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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remains of the day

    백강진 재판관 (크메르루즈 특별재판소) 입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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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제 형사재판에서 재판관의 공정성(impartiality)이 쟁점이 된 사례는 드물지 않다. 실제 불공정한 행위가 아닌 외관상 불공정의 우려가 있다는 취지가 다수이다. 그러나 국제재판관의 자격요건이나 선발과정, 취임선서 내용 등을 고려할 때 공정성이 강하게 추정되므로, 대부분 그 주장 사실에 대해 충분한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신청이 기각된다.


    법제를 불문하고 구체적 증명 정도에만 차이가 있을 뿐 막연한 의심만으로 판사를 특정 재판에서 배제하는 나라는 없다. 외관상 불공정의 우려는 정당하거나 객관적, 합리적이어야 하며 그 관찰자는 관련 사안에 대해 충분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는 점이 공통 요건이다.

    국제형사재판에서 만나게 되는 피고인은 이미 ‘도살자’, ‘살인기계’와 같은 별명을 가진 악명 높은 인물인 경우가 많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무런 선입견 없이 제출된 증거에만 기초하여 공정하게 재판을 진행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경험 많은 국제재판관은 이를 문제없이 해낼 수 있다고 여겨진다.

    최근 헤이그에 있는 국제재판소로서 ICTY의 잔여 업무를 처리하고 있는 특별재판소인 MICT(UN International Residual Mechanism for Criminal Tribunals)에서는 재판관의 공정성을 둘러싼 다소 예외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우리나라의 ‘수석부장’에 해당하는 Antonetti 판사가 특정 사건의 재판장이자 법원장인 Meron 판사에 대한 피고인 측의 기피신청을 받아들인 것이 발단이었다. 법원장이 과거 ICTY에서 피고인의 부하들에 대한 사건의 유죄판결에 관여한 바 있어 불공정 우려가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에 다른 사건 피고인도 같은 이유로 법원장에 대한 기피신청을 하자, 법원장은 신속한 사건 진행을 위해 스스로 사건을 회피하면서 수석부장의 결정이 선례에 비추어 잘못된 것이라고 언급하였다. 그 후 후속 재판관의 지명 권한을 둘러싸고 법원장과 수석부장 사이에 다툼이 발생하였고, 그 과정에서 검사가 수석부장에 대한 기피신청을 하기도 하였다.

    어느 한 편의 범죄자가 다른 편의 영웅이 되곤 하는 복잡한 발칸 반도의 분쟁에서, 그간 국제재판소의 공정성에 대한 외부로부터의 비판이 있기는 하였으나, 재판관들까지 서로 문제 삼는 사태에 이른 것은 드문 경우가 아닐 수 없다.

    특정 사안을 기존의 국내 사법체계에 맡기는 것이 불가능하거나 부적당하여 설립된 임시 국제특별재판소에서는, 일정 범위의 사건과 사람만을 대상으로 비교적 제한된 수의 법관이 계속 관여하게 되므로, 정당성이나 공정성에 대한 문제가 제기될 가능성이 항상 잠재하여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과거에 동일, 유사 사안의 재판에 관여하였다는 이유만으로 법관을 후속 사건에서 배제하는 것은 직업 법관의 전문성을 지나치게 경시하는 조치라고 볼 수도 있다.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가 소설 ‘남아 있는 나날(the remains of the day)’에서 집사(butler)의 직업적 품위(dignity)에 관하여 표현한 내용을 변용해 본다면, 전문직업인으로서의 법관 또한 ‘어떤 이유에서든’ 자신의 전문가적 실존(professional being)을 쉽사리 포기하지 않는 것이 기대되기 때문이다. 그 직업을 상징하는 ‘공정성’이라는 외투를 벗어던지는 순간, 그는 대중의 시선 앞에 남겨진 연약한 한 인간일 뿐이다.


    백강진 재판관 (크메르루즈 특별재판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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