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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성채무자에 대한 소고

    서영민 변호사 (법무법인 정암) 입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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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변호사들과 마찬가지로 필자 또한 대여금으로 인하여 유발되거나 파생된 사건들을 자주 접하는 편인데, 그 과정에서 특이한 부류의 인간들을 왕왕 만나곤 한다. 그들은 이른바 ‘악성채무자’라고 불리우는 자들인데, 정상인들과는 완전히 다른 사고방식을 갖고 있으며 돈을 빌리면서도 하나같이 변제기를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태도를 보인다. 그들에게 변제기란, 갚아보려고 노력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해놓은 일응의 기준에 불과한 것이다. 그들의 입장에서 좀더 자세히 논하자면, 그 기준은 상황에 따라서 얼마든지 바뀔 수 있으며 이는 어디까지나 부득이한 사유에 의한 것인바, 그들에게 변제기를 지키지 못한 책임을 엄중하게 묻는 것은 부적절하므로 가급적 이해하고 넘어가는 편이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 그들은 항상 여러 채무들을 변제하여야 하는 가여운 형편에 처해 있기 때문에 채권자들은 이를 배려해주어야 하며, 변제하려고 열심히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불운하게 실패한다면 이를 너그러이 용서하고 이자를 삭감해주거나 집행을 보류하는 등 온정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들은 이러한 사고방식 때문에 채무불이행을 흔히 '돈을 실수했다’라고 표현하곤 한다. 무릇 실수란 완벽한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현실에서 누구나 저지를 수 있는 행동이므로, 채무불이행이란 곧 채무자의 능력이 부족하거나 채무자가 처한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이라는 의미이다. 그들이 빌린 돈은 채권자에게 매우 요긴한 것이었거나 심지어 채권자가 타인으로부터 적지 않은 이자를 주고 빌려온 것일 수도 있지만, 그들에게 채무불이행이란 위와 같이 단순한 실수에 지나지 않는 것이므로 이를 매정하게 탓하여서는 안 되고, 어쨌든 동일한 채무로 인하여 곤란을 겪게 된 사람들끼리 동병상련의 견지에서 상황이 호전되기만을 기다리는 것이 현명한 대응이라는 전제도 숨어 있다. 애당초 그들에게 제때 갚지도 못할 돈을 빌린 것에 대한 죄책감 따위가 있을 리 없으므로, 이후의 상황에 대하여 책임질 이유 또한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들은 돈을 빌릴 당시 변제기를 지킬 수 없으리라고 충분히 예상하였으면서도 이런 짓을 반복적으로 저지른다.

    소송이나 고소를 한다고 해서 없는 돈이 당장 나오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들은 특히 법적 대응을 운운하는 채권자들을 경멸한다. 대개 민사적 청구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고, 고소를 당해도 최대한 시간을 끌면서 수사기관의 눈치를 살피다가 구속의 위험이 표면화될 때라야 비로소 합의를 시도하면서 고소를 취소해줄 것을 요구한다. 갚으려고 노력하였으나 도저히 갚지 못한 것이니 사기꾼이라고 불릴 이유가 하등 없다고 강변하면서, “고소를 하지 않았으면 시간이 오래 걸려도 당신 것만큼은 반드시 갚아주려고 했는데, 이처럼 고소했으니 설령 내가 징역을 사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갚아주지 않겠다. 고소한다고 돈을 받을 수 있을까 보냐!”라며 되려 큰소리를 치는 경우도 허다하다. 틀린 말은 아닌데, 채권자로서는 울화병이 나 살 수가 없다. 악성채무자에 걸려서 돈 떼이고 시간 버리고 마음 상하고, 심지어는 법률 사무의 처리에 소요되는 비용 등 추가적인 손실까지 감당하여야 하니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닌데도, 그 원인을 제공한 자로부터 한 마디 사과조차 받지 못하는 것이다.

    필자가 악성채무자들에게 흥미를 갖게 되어 이처럼 그들의 사고와 심리를 관찰한 바로는, 그들을 일반적인 사회구성원들과 완전히 다른 존재로 간주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대응방법이다. 불가피하게 그들과의 거래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면, 그들의 인격이나 품성을 탓하는 것은 별 실익이 없으니 차라리 다음의 원칙을 지킴으로써 금전적 손실을 최소화하는 편이 낫다. 그 원칙은 바로 ‘절대로 先 제공을 하지 않는 것’인데, 부연하자면 엄격하게 동시 이행을 고수함으로써 급부에 대한 반대급부만을 제공하는 것이다. 악성채무자들일수록 본인의 목하 필요에 대해서는 매우 민감하기 때문에, 이후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필요를 충족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의 돈을 우선 빌리고 보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그들의 필요를 먼저 충족시켜주고 기약 없는 채권자가 되는 것은 그야말로 바보짓이다. 또다른 필요나 위험에 직면하지 않는 한 채권의 변제를 미루고 또 미룰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제공하는 물적·인적 담보도 부실하기 짝이 없거나, 또다른 필요나 위험 앞에서 이중으로 제공될 가능성이 농후하므로 크게 기대하여서는 안 된다.

    여담이지만 변호사만큼 위의 원칙을 잘 지키는 직업인들도 드문데, 수임료를 받지 않으면 대개 업무에 착수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지간해서는 외상이나 분할 납부를 허용하지 않고, 약정을 지키지 않으면 즉시 업무를 중단하거나 사임서를 내버리기도 한다. 일반적인 거래관계에서처럼 미수금으로 인하여 골머리를 앓거나 ‘을’의 입장에서 먼저 일을 해주고 하릴없이 떼 먹히는 경우가 많지 않은 편인데, 이는 업무의 특성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악성채무자들을 워낙 많이 대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터득한 요령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인지 제아무리 뻔뻔한 악성채무자라고 하더라도, 변호사사무실에 주는 수임료는 실수 없이(?) 처리하는 것 같기는 한데… 필자 개인적으로는 결국 그 수임료가 다른 선량한 채권자들(채무자가 변제기를 지키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로부터 받아낸 돈이거나 그들에게 갚을 것을 미루고 마련한 돈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끔씩 할 때가 있으므로, 마음이 그다지 편하지만은 않다. 의뢰인들의 정당한 이익을 지키고자 노력하는 입장에서 어쨌든 고민이 될 수밖에 없는 문제라고 하겠다.


    서영민 변호사 (법무법인 정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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