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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7) 송준길 한글편지 서첩

    김영복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입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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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는 임진왜란이 지난 후 정치적으로나 학문적으로나 큰 변화가 일어났다. 정치적으로는 남명학파(南冥學派)와 퇴계학파(退溪學派)가 밀려나고 율곡학파(栗谷學派)가 인조반정으로 주도권을 잡았다. 그러나 퇴계학파와는 적당한 유대관계를 유지해 갔다. 이때 즉 17세기에 오면 예학(禮學)으로 인한 학파간의 치열한 학문적 견해와 정치적 상황과 얽여 그 전보다도 더 심한 붕당이 생겨난다.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의 제자인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 1548-1631)의 문하에 출입한 우암 송시열(尤菴 宋時烈: 1607-1689)과 동춘당 송준길(同春堂 宋浚吉: 1606-1672)은 이 중요한 시점에 그 중심에서 하나의 큰 기둥 역할을 하였다. 특히 송준길은 퇴계학파의 우복 정경세(愚伏 鄭經世: 1563-1633)의 사위였으므로 두 학파 간의 장점을 절충하였고, 특히 예학은 그 중심을 세웠다고 전한다. 우암과 동춘당의 학문과 정치적 통솔력은 당시에만 우뚝하였을 뿐만 아니라 후대에 미친 영향 또한 지대하다.

    우암의 글과 동춘당의 글씨로 된 비석은 누구나 바라는 바였다고 할 정도로 송준길은 학문 뿐만 아니라 글씨를 잘 쓰기로 유명하였다. 송준길은 조선 초기에 유행했던 송설체의 활달함과 선조가 아꼈던 석봉 한호(石峯 韓濩)의 단아하면서도 짜임새가 완벽한 글씨의 장점을 응용하여 철사를 휘여 놓은 듯 한 굳센 필획 속에 겉으로는 한 없이 부드럽고 활기 넘치는 글씨를 유행시켰다. 또 집안에 전해오는 선비박물관 소장 “선세언독(先世諺牘)” 한글 편지와 본 출품작의 한글 글씨를 보면 그 필획은 한문 글씨에서 그대로 이어져 부드러우면서도 생동감이 넘친다.

    이 한글 편지첩은 송준길이 민유중(閔維重: 1630-1687)에게 시집간 둘째 딸인 송씨 부인에게 보낸 편지모음이다. 총 11통으로 장첩된 이 한글 서첩은 ‘거인의 어믜’와 ‘집의’에게 보낸 것이다. 여기에서 ‘집의’는 1663년-1665년까지 사헌부(司憲府) 집의(執義)을 지낸 둘째 사위 민유중을 가리키며 ‘거인’은 아마도 민유중의 큰 아들인 민진후(閔鎭厚: 1659-1720)의 어릴 적의 이름으로 생각된다. 이 중 1665년 5월 27일 자 편지는 송준길의 연보와 왕조실록의 기사와 딱 일치한다.

    조선왕조실록 1665년5월26일 자에 ‘좌참찬(송준길)이 서울에 올라왔는데, 필시 머무를 곳이 없을 것이다. 해당 관서로 하여금 성안의 조용한 관사를 택하여 제공하도록 하라’라는 기사가 있고, 동춘당 연보 1665년 5월 28일자 기사 앞 쪽에 ‘상은 선생이 집이 없다 하여 예조에 명해 성 안의 조용한 관사를 골라 주게 하였으나, 선생은 사양하고 들어가 거처하지 않고 전에 거처하던 곳으로 가니, 또 명하여 그 거처를 수리하게 하고 액정인을 보내 문안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 서첩 중에 서울에 올라왔을 때인 5월 27일에 집의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은 이러하다. “집의 겸장 일졀 기별을 드르니 엇디들 인난다 나는 됴히 디내고 인노라 어제 우흐로셔 뎐교하옵셔 셩 안해 드러오라 하시고 집을 각별 자바 주라 하시고 가장 감격호대?마을 집의가 들기는 미안하고 셩 밧긔 잇기도 미안하니 명녜방꼴? 나생원댁 ?뷘집으로 가고져 호대?아직 뎡티 몯하여 하노라 하 밧바 이만 뎍노라 오월 스므닐웨날 셔울셔 (나 생원은 큰 사위 나명좌(羅明佐)를 말하는 듯)"


    350년이 지난 한 장의 편지가 그 당시의 한 역사의 무대를 그대로 재현할 수 있다는 것이 사료의 무한한 가치가 아닐까.

     

    김영복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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