각하던 어린 시절이 있습니다. 어느 순간 내가 세상의 중심이나 주연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또한 자신의 삶에서조차 주연으로 사는 것도 만만치 않지요.   우리는 수많은 관계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얼기설기 엮여있는 사회구조 속에서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삶이란 아주 제한적이니까요. 일생 동안 고유한 자신의 삶을 살지도 못하면서 평생 조연이나 무명의 엑스트라로 살아가기 십상입니다.   그런데 주연은 물론이고 조연으로도 살고 싶지 않은 삶이 있습니다. 그 누구도 범죄라는 무대에서는 주연(정범)을 맡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조연(종

    류기인 지원장 (마산지원)
    세상에 뿌려진 초임부장님들께

    세상에 뿌려진 초임부장님들께

    무엇보다 건강하게 지내셨길 기원합니다. 5년차 부장으로서 초임 부장님들께 제 초임부장 시절 경험을 조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4년 전 순천지원으로 발령받아 가게 되었습니다. 그다지 자신이 없어 형사단독을 지원하였으나 불희망한 민사합의부장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현재는 이번에는 불희망한 형사단독을 하게 되었네요.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고, 하여야 할 사무분담은 언젠가는 만나게 되어 있나 봅니다.    민사합의부장을 하기 주저한 이유 중 하나는 과거 1년간 배석을 한 것이 민사합의 경험의 전부였기 때문입니다. 당시 열정이 넘쳤던 부장님으로부터 스파르타식으로 가열차게 업무를 배웠고, 연이은 신건메모 및 판결문 작성으로 페르시아 군과 싸우는

    김창모 부장판사 (수원지방법원)
    법관의 읽기

    법관의 읽기

    업무의 상당 부분은 읽는 것입니다. 종이기록을 읽고, 전자문서를 읽습니다. 법정에서 재판 할 때 외에는 대부분의 시간을 읽기로 보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재판관련 서류 읽기는 전형적인 패턴이 있습니다. 법률요건 또는 구성요건에 맞춰 읽습니다. 요건사실을 추려내고, 사실과 주장을 구분하여 읽습니다. 주장임에도 사실처럼 쓰인 경우도 있습니다. 주장과 사실이 뒤섞여 있을 때는 사실을 추려내고, 그 사실을 증거와 대조해서 다시 읽어 봅니다.   역사적 사실, 객관적 사실이 하나인 것 같지만, 관점 또는 경험의 내용에 따라 조금씩 다른 사실이 존재합니다. 대립하는 당사자 사이에서는 사실의 간격이 심연과 같습니다. 어떻게 이럴까 싶지만, 저 자신도 기억 속의 사실과 객관적 자료의 차이가 있었던 경

    류기인 지원장 (마산지원)
    법대(法大)에서, 법대(法臺)에서

    법대(法大)에서, 법대(法臺)에서

    존경하는 독자님들, 지면으로 인사드리게 되었네요. 저는 수원에서 형사단독을 하는 판사입니다.   얼마 전 "김 부장은 재판경험이 많으니 법대에서 글을 쓰면 어때요?"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어느 법대(法大)에서 요청을 하였나요?"라고 물었더니 연락 주신 분이 웃으면서 그 법대가 아니라 법률신문의 '법대에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법대에서'는 한국전쟁 중 서울 중구 을지로1가에서 타블로이드 4면으로 창간되었고, '법조와 함께, 국민과 함께 100년의 미래를!'이라는 슬로건을 내건 대한민국 유일의 법률분야 전문신문인 법률신문의 칼럼이 아닙니까?"라고 놀라 되물었습니다.   저도 훌륭한 판사님들이 재밌고 유익한 글을 쓰셔서

    김창모 부장판사 (수원지방법원)
    선택과 책임

    선택과 책임

    사람은 자신이 한 행위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이 상식입니다. 청소년의 경우에도 연령에 따라 제한이 있지만, 행위에 따른 일정한 책임을 집니다. 형법 제9조는 '14세되지 아니한 자의 행위는 벌하지 아니한다'라고 형사미성년자의 책임능력을 제한합니다. 14세 미만 청소년의 중대한 법익침해 행위에 대한 형사처벌 필요성을 거론하며 형사미성년자의 연령을 낮추자는 의견도 있습니다. 자신이 한 행위에는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한 가지 질문이 떠오릅니다.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은 전적으로 자유로운 자신의 선택에 따른 것인가 입니다. 대체로 자유롭게 어떤 행위를 할 것인지 선택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점심 때 뭘 먹을까' 고민하기는 하지만 메뉴의 선택은 자유로운 결정이지요. &nbs

    류기인 지원장 (마산지원)
    그날

    그날

    "어허~ 그날이 옵니까?" 연수원을 마치고 처음으로 법정에 갔던 날 재판장이 물었습니다. 법무관이오? 네. 언제 제대요? 3년 후입니다. 어허 그날이 옵니까? 당황했지만, 군대에서 흔히 하는 농담이라 웃었습니다. 혼자서 처음 해보는 재판의 긴장감도 살짝 풀어졌습니다. 문제는 한 달 뒤의 다음 기일이었습니다. 기억을 못 하는 건지, 아니면 짓궂은 건지 재판장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종전과 똑같은 물음을 했습니다. 법무관이오? 언제 제대요? 그날이 옵니까? 재판장은 여전히 근엄한 표정으로 그날이 언제 오는지 대답을 재촉했고, 양옆의 배석판사들은 고개를 돌리며 웃음을 참고 있었지만 나는 울지도 웃지도 못하고 쭈뼛쭈뼛할 뿐이었습니다.   그때는 당황했지만 그건 풋내기 법무관의 긴장을 풀고 격려해

