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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께 낮아지는 기쁨

    조원익 변호사 입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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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에 들어가기에 앞서, 읽는 분들의 양해를 요청드리고자 한다. 이 글은 대중교통에서 교통약자의 이동권 편의증진에 관련한 글이다. 그런데 이 주제로 글을 쓰다보니 수도권(그 중에서도 서울)과 지방의 편차가 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서울에서 일어난 교통약자에 대한 배려가 단순히 반사적 이익이 아니라 권리이며, 지방에도 이와 같은 변화가 속히 추진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글을 이어가겠다.

    BMW가 뭔지 대부분은 잘 아시리라 생각한다. 독일의 유명 자동차제작사의 이름에 빗댄 해학적 표현인데, Bus(버스), Metro(지하철), Walking(도보)의 약자로 대중교통을 의미한다. 늘상 고급 세단에 몸을 실을 것 같은 법조인들의 이미지지만, 서울에서는 그 바쁜 일정을 맞추기가 자동차보다는 대중교통이 더 수월한 경우가 많다. 몰려드는 차들 사이에서 되려 교통체증으로 기일 시각을 맞추지 못해 상대방 변호사에게 연락해서 재판장에게 양해를 구하려고 할 때에는 성격 사나운 상대방 변호사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하기도 하지만, 지하철과 같은 정시성이 보장된 교통수단을 이용하면 그런 염려는 좀 덜 수 있기 때문이다(물론 BMW에서 만든 자동차 한 대 굴리며 도로를 누비는 상상은 상상만으로도 기분이 좋다).

    그렇게 자주 이용하는 대중교통이지만, 이런 대중교통에 소외된 사람들이 있었다. 교통약자들이다. 2005년에 제정된 “교통약자의 이동편의 증진법”에는 교통약자를 ‘장애인, 고령자, 임산부, 영유아를 동반한 사람, 어린이 등 일상생활에서 이동에 불편을 느끼는 사람’으로 정의한다. 이와같이 교통약자들을 위해 대중교통이 개선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지하철을 이용하고, 버스를 이용하던 한 장애인이 대중교통을 이용하던 과정에서 희생되면서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었고, 관련 법이 입법되기에 이르렀다. 입법된 이후에도 비용과 효율성의 문제로 여러 가지 시행착오가 있었고, 비장애인이나 교통약자가 아닌 사람에게는 교통약자를 위한 저상버스나 지하철 엘리베이터 설치를 경험할 때는 비효율적이란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것은 필자도 마찬가지였고, 공감하지 못하는 몰공감 비장애인의 한계였다(몰공감이 필자의 장애일 것이다).

    그랬던 필자가 요즘 BMW를 이용하면서 먼저 희생되고 먼저 목소리 내준 분들에게 고마움을 느낄 때가 많다. 이제 17개월 된 첫째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BMW를 이용하는데, 완전히 편하지는 않지만 대부분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늘상 아이를 등에 메고 다니다가 점점 무거워져 데리고 다니는 것이 부담스러울 즈음에 버스에 유모차를 실을 수 있는지 실험해 보았고, 저상버스에 유모차를 실으니 수월하게 이용할 수 있었다. 혼잡시간에는 여전히 이용하기 어렵더라도 주말에 가까운 장소에 나들이가기에는 적합한 수준이라는 것 자체가 하나의 감동이었다. 예전에는 저상버스의 고마움을 느끼지 못했었다.

    그리고 마라톤이 취미라서 춘천 마라톤대회에 출전하기 위해 가족들과 함께 지하철을 타고 서울지하철 6호선 마포구청역에서 경춘선 종점인 춘천역까지 간 일이 있었다. 그때도 지하철 환승지점마다 설치된 승강기를 통해 무리 없이 유모차를 끌고 춘천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불과 10여년 만에 일어난 변화이고, 사실 놀라운 것이다. 필자는 (아직) 교통약자가 아니지만, 필자의 아이는 교통약자이고, 그렇게 몰공감했던 사람에게서 태어난 아이는 교통약자로서 먼저 고통을 겪은 이들이 일궈놓은 열매를 누리고 있다. 때로는 필자가 아무런 노력한 바도 없는데, 이렇게 함께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이 부끄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리고 감사했다.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면서 필자의 아픔까지 함께 공감받을 수 있다는 감사함, 그리고 서로 마주치며 인사하지 않더라도 함께 누리는 공동체에 소속 됨을 느낄 수 있는 기회는 아주 먼 데 있지 않았다. 저상버스를 통해 함께 낮아짐으로 오히려 함께 기뻐하는 역설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런 것이 시민사회의 성장이고 진보가 아닐까.

    이렇게 일상에서 느끼는 진보에서 필자가 다루는 법률문제와 법해석은 어떠한지 돌아본다. 당사자의 주장과 관련법규를 따지다보면, 이것이 권리인지 아니면 단순히 반사적 이익에 불과한 것인지 검토하게 된다. 여전히 아주 부당하다고 느껴지는 요구들, 소위 ‘진상’이라고 불리는 모습도 있지만, 때로는 당사자가 일반적인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요구를 국가가, 또는 지방자치단체가 알지 못해서, 공감하지 못해서 생긴 원성은 아니었을지. 그래서 때로는 두럽다. 늘상 관행적으로 이루어지는, 과거의 해석을 그대로 따라하며 무성의한 답변으로 일관했던 것은 아닌지, 불편을 느낀 당사자의 고통을 필자가 공감하면 좀 더 다른 변화가 가능한 것은 아닌지 말이다.

    시대를 앞서간 판결들을 이끌어내기 위해 애쓴 선배 동료 법조인들의 노고와 또 그 판결을 위해 애쓴 당사자들의 고통의 과정을 볼 때면, 눈물이 날 때도, 감동이 밀려올 때도 있다. 하지만 그 날의 일은 그 자리에 멈춰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날에도 다른 장소에서 다른 모양으로 계속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1987년에는 호헌철폐 독재타도였고, 2005년에는 교통약자 이동권 증진일 것일 것이다. 2018년 한해 이 글을 읽는 법률가가 속한 그 자리에서 만들어낼 수 있는 ‘함께 낮아지는 기쁨’ 곧, 모두가 행복해지는 진보가 있기를 바라본다.

     

    조원익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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