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는 나이가 들고 경력이 쌓여갈수록 힘든 직업이다. 일단 합의부나 상급심 재판을 맡게 되면서 사건의 난이도가 높아진다. 작은 글씨가 잘 안 보이고 허리가 아파올 때쯤 몇만 쪽의 증거기록과 수십 번의 재판기일이 필요한 사건들이 배당된다. 그 무렵 ‘나는 일상의 재판을 하지만, 당사자는 일생의 판결을 받는다’는 것도 알게 된다. 내가 판결 선고를 연기하면 당사자들은 계속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낼 것이고, 그냥 내가 잠을 좀 줄이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생각이 과해지면 동료 판사들을 괴롭히는 이른바 ‘벙커부장’ 반열에 오르게 된다.뉴스에 판사의 이름까지 오르내리는 사건을 맡게 되면 법률가의 호연지기(浩然之氣)가 무색해진다. 몇 년간 재판을 해서 쟁점별로 몇백 페이지에 이르는 판결을 선고했지만 TV 화면의 캡션 정도의 문구로 간단히 요약되고, 판결의 이유는 주목받지 못한다. 법정에서 제시된 증거와 법리에 따라 소신껏 판단했다고 생각했는데, 논평하는 입장에 따라 우수법관이 되기도 했다가 순식간에 걸림돌 판사로 전락하기도 한다. 사형판결이나 사면복권이 이루어지는 경우처럼 고심에 고심을 거듭해 결론을 내렸지만 판결대로 집행이 되지 않는 사건들도 있다.재판을 받는 당사자 중에 재판 자체가 인생의 목표이자 결과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다수의 행복을 추구하는 공리주의 철학적 시각에서도 재판은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거나 공공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장치이다. 국가나 사회적 관점에서 재판은 거시적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공적인 절차로써 정당성을 부여하는 과정일 수 있다.여론이나 정치권은 대체로 공리주의적 시각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재판은 마땅히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방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가장 큰 부작용은 재판받는 당사자를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여길 수 있다는 점이다. 사회에 경각심을 주기 위해 ‘일벌백계(一罰百戒)’의 과한 처벌을 할 수도 있고, ‘국민통합’을 내세워 적당한 시점에 모든 죄를 사면할 수도 있다.반면 법관들은 재판 자체가 ‘목적’이자 ‘결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세상이 손가락질하는 범죄자라도 자신의 책임을 넘어서는 처벌은 할 수 없지만, 그 책임의 범위가 가려지면 그에 상응하는 처벌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는다. 재판을 걸어오는 사람이야 내심 달성하려는 목적이 있기 마련이겠지만, 판사들은 재판을 ‘수단’으로 삼아 다른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는 시도를 경계한다.판사들은 개별 사건의 결론을 그 사건 안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법정에서 증거를 통해 드러나지 않은 사정들은 판단의 대상이 아니고, 오히려 눈 돌리지 않는 것이 좋은 판사라고 믿는다. 사회적으로 주목을 받는 사건을 맡았을 때는 오히려 뉴스나 인터넷 기사에서 멀어지려고 애쓴다. 십여 년 이상 이런 사고와 생활 방식을 유지하다 보면 애초에 그러지 않았던 사람들도 점점 사회성을 잃어간다. 가끔 국민의 눈높이에 맞지 않는 판결들이 나온다는 비판을 받는 것은 이런 연유 때문인지도 모른다.판사들 역시 재판이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점은 인정한다. 하지만 좋은 세상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고, 재판에서 따져보기도 전에 올바른 방향이 어느 쪽이라고 미리 정하는 것은 도무지 받아들이기 어렵다. 내가 재판하는 당사자가 어떠한 세력이 추구하는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대우받는 것 같은 현실은 마치 판사가 싸워야 할 장벽처럼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사회성 없는 사람에게 가장 어울리는 직업이 판사가 아닌가 싶다.유영근 지원장(남양주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