    김태균 판사 (서울중앙지법)
    그때 그곳

    그때 그곳

    해가 바뀌고도 어느 새 달포가 지나고 있다. 다섯에서 여섯이 되어 자랑스런 막내와 달리, 나는 몰래 손을 꼽아보고서야 나이를 센다. 그러다, 문득, 내 기억 속 그때의 아버지, 어머니가 겨우 지금의 내 나이였음을 깨닫는다. 가슴이 슬쩍 내려앉는다.   그때는 삶이 마음대로 되지 않았고, 가족들은 저마다 각자의 몫을 견디고 있었다. 그때의 나는 어른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가끔은 야속했으며, 내색하지 못하는 것이 서럽기도 했다. 시간이 흐르고 나이를 먹어, 그때의 아버지, 어머니가 아마 서 계셨을 그곳에 닿았다. 나는 생각만큼 여물지 않았고, 원하는 곳에 손이 잘 닿지 않는다. 지금의 내가 그때 그곳에 있는 상상을 해 본다. 때로는 도망가고 싶었겠다. 내려놓

    황성욱 판사(상주지원)
    범주

    범주

    나는 주린이입니다. 정확히는 배짱도 지식도 없어 여태 주식계좌도 못 만들면서 여기저기 기웃거리기만 합니다. 그런 내게 누군가가 골라 준 소위 '테마주'는 솔깃한 제안입니다. 무수한 종목 중에 괜찮은 것 몇 개만 보면 되니 상쾌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만 보게 되면 정작 그게 왜 테마주인지, 펀더멘탈은 어떻게 보는지를 배울 수 없습니다.   테마주는 아니어도 괜찮은 종목을 놓치게 됩니다. 테마주라는 '범주'는 복잡한 주식시장을 단순한 눈으로 접근하게 해주지만, 정작 시장의 실체에 접근하는 데에는 장애가 될지도 모릅니다. 나는 '범주화의 오류'에 빠진 겁니다.   화학자가 세상을 유기물과 무기물로 나누듯 범주화는 세상을 단순하게 환원합니다. 범주 안의 것들 사이의 유사성과 범주들 사

    김태균 판사 (수원지법)
    비법

    비법

    어릴 때 부모님이 외출한 틈을 타 처음으로 라면을 끓였던 날이다. 라면 봉투에 적힌 대로 물을 맞추고, 면과 스프를 정성껏 털어 넣었다. 보글보글 거품이 끓어오르자 왠지 부담스러워 불을 낮추었다가, 스르륵 거품이 꺼지면 괜히 안쓰러워 불을 높이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완성한 라면은 10살 평생 먹어본 적이 없는 천상의 맛이었다. 봉투에 적힌 대로 끓인 라면에서 이토록 특별한 맛이 나다니. 그렇다면 봉투에 적히지 않은 불 조절이야말로 이 맛을 나게 한 비법이 틀림없었다. 돌아오신 어머니께 내가 찾은 비법을 의기양양하게 전수하였으나, 어머니는 그저 웃으실 뿐이었다.   성공의 원인은 대개 복합적이지만, 아마도 대부분은 "교과서 위주로 꾸준히 공부했다"는 식의 심심한 것들이 차지할 것이다. 하지만

    황성욱 판사 (상주지원)
    마음씀

    마음씀

    취미는 철학입니다. 게으르고 멍때리는 것을 좋아하는 내게는 퍽 어울리는 일입니다. 홀로 즐기는지라 누구에게 떠벌리지는 않지만, 묻는 사람들에게는 하이데거를 말합니다. 플라톤이나 칸트는 너무 쉬워 보여 밑천을 다 드러낼 것 같아서입니다. 너무 당연한 것을 너무 어렵게 말하는 하이데거는 사람을 침묵하게 합니다. 말하는 나도 듣는 상대도 도통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정작 알지도 못하면서 떠드는 내게 이 철학자는 허언증 같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이데거의 개념 중에 '조르게(Sorge)'라는 게 있습니다. 우리말로는 '근심'이나 '걱정', 영어로는 'anxiety'나 'concern'으로 번역되는데, 하이데거는 좀 다른 의미로 씁니다. 짧은 소견으로는 죽음을 염려해서 이를 극복

    김태균 판사 (수원지법)
    틀

    새로운 것을 접하게 되면 내가 알고 있는 것 중에서 그와 가장 비슷한 것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전기자동차를 처음 보았다면, 알고 있는 내연기관 자동차와 비교해서 무엇이 다른지 이해하는 식이다. 만약 내가 말을 타던 시대에서 넘어온 시간여행자라면 자동차를 이해하려고 마차나 수레를 먼저 떠올렸을 것이다. 그 아득한 차이만큼 이해의 속도나 깊이가 다를 수밖에 없다.    재판을 해야 하는 사건은 내가 가진 경험을 묻지 않고 온다. 작물을 키워본 경험이라고는 초등학교 숙제로 강낭콩을 길러본 것이 전부이지만, 복숭아 농사를 망친 원인이 농약인지, 비료인지, 농부의 잘못인지를 가려내야 한다. 이 사건에서 공부를 마치고 나면, 다음에 올 비슷한 분쟁에서는 이 사건이 이해의 틀이 될

    황성욱 판사 (상주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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