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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죄추정의 원칙을 다시 생각하며

    이숙연 고법판사 (서울고등법원) 입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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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상 인류를 살린 위대한 발명은 무엇일까. 페니실린, 종두법…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나, 무죄추정의 원칙이야말로 무고한 희생을 막은 최고의 사회제도적 발명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런데 실무 곳곳에서 무죄추정의 원칙이 퇴색된 장면이 보인다. 최근 공개소환되어 수사를 받던 피의자가 극단적 선택을 한 사례가 재발하면서 이를 돌아보게 된다.


    이제 ‘포토라인에 세우다’는 표현은 ‘(지명도 있는) 피의자를 수사기관에 공개소환하여 기자로 하여금 혐의 인정 여부를 공개질의하게 하며 그 과정을 전국에 방영한다’는 의미로 정착되었다. 피의자가 포토라인을 통과하여 수사받으러 가는 장면은, 육체적 고통이나 시련을 가하고 그 결과에 따라 유무죄를 판단했던 중세의 시련재판(trial by ordeal)을 연상시킨다. 수십대의 카메라 앞에 선 피의자는 중압감과 수치심을 극복하고 침착하고 당당한 태도를 유지해야 유무죄 판단의 1차 관문을 통과하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일반 피의자에 대한 촬영허용행위에 대해, 헌법재판소는 ‘언론 보도를 보다 실감나게 하기 위한 목적 외에 어떠한 공익도 인정할 수 없는 반면, 피의자로서 얼굴이 공개되어 초상권을 비롯한 인격권에 대한 중대한 제한을 받았고, 촬영한 것이 언론에 보도될 경우 범인으로서의 낙인 효과와 그 파급효는 매우 가혹하여 법익균형성도 인정되지 아니하므로, 과잉금지원칙에 위반되어 청구인의 인격권을 침해하였다’고 판시한 바 있다(2012헌마652). 공인이라 해도 공개소환하여 그 과정을 촬영 및 방영되게 하는 것은 헌법상 과잉금지원칙에 반할 우려가 크다. 수사기관은 수사에 필요한 때 피의자의 출석을 요구하여 진술을 들을 수 있으나, 피의자에게 출석의무는 없으며 다만, 정당한 이유없이 불출석할 경우 체포영장에 의한 체포의 위험을 감수하게 될 뿐이다. 무엇보다 형사소송법에는 피의자가 공개소환과 포토라인의 시련을 수인해야 할 의무 조항이 없다.

    중요 사건에 관하여 피의사실에 대한 상세한 언론보도도 관행이 되었다. 피의자에게도 명예가 있고 지켜야 할 가족이 있을 것이다. 피의사실이 해명되고 무죄판결이 확정되더라도 한번 금이 간 명예가 다시 회복되기는 어렵고 재기가 어려울 정도의 타격을 입게 된다. 우리 형법 제126조는 피의사실을 공판청구 전에 공표한 행위를 처벌하고 있고, 이에 대하여 별도의 위법성 조각사유를 두고 있지 않다. 중요사건에 대한 국민의 알 권리를 고려하더라도 피의사실 공표가 ‘법령에 의한 행위’이거나 ‘업무로 인한 행위’일 수 없고, 실체적 진실을 입증할 증거가 충분히 확보되고 공소제기 전이라도 시급히 이를 알려야 할 공익의 존재가 명백하지 않다면, ‘사회상규에 위배되지 아니하는 행위’로 보기 어려울 것이다.

    형사사법절차를 담당하는 사람이라면 수사나 재판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오판을 하여 타인의 삶에 큰 상처를 줄 수 있다. 필자 또한 그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부득이하게 감수해야 할 짐을 지는 것은 어쩔 수 없더라도, 법률규정에도 없고 꼭 필요하지도 않은 절차와 행위를 보태어 새롭게 업보를 쌓을 이유는 없지 않은가. 누구나 알고 있고 여러차례 언급되었으면서도 바뀌지 않는 실무를 보며 형사소송법의 대원칙을 되새겨 본다.


    이숙연 고법판사 (서울고등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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