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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령 한글화 시책'은 폐기되어야 한다

    이인호 교수(중앙대 로스쿨 교수·한국정보법학회 공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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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한민국의 헌법은 1948년의 제정에서부터 1987년의 현행 헌법에 이르기까지 국가생활의 기본적인 원리와 규범을 한자혼용으로 표기하여 왔다. 예를 들어, 제1조에서 "大韓民國은 民主共和國이다. 大韓民國의 主權은 國民에게 있고, 모든 權力은 國民으로부터 나온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는 한자와 한글이 모두 한국어를 표기하는 공용문자로서 동등한 헌법적 지위를 부여받고 있음을 의미한다.

    물론 일반시민이 위 헌법의 문언을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표기한다고 해서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한글전용이든 한자혼용이든 모두 한국어의 타당한 표기법이다. 따라서 국민은 이 두 가지의 국어정서법(國語正書法)을 문자생활에서 자연스럽게 활용하고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만일 국가가 한글전용만을 활용하도록 강제하거나 유도하는 것은 헌법이 예정하고 있는 어문질서를 부정하는 것이며, 국민의 문자선택권을 위헌적으로 침해하는 것이다.

    2005년에 제정된 '국어기본법'은 국민이 한글전용만을 활용하도록 강제 및 유도하는 법률로서 헌법의 어문질서에 반한다. 이 짧은 글에서는 이에 관한 논증은 생략하고, 국어기본법의 제정취지에 따라 2006년에 법제처가 '법령 한글화 시책'을 추진한 것이 무모하고 위험한 실험이라는 점을 규탄하고자 한다.

    법제처가 이 시책을 추진하기 전까지 모든 법전은 헌법과 마찬가지로 한자혼용이었다. 그런데 2006년부터 법제처는 '모든 법령문은 한글로 표기한다'는 기본원칙을 세우고, 다만 이해가 어렵거나 혼동의 우려가 있을 때에만 괄호 안에 한자를 표기하도록 하였다. 정부의 모든 법령은 법제처의 심의를 거치기 때문에, '법령 한글화 시책'에 따라 그 동안 한자로 표기되어 있던 법률용어들이 법령의 개정을 통해 전부 한글로 교체되고 있다. 법전에서 한자가 거의 사라져가고 있다. 그러나 법률용어는 90퍼센트 이상이 한자어인데, 그 어원인 한자를 잃어버린다면 법률용어로서의 정확한 의미를 담아내지 못하게 된다.

    '국민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법령문을 만든다'는 취지는 이해되지만, 함축된 뜻을 지닌 한자어의 법률용어를 무턱대고 한글로 표기한다고 해서 이해가 쉬워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한글로 표기하면 한자를 전혀 모르는 국민이 그저 읽을 수는 있겠지만 뜻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이다. 오히려 한자를 아는 국민들이나 법률가 또는 새로이 입문하는 법학도에게 정확한 뜻의 전달을 어렵게 만든다. '피의자, 피고인, 공판기일, 기명날인'의 개념을 무턱대고 외우기보다 '被疑者, 被告人, 公判期日, 記名捺印'의 한자를 통해 그 뜻을 추지(推知)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아야 한다. 한자는 그림문자이기 때문에 그 이미지와 뜻이 뚜렷하게 뇌리에 그려져 이해도를 높인다. 한자어의 법률용어를 한글전용으로 변환하더라도 그 뜻의 정확한 전달이 가능한 것은 그 한자어의 어원인 한자의 이미지와 뜻이 뇌리에서 재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즈음 법전을 찾아보는 것은 대부분 인터넷의 사이트(법제처의 국가법령정보센터) 혹은 모바일의 애플리케이션을 통해서인데, 이런 디지털 법전에서는 한글/한자 변환기능이 있어서 한자를 읽지 못하는 사람들의 경우 클릭 한 번으로 한자표기를 한글표기로 쉽게 전환하여 읽을 수 있다. 그것으로 한자를 읽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는 충분하다.

    그렇지만 법규범의 전거(典據)가 되는 원전에는 한자어의 원형을 그대로 살려두어야만 '의미의 정확한 전달'과 '읽기 쉬운 법률문장'의 두 장점을 다 취할 수 있다. '법령 한글화 시책'으로 인해 법령의 원전에서 수많은 한자어로 구성된 법률문장이 한글로 고정되어버렸기 때문에, 인터넷이나 모바일의 디지털 법전에서도 그 어원을 확인할 길이 없다. 한자를 읽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읽기 쉬운 법령'이라는 명분은 얻었을지 모르나, 그 명분은 디지털 법전에서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것이고, 오로지 '의미의 정확한 전달'이라는 법률문장의 중요한 기능을 상실시킬 뿐이다. 법문의 이해용이성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한자어로 된 법률용어를 모두 한글로 표기하는 것은 오히려 이해력을 떨어뜨리는 것이어서 결코 '좋은 법'이라고 할 수 없다.

    요컨대, '법령 한글화 시책'은 중대한 정책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일 뿐만 아니라 헌법의 어문질서를 부정하는 것이며 동시에 어문생활에서 한자혼용과 한글전용을 자유롭게 활용하고 선택할 수 있는 국민의 문자선택권을 부당하게 박탈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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