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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4) 통례원계회도

    김영복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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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전해져 오는 그림 중에 16세기에 유행했던 계회도(契會圖)를 보면, 집단 이기주가 너무 지나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16세기에 들어서 이상하게도 계회도가 유행한다. 그 전에도 계회(契會)가 많이 있었다는 기록은 나오지만 그림으로 전해오는 것은 거의 없다. 누가 그렸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당시 산수화로 전하는 작품이 없기 때문에 이 계회도의 그림을 보면 중국의 영향이 당연히 보이지만 그 나름의 특징이 있다. 동시대의 중국과 일본에도 별로 없는 아니 거의 없는 형식이다.

    전체를 삼단으로 구분하여 상단에는 대부분 전서(篆書)로 계회도의 정식 명칭을 적고, 중단에는 계회 장면을, 하단에는 그 모임에 참여한 사람의 이름을 적은 좌목(座目)을 쓴다. 그리 벼슬이 높은 사람들의 모임도 아닌데, 이렇게 힘을 들여 꼭 계회도를 그린 이유는 무엇일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17세기에 오면 각 집안에서 족보를 만드는 것이 유행하게 되는데 아마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성 싶다. 임진왜란을 겪고 난 후에 인구도 늘어나고 집안이 번성하면서 가문의 강한 결속력의 과시가 이러한 족보의 발간이며, 이의 전단계가 친목도모를 목적으로 시작된 계회였지만 결국에는 집단의 결속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바뀐 것과 다르지 않다고 여겨진다.

    여기 소개하는 ‘통례원계회도(通禮院契會圖·사진)’는 16세기 후반 즉 1586년에 통례원 관리들의 모임인 계회의 장면을 그린 전형적인 당시의 계회도다. 통례원(通禮院)이란 조선시대 의례(儀禮)를 관장하는 관청으로 주로 궁중의 예절과 의식(儀式)을 관장하며 1392년 나라를 세우면서 생겼다.

    이 계회도는 16세기에 유행하던 계회도 답게 상단에는 ‘통례원계회도’란 표제가 전서로 씌여 있고, 중단의 계회 모습은 필자 생각으로는 한강의 마포 언저리쯤으로 여겨지며 멀리 관악산을 뒤 배경으로 한강 중류에는 배가 한 척 노닐고, 관념 산수도 같지만 실경 그림을 아스라이 표현했다. 한적한 강가의 풍광 속에 계원(契員)들의 행사 장면은 한강 가의 중간에 툭 튀어나온 조그만 언덕에 옹기종기 앉아 있고, 말을 타고 오는 계원 한 사람의 모습도 보인다. 뛰어난 한 폭의 산수화로 손색이 전혀 없고, 거기에서 노니는 관원 들은 동양화 그림 속의 인물일 뿐이다. 그림 좌측에는 제시(題詩)가 있다. 하단에는 계축에서 항상 쓰는 좌목(座目)으로 17인의 이름이 나와 있다.

    또 누구의 제시(題詩)인지는 모르나 ‘병술년 중추(丙戌年 仲秋)’라는 간지가 있어 1586년에 썼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좌목에도 적혀있는 이 모임에 참석한 이정회(李庭檜)가 이때 인의(引儀)로 있던 기록이 있어 이 시기와 일치한다. 처음에 제시는 그림 좌편에 있던 것이 아니고 그림 가장자리에 썼거나 혹은 다른 장에 씌어있던 것을 흩어질까 저어하여 후에 그림 좌측에 옮겨 놓은 것으로 보여 지며, 후대에 쓴 것은 아니다.

    이 시기에 또 다른 형식이 있으니 바로 이와 같이 제시를 쓴 것인데, ‘총마계회도(?馬契會圖)’는 선조 임금의 제시가 있고, ‘비변사계회도(備邊司契會圖)’는 당대 최고 문장가였던 신광한(申光漢)의 제시가 있다. 당시에는 임금이나 글을 잘하는 사람에게 제시를 부탁하여 쓴 것도 하나의 유행인 듯하나, 17~18세기가 되면서 이런 계축(契軸)의 형식에서 계첩(契帖)의 형태로 바뀌면서 산수는 없어지고 관청 안에서 행사하는 모습만 형식적으로 그리면서 제시는 없어지고 만다. 계회도는 기록화이기 때문에 실경의 중요성은 말할 것도 없고, 제작연도, 참석인원 등의 정보로 인해 그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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