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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어볼게요

    김미경 부장판사 (부산지법) 입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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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송(聽訟), 재판은 듣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듣는 귀는 마음에도 있어야 한다.

    원고는 돈을 빌려주고 못 받았다고 하고, 피고는 원고를 도와주고 사례로 받았다고 한다. 둘은 친구 사이였다. 피고에게 어떻게 돈을 받게 되었는지 설명해 보라고 했더니, 원고가 끼어들어 ‘쟤는 입만 열면 거짓말’이라며 들을 필요가 없다고 한다. 나는 짐짓 부드러운 말로 "들어볼게요" 했는데, 피고는 대답 대신 하소연을 시작했다. 장사도 안 되고 아이 학원비 낼 돈도 없어 너무 어렵다는 말이 이어진다. 결국 내가 "아유 요즘 안 어려운 사람이 있나요. 다 어렵지요. 근데 돈은 어떻게 받았어요?"라며 재촉하고 말았고, 순간 피고는 얼굴을 굳히고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첫 변론은 판사 덕분에, 그렇게 싸늘하게 끝났다.

    두 번째 변론 때는 조정실에서 만났고, 여전히 피고의 이야기는 신세한탄으로 시작되었다. 그 때 조정위원은 나와 달랐다. "아이고 많이 어려우시네요. 장사도 안 되는데 애들하고는 어떻게 지내세요?"라며 더 듣겠다는 눈길을 건넸고, 피고는 말을 이어나갈 용기가 생겼다. 신세한탄 끝에 내놓는 피고의 결론은 이렇다. 참 어려웠는데 원고가 준 돈으로 학원비도 내고 한시름 덜어 고마운 마음이었지만, 다 갚기 어려울 것 같아 우선 답변서에는 그렇게 썼다는 것이다. 고맙다는 말에 원고도 다시 친구의 얼굴로 돌아오고 있었다.

    나는 얼굴이 화끈거려 피고를 쳐다볼 수 없었다. 듣겠다고 해놓고서는, 말하고 싶은 피고의 진심을 원고보다 더 모질게 막아버린 판사였기 때문이다.

    소송으로 법정에서 만난 원·피고가 마음 한 켠에 둔 진심과 마주하려면 용기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때로는 서론이 길 수도 있다. 판사가 다그쳐 애써 용기 낸 진심을 더 깊이 묻어버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다. 깊숙한 기다림으로 마음을 기울여 잘 듣는 것, 그것이 재판이고 삶이고 그런가보다. 들어보자, 마음으로.

     

    김미경 부장판사 (부산지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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