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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2) 대방광불화엄경 권 제49

    김영복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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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화경의 마지막 품인 보현보살권발품(普賢菩薩勸發品)에 보면 “어지러운 세상에 법화경을 받아 지니면 보현보살이 흰 코끼리를 타고 와서 수호한다. 다만 수지(受持)하거나 쓰기(寫經)만 하여도 온갖 공덕이 있다”는 내용이 있어 신라시대에 불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부터 사경(寫經)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사경은 신라시대에도 유행했지만 고려시대에는 더욱 성행하였으며 조선말기까지도 그 명맥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신라와 고려 초기에 쓴 사경은 남아 있는 것이 몇 점 없고 고려후기 즉 13세기 후반과 14세기 전반 때 제작된 것이 가장 많이 남아있다. 고려후기에 팔만대장경과 같이 나라의 평화와 백성의 편안함을 기원하기 위하여 사경에 대한 공덕이 컸기 때문에 제작수량이 더욱 많아졌다. 그리하여 왕실에서 발원한 국왕 발원 사경, 스님과 귀족 등이 제작한 개인 발원 사경이 각각 왕성하게 발전하게 된다. 제작방식으로는 왕실과 귀족층에서는 백지에 먹으로 쓴 묵사경(墨寫經)에서부터 은이나 금으로 쓴 은니사경(銀泥寫經)이나 금니사경(金泥寫經)까지 다양하게 유행하게 된다. 금이나 은으로 제작한 것은 아마도 변하지 않고 글씨의 상태가 오래가며 공덕이 보다 더 커지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종이 사용의 경우 신라시대에는 주로 백지(白紙)에 먹으로 사경을 하였지만, 고려시대에는 백지에 잘 들어나지 않아 종이에 물을 들인 감지(紺紙, 감색 종이)나 상지(橡紙, 도토리로 물들인 종이)에 금이나 은으로 글씨를 쓰게 된다. 또 표지나 뒷부분의 그림 또는 문양, 즉 변상도(變相圖), 신장상(神將像), 보상화문(寶相華紋) 등을 그려 넣어 아름답고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대방광불화엄경 권 제49 스님 발원의 작품은 향여 체원(向如 體元, ?-1338)스님이 1329년에 발원하여 만든 사경인데, 스님이 처음부터 발원하여 사성(寫成)한 것은 아니고 전해오던 사경이 약간 글자의 산화와 한두 장의 경문이 떨어져 나가자 이 사경의 떨어져나간 부분을 보완하고 산화된 부분은 다시 써서 완전한 사경으로 완성한 것이다. 이는 권말에 ‘천력이년기사오월 일사주지대사 향여보질서(天曆二年己巳五月 日寺主持大師 向如補秩書)’라는 간기를 통해 알 수 있다. 체원 스님은 고려 최고의 학자로 알려진 익재 이제현(益齋 李齊賢: 1287-1367)의 형이며, 출가해 해인사를 중심으로 화엄종풍을 크게 드날린 스님으로 유명하다. 이 사경과 거의 유사한 유물이 보물 제 1103호로 지정된 '감지은니대광불화엄경 제13'인데, 이 보물 사경도 체원 스님이 보서한 기록은 있으나 연도가 없어 본 작품과 거의 같은 시기인 1329년을 전후해 씌여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 감지에 금은가루를 사용하여 글씨를 쓴 점, 두루마리로 이루어져 있고 화려한 꽃무늬로 장식한 표지에 경(經)의 이름이 금색으로 쓰여 있는 점, 그 아래 원형 속에 진본(晉本) 화엄경을 표시하는 ‘진(晉)’자를 금색으로 쓴 모양까지 두 사경이 너무나 비슷하다. 재료만 조금씩 다를 뿐 형식은 똑같아 본 출품작 또한 보물급에 해당하는 작품이라 볼 수 있다.

    글씨로 보아 은자원에서 국왕이 발원한 사경의 해지고 산화된 부분을 체원이 나중에 보서하여 앞뒤와 중간 4쪽, 총 6쪽을 보완하여 지금의 은니사경을 완성한 것으로 보인다. 1-17장이 완벽히 남아 있는 이 사경은 두 종류의 글씨로 쓰여 있고 앞의 장식문양과 경심(經心) 나무가 그 당시의 것으로 완벽하게 남아 있고 당시 사경의 제작과정을 알 수 있어 사료적으로나 작품적인 가치면에서도 매우 귀중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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